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민 22:2-25:9/ 미 5:6-6:8/ 막 11:12-26
토라포션 37 덫 Vs. 창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 [7]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8]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9]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민 25:6-9)
40년 광야 생활의 끝이 이제 4개월이 남았다. 마라톤으로 치자면 42.195km 가운데 300m 정도만 남겨 놓은 상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건너편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 진을 친다.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이다. 그러나 강을 건너기까지 아직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모압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 이만 사천명이 죽는다. 이들은 왜 가나안 진입을 코 앞에 놔두고 죽어야만 했을까? 그들을 해하려고 친 덫에 걸렸기 때문이다.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신앙의 경주는 포기될 수 없다. 반드시 완주해야만 천국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수는 우리의 경주를 방해하기 위해 덫을 놓는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졌던 덫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덫에 걸리지 않는 인생, 신앙완주를 위한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덫을 놓은 사람으로 모압왕 발락이 등장한다. 민 22:2-3,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3]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음으로 말미암아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더라” 모압은 왜 그리 두려워했을까? 주변 나라가 이스라엘에 의해 무참히 깨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모압평지에 진을 치기 전 이스라엘은 아모리왕 시혼을 패배시킨다. 바산왕 옥도 물리친다. 이스라엘을 상대할 나라가 없음을 그는 알았다.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성경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그의 염려는 필요없는 것이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신 2:8-9, “우리가 … 모압 광야 길로 지날 때에 [9]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이스라엘은 모압과 싸울 의도가 없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몰랐던 모압왕 발락은 고민 끝에 미디안 장로들을 찾아간다.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를 통해 생긴 민족이었다. 그리고 모세의 장인도 미디안 사람이었다. 군사적으로 이길 방법이 없자 발락은 이스라엘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미디안을 찾아간 것이다. 그들의 결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의 덫을 놓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유명한 당대 최고의 점술가인 발람을 불러오기로 한다.
민 22:5-6, “그가 사신을 브올의 아들 발람의 고향인 강 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이르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6]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자, 발람을 불러오기 위해 모압의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많은 복채를 가지고 떠난다. 그러나 이 저주를 막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일하신다. 꿈에 발람에게 말씀하신다. 민 22:12,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이 하나님의 개입에 발람은 장로들을 돌려보낸다. 그러자 발락은 더 높은 고관들을 보낸다. 이에 발람이 말한다. 민 22:18,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상당히 신앙적인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가 했던 말,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이라는 말은 이미 돈에 대한 그의 환상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는 이미 복채에 사로잡혔고, 결국 복채 때문에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무당은 사실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얼마나 올바른 사람인지 묻지 않는다. 그들이 가져온 복채에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처방을 내려준다.
이런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이 있다. 하나님의 존재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복주기 원하신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발람은 물론 발락이나 미디안 장로들, 발락의 신하들 모두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문제는 그들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복신앙의 문제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없고 오직 자신들의 목적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교회를 오래다녀도 하나님을 단지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순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복지와 자신의 목적이 너무도 소중하여 복만 구하는 기복신앙을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발락이 아침에 발람을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른다. 거기서 이스라엘의 진영이 다 보였다. 이곳에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발람의 저주는 축복으로 바뀌어 선포된다. 발락은 장소를 두번 더 옮긴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발락이 놓은 저주의 덫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난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사람은 저주가 건들 수 없다. 저주도 축복으로 바꿔 놓으신다. 그것이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다.
민 24:25, “발람이 일어나 자기 곳으로 돌아가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더라” 이스라엘은 승승장구했다. 발락이 놓은 저주의 덫도 이스라엘의 행진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때가 위험한 때다. 사탄이 노리기 쉬운 때다. 발람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철수했을까? 아니다. 그는 미디안 장로들에게 간다. 복채를 다 받아내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어뜨릴 실제적인 제안을 한다. 음행이라는 덫을 놓는 것이었다. 즉, 모압의 여자들을 풀어 음행과 우상숭배를 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덫에 걸려들고 만다. 이것은 하나님이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민 31: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발람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는 꾀를 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서도 맘몬 앞에 절한 것이었다.
민 25:1-3,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여기서 음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자나’라는 동사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성행위가 아니라 이방신과 관련된 음행을 가리킬 때 씌었다. 계시록에서도 이 음행의 성격을 말한다. 계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 행음은 결국 바알숭배와 하나님에 대한 배교까지 연결되는 것이었다. 바알브올에게 가담했다는 말은 브올지역의 바알과 연합했다는 말이다. 가담했다는 단어 ‘짜마드’는 ‘함께 멍에를 지다. 짝이 되다. 연합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의 성축제에 참여함으로 바알과 계약을 맺고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뚜껑이 열리셨다. 히브리어로 ‘코가 뜨거워졌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조치는 단호했다. 민 25:4-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5]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 이것은 전체 백성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다.
메튜 헨리라는 주석가는 말했다. “우리는 험상궂는 세상의 두려움에 의해서보다는 미소짓는 세상의 매력에 의해 더 위협을 당한다.” 이스라엘이 무너진 것은 그들을 향해 미소짓는 여자들 때문이었다. 사탄은 음란의 덫, 돈과 명예라는 덫을 놓아 물게 한다. 그 덫에 걸린 사람은 영적인 어둠에 빠지게 된다. 음행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졌다. 그리하여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변질시켜 갔다. 사도 바울도 음행을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적으로 보고 음행하는 자를 출교시키는 조치를 취한다. 고전 5: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음행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덫인 것이다.
그리하여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사이에서 음행을 제거하기 위해 바알브올에 가담한 자를 죽이는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한 사건이 벌어진다. 우리가 처음 읽은 본문이다. 시므리라는 시므온 지파 지도자가 고스비라는 미디안 수령의 딸을 데리고 음행하기 위해 막사로 데리고 들어가는 일이 벌어진다. 이것은 음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고 있는 사이에 정말로 정신 못차리는 행위였다. 이것을 본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는 막사로 들어가 이 두 사람을 창으로 찔러 죽인다. 그러자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서 그치게 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민 25: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 때문에 질투하셨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놓치고 우상과 쾌락에 무릎 꿇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우셨다. 하나님의 질투는 죄에 대한 분노였고 그들을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거룩한 사랑이었다. 이 때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일어선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내 질투심으로 질투한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분노하실 때 함께 분노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사람이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사람은 덫에 걸리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해 창을 들게 된다. 자 그렇다면 누가 덫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하나님을 위해 창을 들 수 있는 사람이다. 신앙의 최종 목표는 형통한 삶이 아니다. 복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니다. 업적을 많이 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언약을 맺으신다. 민 25:12-13,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13]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이 정한 기준들이 무너지고 있다. 인간을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덫에 걸려 넘어지는 뉴스들이 자주 들려온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맘몬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돈과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모습들이 보인다.
자, 돈을 사랑해서 이스라엘에게 음행의 덫을 놓았던 발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음행으로 넘어지게 한 미디안에게 결국 원수를 갚게 하신다. 그리고 미디안의 다섯왕을 죽일 때 발람도 칼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돈에 눈이 멀었던 발람의 최후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안주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창을 들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한다. 그래야 덫에 걸리는 인생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웃고, 하나님과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다른 것에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매순간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내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란다. 덫에 걸려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생이 아니라 천국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경주를 완주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 날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창을 들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7월 23일 이익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