토라포션 18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이번 주 토라포션: 출 25:1-27:19/ 왕상 5:26-6:13/ 마 12:46-13:58

토라포션 18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4]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5]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6]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7]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출 25:1-9)

 

출애굽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율법과 성막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빼 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원하셨다. 그래서 주신 것이 율법과 성막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대해서 출애굽기 25장부터 40장까지 설명하신다. 오늘 토라포션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막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가시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랐다. 그리고 거기서 40일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과 율법을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이어 성막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출 25:8-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여기서 장막, 곧 성막은 히브리어로 미쉬칸이다. ‘거하는 곳’이란 뜻이다. 동사형 쇼헨은 ‘거주하다’라는 뜻이고, 명사형 샤칸은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 즉 이웃’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사람들 가까이서 함께 사시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은 아담과 함께 거주하실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실로 오랜만에 성막을 통해 다시금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주하기로 결정하신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왜 그 조그만 성막 안에 거하시겠다고 했을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서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살아왔던 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보이는 형태로 가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씩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쳤다. 그리고 이 성막을 중심으로 광야에서 이동했다. 출 40: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통해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성막이 그들의 영적 구심점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막을 만들어 주시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위해 지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모세에게 자원하는 예물을 받으라고 하셨다. 출 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이 예물은 어디에서 난 것일까?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사람들에게서 받아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예물 중 일부는 성막을 위해 바쳐지기 전 우상을 위해 바쳐진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성막의 청사진을 받는 동안 산 밑에서는 기다리다 지친 백성들이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아론에게 독촉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금고리를 바쳐 금송아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시내산에 강림한 하나님의 영광 앞에 떨던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환경이 불안해지자 금새 그들에게 익숙한 우상에 마음이 기울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첫걸음을 이제 막 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아셨다. 그래서 더더욱 눈에 보이는 성막을 통해 인도할 필요가 있으셨다.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존만을 위해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건설을 통해 점점 하나의 공동체로 변해간다. 어떤 사람은 금을 가져왔고, 어떤 사람은 은이나 놋을 가져왔다. 어떤 사람은 나무를 가져 왔고, 도 어던 사람들은 실이나 가죽이나 기름을 가져왔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자신들에게 있는 것을 바치면서 성막을 함께 만들어냈다.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을 만들어 내는데 모두가 기여하게 된 것이다.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막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그리고 가나안에 정착하여 실로에 이 성막을 두면서 실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구심점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던 여호수아가 죽고 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소견이 옳은대로 행하는 사사기의 혼돈기에 빠진다. 그들은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의 언약궤를 앞세우면 승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언약궤는 빼앗기고 실로는 멸망하고 만다. 하나님은 어디가신 것일까?

성막이 처음 만들어 지고 480년 후에 예루살렘엔 성전이 세워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그곳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왕상 6:11-13, “여호와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2]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13]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에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

성전건축과 함께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 백성들은 그 영광을 보고 기뻐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성전이 지어지고 300년이 채 되기도 전에 에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들어야 했다. 렘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26:6,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성전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믿었지만, 그러나 BC 586년 성전은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만다. 너희 가운데 거하겠다는 하나님은 어디가신 것일까?

렘 7:9-11,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지켜지지 않고 도둑의 소굴로 변한 성전에 더이상 거하실 수 없으셨다.

사 66:1-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 그 마음 가운데 함께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형식적인 제사가 드려지는 곳이 아니다. 순종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만날 때 안식을 누리신다. 그래서 그 사람 안에서 자신을 더 나타내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단순히 장소로서의 성전이 아니다.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삶의 현장이다.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는 곳이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으며 약한 자를 배려하는 곳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이다. 모함이나 험담으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는 곳, 다른 신들의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의식에 빠져 자기들이 지은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했다. 삶의 현장에서는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거짓과 우상을 섬기면서 성전에 와서 자신들은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안도감을 누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이처럼 자기중심성에 빠진 유대인들을 도전하셨다. 이미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에 가셔서 환전상의 상을 엎으시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후에야 이 말을 이해하게 됐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로서의 성막, 성전시대는 끝났다. 히브리서는 그 사실을 이렇게 선포한다. 히 9:1, 9-12,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제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과 함께 거주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제 예수님께 마음을 열고 그를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우상을 향한 마음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고 살 때 그 마음이 순식간에 우상에게 기울어짐을 보았다. 우리의 마음은 진공상태가 아니다. 성전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 시대의 우상들을 향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기초가 되는 교회 공동체가 필요하다. 엡 2:19-22,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막 역시 모세 한 사람에 의해 지어지지 않았다. 온 백성이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것을 드리며 자신의 재능으로 기여할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이 세워졌다. 자신이 가진 그 모습 그대로 헌신할 때 하나님이 거하시며 역사하시는 공간을 창조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약 백성인 우리들은 다른 사람과 연결하여 우리의 삶을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어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다. 우리는 홀로 성전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을 기초로 하여 함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교회로 지어져 가는 것이다. 바라기는 주님께서 세우신 욥바교회를 통해 올 한 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함께 세워져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거주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거하실 때 우리는 시대의 우상에게 절하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우리와 함께 사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소망이다. 계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여기 계신 모두가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삶, 하나님이 눈물을 닦아주시는 삶을 살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6년 2월 13일 샤밧 설교 이익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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