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행전 11 헤브론

성지행전 11 헤브론: 본향을 꿈꾸라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3]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5]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6]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7]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8]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9]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창 23:1-9)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있다. ‘여우도 죽을 때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향해 머리를 두고 초심으로 돌아간다’라는 뜻이다.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하는 마음을 표현한 말이다. 지난 주 이스라엘 선거를 보면서 수구초심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사실 이번 선거에서 네타냐후가 이끄는 집권당이 승리할 거라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막대한 국방비를 쏟아 부으며 가자 전쟁을 치르는 동안 물가는 치솟았고,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도 나빠지기만 했다. 아이들 친구 부모들도 네타냐후를 안 뽑겠다는 말만 들려왔다. 그런데 리쿠드당이 예상을 뒤엎고 승리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투표소에서 보수층들의 수구초심이 발동된 것 같다. 죽더라도 안전한 조국에 묻히고 싶은 마음이 발동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투표 전날 네타냐후는 보수층들의 마음을 흔드는 발언을 했다. “다시 당선 되면 팔레스타인 국가 건립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네타냐후가 2009년 바르일란 대학교에서 선언한 2 국가 해결안을 공식적으로 철회하는 발언이었다. 보수층을 노린 발언이었고, 이것은 효과가 있었다. 안전한 나라, 나뉘어 지지 않는 나라를 원하는 국민들은 표로써 그에게 지지를 보냈다. ‘그래 물가가 좀 올라도, 집값이 올라도, 조국의 안전이 중요하지…’ 이같은 보수층들의 마음이 있는 한 이스라엘에서 앞으로도 좌파가 정권을 잡는 일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이라는 현대국가는 유대인들의 수구초심이 발동되어 세워진 나라다. 유대인들은 지난 수천년 동안 나라없이 떠돌면서도 언젠가 돌아갈 가나안 본향을 생각하며 살아온 민족이다. 그들은 본향을 떠난 삶을 비정상적인 상태로 생각하고, 그것은 유배생활이라고 말해 왔다. 유대인들은 매년 유월절이면 우리가 지금은 비록 타향에 살지만 내년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노래했다. 그 희망은 하티크바, 이스라엘의 국가에도 표현되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유대인의 영혼이 노래하는 한,

동쪽의 시온을 사모하면서,

언제나 그곳을 잊지 않고 있는 한,

우리의 희망은 살아있다.

2000년을 품어온 희망,

우리 땅에서 자유롭게 살리라.

시온에서 예루살렘에서.

 

본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집단 무의식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외국에 오래 나가 살아도 반드시 본향에 돌아간다는 의식을 갖고 산다. 이 유대인들의 수구초심이 시작된 곳은 어딜까? 바로 헤브론이다.

아브라함은 유목민이었다. 가축에게 먹일 목초지를 찾아 계속 이동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집을 짓고 살지 않았다. 평생을 장막에서 살았다.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처음 가나안 땅에 이른 곳은 세겜이었다. 거기서 그는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자 그는 애굽으로 내려간다. 창 12:10절은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거류한다는 말은 정착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손님으로 잠시 거주하는 것을 말한다. 애굽에서도 여전히 유목민으로 나그네로 삶을 산 것이다. 그는 다시 벧엘과 아이 사이로 옮겨 거기서도 제단을 쌓고 예배한다. 가축이 많아지면서 그들을 먹일 장소가 비좁아지자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헤어지게 된다. 롯은 소돔성으로 가고 아브라함은 헤브론으로 장막을 옮긴다. 그는 거기서도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다. 그는 가는 곳마다 예배자의 삶을 살았다.

헤브론 마므레 상수리 나무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난다. 거기서 그는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말을 들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드디어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아브라함은 이후 그랄로 옮겨 이삭을 낳고, 브엘세바에도 있다가 다시 헤브론에 이른다. 그리고 거기서 사랑하는 아내 사라의 죽음을 맞게 된다. 슬픔을 당한 아브라함은 헤브론에서 사라를 묻을 땅을 구입하려 한다. 헤브론은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내년에는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 있었던 곳이다. 이것을 듣고 사라는 웃을 수밖에 없었던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잉태된 곳에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묻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당시 그곳에 살던 헷족속을 찾아 간다. 창 23:4절에서 그는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라고 부탁한다. 이에 헷족속은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7)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매장할 소유지를 값을 주고 구입하기 원했다. 그래서 다시 말한다. 9절,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 결국 그는 흥정도 하지 않고 은 사백 세겔에 그 땅을 구입한다. 성경은 그 사실을 기록한다. 창 23:17-18,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헤브론 막벨라사원

 

헤브론의 막벨라 굴은 유대인이 가나안 땅에서 구입한 최초의 땅이 되었다. 자, 이 거래가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약 아브라함이 그 매장지를 공짜로 받아 사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라만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떠돌아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아브라함 자신도 묻혔다. 이삭도 가나안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죽을 때는 이곳에 묻혔다. 야곱도 애굽에서 죽기 전 이곳에 묻히기 원하여 요셉에게 부탁한다. 창 49:29, 31,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우리의 아버지 아브라함” 막벨라 사원 내 아브라함의 가묘

 

이스라엘의 국부와 국모,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거의 다 이 헤브론 막벨라 굴에 묻혔다. 유대인의 역사를 쓴 역사학자 폴 존슨은 그의 책 서두를 막벨라 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이곳이야말로 4천 년 유대인의 역사가 시작된 곳, 시간과 공간 속에 닻을 내렸던 곳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한 때 이 지역에 거주했던 민족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가나안 사람들, 에돔인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 비잔틴 제국의 사람들과 오스만 제국의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말았다. 오직 유대인만이 이 땅에 돌아와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곳이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곳에 거의 모든 족장들이 묻혔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은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즉, 그들이 죽더라도 그들의 본향을 향하여 머리를 두고 싶은 마음을 일으킨 것이다. 살아 있는 유대인들은 이 무덤을 찾을 때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인 자신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 약속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묻힌 이 땅으로 돌아오길 지금도 원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 땅과 역사에 대한 신약의 관점은 어떠할까? 유대인 신자들을 위해 쓰여진 히브리서를 살펴보자. 히 11:8-9,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이 유업으로 받을 땅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나아갔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그가 약속의 땅에 있었지만 이방의 땅에 있는 것처럼 나그네로 거류하며, 이삭, 야곱과 함께 장막생활을 했다고 기록한다. 땅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유목민으로 떠돌아 다닌 것이다. 그 이유를 10절에서 말한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가나안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믿음의 조상들이 바란 것은 결국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이라고 신약 기자는 말한다.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의 조상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도 거류민으로 살았다. 나그네로 산 것이다.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더 나은 본향을 보았고, 그것을 사모했다. 그것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땅에 살면서 더 나은 본향을 찾는 자로 살았다. 골 3:1-2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벧전 2:11절에서 베드로는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신약의 저자들은 공통적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나그네로 표현한다. 믿음의 사람들이 돌아갈 영원한 본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요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구약과 신약에 걸쳐 본향 찾는 자의 특징이 있다. 먼저 그들은 어딜 가나 예배로 길을 연다. 그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찬양 가사처럼 그들이 걸어갈 때 길이 되고, 살아 갈 때 삶이 되는 그곳에서 그들은 예배했다. 그곳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계속 하나님이 부르신 곳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거기서 나그네요 거류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그들은 땅의 소유에 얽매이지 않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산다. 결국 본향을 찾는 자들은 영원한 떠돌이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떠돌면서 그들이 가는 곳에 예배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구원 언약이 이루어지는 통로로 살아 가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온 CEO 칭기스칸이란 책이 있다. 저자 김종래 씨는 유목민에게서 배우는 21세기 경영전략을 소개한다. 그는 유목민들은 성을 쌓는 사람들이 아니라 길을 닦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정착하여 성을 쌓는 사회는 소유에 집착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 사회엔 계급과 계층이 생겨나면서 사람들은 자기보다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군림하고 착취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자리’에 연연한다. 그 자리가 계속 군림과 소유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을 닦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보다 넓은 초지로 나아간다. 떠돌아 다니는 삶에 맞춰 소지품을 간소화 하고 어느 곳으로든 신속히 움직인다. 이런 사회에서 ‘자리’는 착취와 군림의 수단이 아니라 역할과 기능이 발휘되는 곳이다. 최고 자리에 있는 사람은 군림하는 통치자가 아니다. 진정한 리더가 그 자리에 있게 된다. 칭기스칸도 “내 자손들이 비단 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은 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소유를 통해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 험난하더라도 계속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변화를 꿈꾼다.

여러분은 성을 쌓는 사람인가, 길을 내는 사람인가? 우리는 점점 이동이 많아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 여러분은 직업 때문에 다른 사람들 비해 더 많이 이동하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가 나그네 인생임을 몸으로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 땅에서의 삶이 나그네라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성을 쌓고 우리의 이름을 내려는 집착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더 나은 본향을 진정으로 사모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언제든지 이동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결국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조상들처럼 떠돌이로 산다.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이동하는 영적유목민으로 사는 것이다. 바라기는 더 나은 본향을 꿈꾸며 이 땅, 부르신 어느 곳에서든 예배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5년 3월 21일 이익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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