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39 광야의 기억을 치유하라

이번 주 토라포션: 민 30:2-36:13, 렘 2:4-28, 3:4, 마 23:1-25:46

토라포션 39 광야의 기억을 치유하라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대오를 갖추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2]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3] 그들이 첫째 달 열다섯째 날에 라암셋을 떠났으니 곧 유월절 다음 날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 큰 권능으로 나왔으니 [4]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 (민 33:1-4)

 

우리는 기억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보통 좋았던 기억들보다 아팠던 기억, 실수했던 기억이 오래가는 것 같다. 나쁜 기억들은 내가 원치 않은 순간에 우리 현재의 삶에 불쑥 찾아와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우리는 아픈 기억들을 빨리 덮어버리거나 잊어버리고 싶어한다. 유대인들에게 홀로코스트는 너무도 아픈 역사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기념하기 위해 곳곳에 기념관을 세웠다. 야드바쉠도 그 중 하나다. 이사야 56장 5절,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 (야드 바쉠) 을 그들에게 주겠다는 말씀에서 따온 이름이다. 야드바쉠 욥의 동상에 이런 글귀가 있다. 망각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포로가 되게 하고, 기억은 우리를 자유인이 되게 한다.” 유대인들을 자유인이 되기 위해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광야 40년의 시간을 끝내며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평지 아벨싯딤에 이르렀다. 이제 정말 가나안 바로 코 앞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여기서 모세에게 광야 40년의 노정을 기록하게 하신다. 왜 하루라도 빨리 풍요로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지, 과거의 여정을 기록하게 하셨을까? 기록은 기억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기억하기 원하셨다. 이 기억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라암셋을 떠나 여리고 맞은 편 모압평지에 이르기까지 40번 진을 친다. 광야 40년에 40번이니까 평균 1년에 한번 이사한 꼴이다. 애굽 라암셋에서 모압평지까지 걸어서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번 진을 치며 40년 만에 모압평지에 이르게 된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 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너를 낮추시며’ 광야는 겸손 훈련의 기간이었다.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광야는 또한 순종 훈련의 기간이었다. 겸손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고자 하나님은 광야를 허락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40수만에 가나안 대학에 합격통지서를 받게 된다.

이들이 어떤 노정을 지나왔는지 간략히 살펴보겠다. 이들이 떠난 라암셋에서 그들은 애굽의 노예였다.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 애굽과 구별됨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세의 인도 아래 라암셋을 떠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창세기 15장 13-14절 말씀의 성취였다. 창 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나일강 곡창지대가 있던 애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에서 70명의 야곱의 자손들은 250만명의 큰 민족으로 인큐베이팅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차서 애굽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큰 권능으로’ 나오게 된다. ‘큰 권능으로’란 말은 히브리어도 ‘베야드 라마’이다. 직역하면 ‘높은 손 안에서’ ‘큰 손과 함께’ 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손보셨던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라암셋을 떠난 것은 유월절 다음 날이었다. 유월절은 어린 양의 피를 통해 구원받은 날이었다. 이 유월절이 있고 나서 출애굽이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유월절에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다. 우리 인생의 출애굽도 이 유월절 사건을 통해 가능하다. 어린 양 예수님의 피가 믿음으로 우리 삶에 뿌려질 때 죄의 노예에서 나오게 되는 출애굽이 가능한 것이다. 여러분은 라암셋을 떠났는가? 여러분 인생에 출애굽 사건이 있었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십자가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백성으로 사는 인생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250만 되는 민족이 애굽을 떠나는 것은 사실 대책없는 일이다. 그러나 대책없는 일을 믿음으로 저질렀을 때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이 나타난다. 출 13:20-21,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큰 손길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음에도 그들의 광야 여정은 불신으로 가득한 여정이었다. 바로의 병거가 그들을 뒤쫓아오자 그들은 불신에 빠진다. 출 14:11-12,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하나님은 이 불신으로 가득한 백성들 앞에서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 군대를 그 바다 가운데 엎으시며 큰 구원의 손길을 보여주신다. 

홍해를 건너고 사흘이 못돼서 그들은 다시 원망에 빠진다. 마라에서 마실 물이 없자 모세를 원망한 것이다. 신광야에서 애굽에서 먹던 고기 생각이 나자 또 모세를 원망한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기적처럼 제공해주신다. 다시 하나님의 큰 손길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신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이르러 마실 물이 없자  그들은 모세에게 돌을 던질 기세로 원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게 하셔서 물을 공급해주신다.

이스라엘이 시내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십계명과 토라를 주신다. 그러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디자 그새를 못참고 자신들을 인도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동족인 레위자손을 통해 삼천명이 죽임을 당한다.

애굽을 떠난지 2년 만에 이들은 가데스바네아에 이른다. 그들은 가나안 정탐 이후 또다시 집단적 두려움과 원망에 빠진다. 계속되는 원망의 대가는 엄중했다. 불신의 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게 된 것이다. 민 32:11-12,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2]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믿음의 테스트를 통과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20세 이상의 출애굽 1세대는 그 후 계속된 38년 광야 여정에서 모두 죽게 된다. 호르마에서 고라의 반역으로 250명의 지도자와 만사천칠백명의 백성이 염병으로 죽게 된다. 싯딤에서는 모압여자들과 음행에 빠지면서 이만사천명이 염병으로 죽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단적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광야에서 경험하게 된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역사는 불신의 역사였고, 배역의 역사였다. 집단적 죽음을 경험한 아픈 역사였다. 모세는 그가 죽기전 광야 1세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노정을 기록해야 했다. 모압평지에 살아남은 광야 2세대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자신들 부모세대의 아픈 역사를 기억해야 했다. 이들은 부모들의 반역과 불신, 그로 인한 죽음을 지켜보며 자란 세대다. 이들은 염병으로 죽어가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깊은 아픔과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택한 장자 민족으로 너무도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40년 광야 생활을 지나왔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어떠한 노정을 지나왔는지 돌아봐야 했다. 돌아볼수록 부끄럽고 아픈 기억들이 그들이 지나온 노정마다 베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과정에서 그들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지를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가나안 입성을 앞주고 그들이 광야에서 고통과 아픔으로 느꼈던 모든 사건에 대해 평가하는 작업을 가져야 했다.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지 못한채 맞이하는 가나안은 사실 그들에게 의미가 없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나 원망을 간직한 채 가나안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가나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가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인생그래프를 그려보면 심하게 나락으로 떨어진 지점들이 있다. 힘들었기 때문에 그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지점들이었다. 그 때는 상처로만 남았던 과거였다. 아프기만한 과거였다. 그러나 돌아보니 거기에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있었다. 인생이 내려갔기에 고통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되는 순간들이 된 것이다. 그것이 은혜였다.

신 9:6-7,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7]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하나님은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나안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태부터 목이 곧은 자들이다. 틈만 나면 불신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살면서 고통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 그 분이 우리를 축복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이 우리를 보호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통당하는 이유는 우리의 목이 곧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곧은 목을 쳐서라도 가나안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빨리 우리의 교만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믿음의 훈련, 순종의 훈련은 사실 광야에서 이루어진다. 광야는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수확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삶의 견적을 낼 수 없는 곳이다. 살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봐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250만을 먹이셨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다. 광야는 내 힘으로 사는 곳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따라가는 곳이다. 신 8:14-18,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기억을 위한 시간이었다. 불신으로 사는 삶과 믿음으로 사는 삶의 차이를 경험하게 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라간 사람에게만 가나안은 의미있는 곳이 되는 것이다. 가나안은 결코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획득하는 곳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따라간 자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 가나안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광야에서 하나님만 순종하는 백성을 만드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가나안 땅에서도 다른 신에게 절하지 않는 백성을 만드는 것이었다. 신 8: 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광야의 노정에서 있었던 사실들을 기억하는 자가 된다면  그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된다. 광야를 기억하고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붙들 수 없다면 우리 인생에 아무리 풍요로운 가나안이 주어져도 그것은 의미없는 것이다.

광야가 없는 인생은 없다. 광야의 노정에서 겪었던 고통과 아픔이 시퍼렇게 우리의 기억속에 살아있다. 우리는 그 아픔을 단순히 묻어두어선 안된다. 그것을 기억하고 믿음의 눈으로 평가해야 한다. 우리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해도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고통과 상처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마침내 복을 주시는 것이 그분의 마음이다. 우리가 이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과거 광야의 노정에서 있었던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그리고 믿음으로 가나안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 가나안 에서 하나님 따로, 내 인생 따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며 동행하는 삶을 계속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나안에서 누리는 축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겸손히 순종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 과거 여러분이 지나왔던 광야를 믿음으로 평가하며 그 광야의 기억들을 치유받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가나안에 이를 수 있는 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8월 6일 이익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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