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48 불안한 세대를 위한 약속

이번 주 토라포션: 신 32:1-52/ 호 14:2-10/ 요 21:1-25

토라포션 48 불안한 세대를 위한 약속

 

또 모세가 가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을 전하여 [2]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 나이 백이십 세라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3]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 [4] 또한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5]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넘기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신 31:1-6)

 

2010년도에 ‘불안증폭사회’라는 책이 나왔다. 심리학자인 김태형 씨가 한국사회를 분석한 책이다. IMF 경제위기 이후 한국인들이 극도로 불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보고서다. 그것은 통계수치로 나타난다. OECD국가 중 근로시간 1위, 비정규직 비율 1위, 자살률, 이혼률 1위, 1인당 사교육비 지출 1위다. 반면, 여가시간 소비는 꼴찌에서 두번 째, 출산률은 꼴지다. 미국의 워싱톤 포스트지는 위의 통계를 근거로 다음 같은 내용의 기사를 썼다. ‘첫째, 한국인들은 죽어라고 일을 하는 반면 거의 쉬지 못한다. 둘째, 멸종상황으로 가면서도 한국인들은 여전히 막대한 돈을 써가면서 아이들을 학대하고 있다. 셋째, 일과 공부에 중독되어 한국인들의 인생과 가정이 붕괴되고 있다.’ 한국인들이 이처럼 일중독, 자녀교육 중독에 빠진 이유는 뭘까? 저자는 바로 불안 때문이라고 한다. 너무나 불안해서, 경쟁에서 낙오될까봐 어른들은 강박적으로 일에 매달리고 자식들은 공부에 올인시킨다는 것이다.

2010년 한 조사에 의하면 40대 한국 남성들이 다른 집단과 비교할 때 삶의 만족도가 낮았다고 한다.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와 ‘일 또는 업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40대 남성은 한 사회를 이끌어가는 핵심이며 가정을 이끄는 가장들이다. 그런데 이 40대 남성들이 행복하지 않다. 이들이 느끼는 불안은 고스란히 가정과 사회 전체 공동체에 파급효과를 미치게 된다. 굳이 40대를 주목하지 않아도 지금 한국 사회는 청년실업, 실직, 지진, 태풍, 북한의 핵위협 등의 영향으로 불안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불안한 세대를 위한 탈출구는 무엇일까?

오늘 본문에는 약속의 땅 앞에 선 광야 2세대들이 나온다. 그들 역시 불안했다. 그들 앞에는 그들이 상대해야 할 거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지금껏 인도했던 모세는 더 이상 그들을 인도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시점이 다가왔다. 고난의 시기에 그래도 모세가 있었기에 그들은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광야를 통과하며 궁핍했지만 그래도 모세가 있었기에 먹을 것을 공급받으며 살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남은 것은 모세가 세 번의 40일 금식을 하면서까지 그들을 영적으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그런 지도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광야2세대들에게 트라우마같은 사건이었다. 불안이 증폭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은 어떠한 약속을 주고 계시는지 살펴보며 오늘 불안한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들이 불안에 대한 해법을 찾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중에 대부분은 실제 일어나지 않는다. ‘가스불을 끄고 나왔나, 불이 나면 어쩌지..’ 그래서 다시 가보면 아무 일이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상상 속에서 두려움을 키우고 있었다. 상황이 어려워지고 미래가 보장되지 않을 때 불안과 두려움으로 반응하는 것은 우리 인간 실존의 모습이다. ‘우리 민족의 가장인 모세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이것이 모세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존이었다. 그러한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은 신명기 31장에서 세 가지 약속을 하신다.

첫번째는 동행에 대한 약속이다. 신 31: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불안에 떠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가장 먼저 하신 약속은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행했던 것처럼 현재에도, 미래에도 너희를 위해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신 31:4-5, “또한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5]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넘기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알 수 없는 미래에 직면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유능한 리더를 먼저 약속하지 않으셨다. 불안과 두려움에 직면한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동행과 임재에 대한 확신이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이 펼쳐지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여러분과 동행하신다는 확신이 있는가? 그 확신이 실제가 되야만 ‘우리에게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새로운 지도자를 준비시키신다. 신 31:7-8,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8]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여호수아는 이미 검증된 지도자였다. 하나님께서는 틈틈히 모세를 통해 여호수아를 준비시키셨다. 신 1:38, “네 앞에 서 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리라” 신 3: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

여호수아는 원래부터 담대했던 사람이 아니였던 것 같다. 모세의 뒤를 이어 250만 가량되는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공식적으로 위임하는 자리에서 다시 한번 ‘강하고 담대하라’고 격려하신다. 하나님의 격려가 있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해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백성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고 임무를 전달하신다. 사실 그가 받은 임무는 그가 맨 정신으로 따져봐도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왔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지도자에게 징징대며 항의하던 백성들의 모습을 그는 보아왔다. 그 백성들과 분노하시는 하나님 사이에 서서 눈물로 중보했던 모세의 모습을 그는 보아왔다. 이제 그가 모세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네 앞에 가며 너와 함께 하겠다”고 확신을 주신다. 이 확신이 여호수아가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근거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그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시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일들이 내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확신인 것이다.

세번째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기록하게 하신다. 신 31:24,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신 32:46-47,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47]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직접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라는 명령을 하신다. 수 1:7-8,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가나안의 상황과 문화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기준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와 상황과 상관없이 지켜야 하는 기준점이라는 것이다.

시대가 불안하면 사람들은 타협하기 시작한다. 하나님보다도 재물을 확보함으로 안정된 삶을 얻으려 한다. 거짓말을 하고 이웃의 것을 도둑질하면서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타협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동행보다는 편법과 내 방법에 의존하며 산다. 바울은 그래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온다고 예측했다. 딤후 3:1-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사실 시대의 방향을 돌리기는 힘든 것 같다. 우리는 어쩌면 더 불안하고 더 고통받는 시대를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권하는 것은 시대와 상관없이 성경의 가치를 붙들라는 것이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갈 온전함과 모든 선한 일을 핼할 능력은 성경의 가치를 붙들 때 갖춰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하나님과 돈의 경계선에 서 있기 때문이다. 돈만 섬기거나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기려하지 대부분 ‘하나님만’ 섬기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마 6:26, 28, 30,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8]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 6:31-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불안해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되시기 때문이다. 보호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씨트라(סתרה)’이다. ‘덮는 것(Covering), 피난처(Shelter, hiding place)’라는 뜻이다. 모든 히브리 알파벳은 숫자로 전환할 수 있다. 씨트라에서 싸멕(ס)은 60이다. 타프(ת)는 400이다. 레쉬(ר)는 200이다. 헤이(ה)는 5이다. 전부 더하면 665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 말씀 중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여기에 나오는 히브리 단어를 숫자로 전환하여 전부 더하면 665가 된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가시고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약속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보호’가 된다는 사실이다. 시대가 아무리 불안해도 하나님의 보호가 있으면 안전한 것이다.

이제 며칠있으면 욤키푸르이다. 유대인들은 신년부터 대속죄일까지 10일간이 1년 중 가장 불안한 날이다.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할까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10일 간을 경외의 날들로 지내며 참회에 힘쓴다. 그러나 대속죄일에 그들의 불안은 끝난다. 대속죄일 다른 짐승이 나를 대신해서 피흘림으로 내 죄가 사해짐을 믿기 때문이다. 죄사함 이후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약속받게 된다. 이 대속죄일의 피제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영원한 제사의 모형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속죄 양으로 이 땅에 오셨다.

히 9:24-26,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대속죄일은 선과 악 중간에 선 사람들의 최종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라고 유대인은 믿는다. 그러나 대속죄일의 참된 의미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최후 심판을 행하실 때 완성될 것이다. 계 20:12, 15,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고 영원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은 사실 인간의 모든 두려움 중에 가장 핵심적인 두려움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이 두려움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셨다. 히 9:27-28,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약속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대속죄일에 우리의 죄를 위해 피흘리심으로 성소의 휘장을 가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길 원한다. 그리하여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확신을 얻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은혜를 회복하게 되길 원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28:18-20, “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의 보호와 동행에 대한 약속은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어차피 불안한 시대를 우린 지금 통과하고 있다. 생존을 위해, 생존때문에 불안을 달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일 어떤 일이 닥쳐와도 오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바란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동행과 임재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확신으로 내가 감당하기 벅찬 일까지도 기꺼이 시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어떠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아 그 가치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불안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행하기 위해 돌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10월 8일  이익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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