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22 상한 심령을 드리는 예배자

이번 주 토라포션: 레1:1-5:26/ 사 43:21-44:23/ 막 7:1-30

토라포션 22 상한 심령을 드리는 예배자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레 1:1-2)

 

얼마 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이 있었다. 네 번 지고 한 번 이겼다. 알파고와 바둑을 둔다는 기사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알파고등학교 학생들과 대결하는 줄 알았다. 무슨 바둑 특목고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봤더니 알파고는 구글에서 개발한 인공지능이었다. 알파고의 “go”는 바둑을 뜻하는 한자 ‘기’의 일본어 발음이라고 한다. 즉 바둑을 위한 인공지능이다.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이세돌이 이겨주기를 간절히 바란 직업군이 있었다고 한다. 누굴까? 판사들이었다. 앞으로 ‘인공지능 판사’가 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에 피고인의 혐의, 원고, 피고의 주장 등을 입력하면 인간 판사보다 더 신속하고 정확하게 판결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판사들이 할일이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지난 12일 법률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이세돌 9단이 꼭 알파고를 이겼으면 좋겠다”고 썼다고 한다.

2015년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칼 프레이 교수는 ‘창의성 대 로봇’이라는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2010년의 직업군 중 47퍼센트가 10년에서 20년 안에 컴퓨터 자동화의 영향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 연구 결과의 핵심내용이다. 향후 20년 내에 로봇에 의해 사라질 직업 1위가 뭘까? 텔레 마케터다. 사라질 가능성 98.7%다. 11위는 운전기사다. 그 때가 되면 무인자동차 시대가 열린다는 전망이다. 18위는 보석 가공 연마직이라고 한다. 보석업에 종사하시는 분들 대비하셔야 한다. 판사들도 로봇대체 가능성이 40.1퍼센트로 꽤 높게 나왔다. 반면 가장 안전한 직업군은 뭘까? 정신건강을 다루는 사회복지 상담사와 재활치료 의료사였다. 0.3%의 로봇 대체 가능성을 보였다. 초등학교 교사, 치과 의사, 내과 외과 의사도 0.4%의 낮은 대체율을 보였다.

과거 전화기만 있던 시절, 우리는 왠만한 전화번호는 다 외우고 있었다. 그러나 스마트폰에 저장하게 되면서 우리는 이제 우리의 기억을 휴대폰에 맡기게 되었다. 전화번호 기억만 맡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맡긴다. 스마트폰은 이제 모르는 길을 찾아주고 여가까지 책임져 주는 생활의 동반자가 되었다. 간단한 번역과 통역도 가능하다. 아직은 초기단계지만 앞으로 외국어를 힘들여 배울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바벨탑에서 인류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자신들의 문명을 건설하려 했기에 하나님은 인류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기술개발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혼잡했던 과거를 정리하려 하고 있다. 행복한 미래를 창조하겠다는 선전 이면에 하나님과 상관없는 어떠한 세계를 건설하려 할지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1년 뒤에 이세돌이 알파고와 재대결을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계는 정보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놀라운 속도로 계속 진화하기 때문이다.

테크노피아의 환상이 커져가는 이러한 때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레위기서다. 가장 고리타분한 성경이다. 새해 성경을 통독하려고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해도 많은 사람들이 이 레위기에서 막힌다. 여기서 소개되는 3500년 전 구약의 희생제도가 지금의 나와 상관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오늘 토라포션에서는 구약의 다섯가지 제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다섯가지 제사에 대해서 살펴보며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레 1: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성막이 완공되면서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막에 가득했다. 그래서 모세가 그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레위기를 시작하며 하나님은 그 성막에서 모세를 부르신다. “봐예크라”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뜻이다. ‘봐예크라’는 레위기서의 히브리어 제목이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모세는 비로소 그분께 나아갈 수 있었다. 모세가 출애굽이라는 정말 대책없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떨기나무 사이에서 “모세야, 모세야” 부르셨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다음을 알 수 없는 광야에서도 묵묵히 흔들리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더 가까이 초대하시는 분이다. 그분의 부르심을 들을 때에야 우리는 광야와 같은 미지의 세계를 겁없이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레 1: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여기서 예물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코르반이다. ‘가까이 하는 것’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올 수 있는 길을 먼저 알려주시는 분이다. 그것이 바로 레위기에서 소개하는 다섯가지 제사다. 이 제사들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번제다.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다. ‘올라간다’는 뜻이다. 불사르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올라’라고 한다.  동물을 잡아 남김없이 다 태워드리는 제사로 온전한 헌신을 상징한다. 레 1:3-6,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6]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여기서 수송아지를 누가 잡는가? 그것을 가져온 사람이다. 제사장이 아니다. 사냥해온 짐승을 바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기른 가축 중에 살아있는 것을 가져와서 자신이 직접 잡는 것이다. 가축은 히브리어로는 베헤마인데, 개역성경은 ‘생축’이라고 번역한다. 살아있는 가축이다. 자신이 기르느라 애정도 쏟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소유의 일부이기에 이것을 바치는 것은 상당한 각오가 필요하다. 그렇게 자신이 기른 가축을 안수하고 목을 쳐서 죽인다. 피를 쏟으며 울부짖으며 죽어가는 짐승을 보며 제사를 드리는 그 사람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내 죄를 대신 지고 죽어가는 가축을 보며 내가 지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참회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소는 24조각으로 각을 뜬다. 양과 염소는 12조각이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가축의 머리를 내려치며 고백한다. “하나님 내 교만을 자릅니다” 가슴의 각을 뜨며 고백한다. “죄악을 품은 내 가슴을 도려냅니다” 다리를 자르며 고백한다. “악을 향해 달려갔던 내 다리를 자릅니다” 엉덩이의 각을 뜨며 고백한다. “불의와 교만의 자리에 앉았던 내 엉덩이를 자릅니다.” 내장을 물로 닦으며 고백한다. “내 속의 시기, 질투, 미움을 닦습니다” 즉 동물의 각을 뜨며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그 제물과 동일시 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엡 5:2절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개역성경은 희생제물을 생축으로 번역한다. 히브리어로는 베헤마, 산채로 드려진 제물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위해 희생당하신 생축이라는 것이다.

히 10:5-10,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생축이 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구약 백성들이 희생제물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체험을 통해 죄가 사함받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체험을 통해 용서받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음 소개되는 제사는 소제다. 히브리어로는 ‘민하’다.  곡식을 태워 드리는 제사다. 자신이 직접 땀흘려 거둔 노동의 열매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소제는 소산물에 대한 감사이자 언약에 따라 자신의 소산에 계속 복주실 것에 대한 기대가 담겨져 있다.

다음은 화목제이다. ‘제바흐 슐라밈’, 화평의 제사다. 화목제는 감사를 표현하거나 서원을 드릴 때 드렸다. 내장과 기름은 불로 태워 드리고, 고기는 자녀와 노비와 제사를 담당한 레위인들과 함께 먹었다.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린 뒤 공동식사를 하며 이웃과의 화목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음은 속죄제이다. ‘하타’라는 말은 ‘빗나가다, 죄를 짓다’라는 뜻이 있다. 속죄제라는 히브리어는 ‘하타트’인데, ‘죄를 속하다, 죄를 씻어 없애다’라는 뜻이다. 속죄제는 알지 못하거나 실수로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마지막으로 속건제다. 속건제는 여호와의 성물에 피해를 입혔을 때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보상하는 제사다.

이처럼 구약의 제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더 그분께로 가까이 오게 하신 장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가까이 아는 백성으로 살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데 실패한다. 예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떻게 실패했을까? 먼저 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기 시작한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그들은 풍요와 다산을 보장해줄 것 같은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긴다. 북이스라엘 초대왕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단을 만들고 숭배한다. 북왕국 18명의 왕 중 15명이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간다. 하나님보다는 풍요를 약속하는 세상의 신들을 따라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예배의 본질을 망각하고 형식주의에 빠지게 된다. 점점 예배 따로, 삶 따로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살든 하나님께 제물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토라에 순종하는 삶은 사라지고 제물만 많이 바치면 용서 받고 복받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삶에 대해 선지자들을 통해 꾸짖으셨다.

사 1:11-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께서는 삶과 분리된 제사받기를 싫어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암 5:22-24,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미 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셨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인애는 헤세드다. 헤세드는 충성된 사랑이다. 상황과 환경, 조건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충성된 사랑을 하는데 실패했다. 풍요와 행복을 당장이라도 구현해줄 것 같았던 세상신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이웃에게 겸손히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은 귀찮아 했다. 희생을 선택하는 삶보다는 성공하는 삶을 원했다.

선지자들이 선포한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배와 삶은 떨어져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예배가 단순히 희생제물을 드리는 행위가 아님을 알게 된다. 결국 예배를 유효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다. 삶의 예배가 없을 때 우리가 매주 모여 드리는 예배는 소용없는 것이다.

시 51:16-17에서 다윗은 고백한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이것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넘어졌을 때 드린 기도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 다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이 그의 예배를 받아주셨음을 확신했다. 우리는 우리가 뭘 잘했기 때문에 떳떳하게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의 모습인 것이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상하고 통회하는 로봇은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테크노피아 시대가 와도 현대인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권면한다.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히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희생, 섬김, 정의와 공의, 선행과 나누어주기, 충성된 사랑… 이러한 가치는 기술진보사회가 그 매커니즘상 결코 만들낼 수 없는 가치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의 풍요를 누려서 강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높은 직위에 올라야 강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 한 분을 섬기고 정의와 사랑의 가치를 붙들고 살아갈 때 강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나와 여러분이 알파고를 이겨본 이세돌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공지능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하나님 한 분께 가까이 가는 예배자가 될 수 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변함없는 예배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인간미가 점점 사라지는 기술진보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묵묵히 이웃에게 심고 흘려보내는 제사장으로 살아가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3월 19일 이익환 목사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