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5 운명의 방향

2018년 3월 24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다니엘서 5 운명의 방향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단 5:25-28)

 

운명은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의 방향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을 살게 된다.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을 영어로는 데스티니(Destiny)라고 한다. 나와 여러분의 데스티니는 무엇일까? 데스티니를 아는 삶은 안전하다. 데스티니를 이루는 삶은 행복하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정하신 그 데스티니를 향해 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나보니두스 실린더 (The Nabonidus Cylinder of Sippar, British Museum)

 

오늘 본문에는 벨사살이라는 바벨론 제국의 왕이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벨사살이 바벨론 제국 왕의 명단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벨사살은 다니엘의 저자가 만들어낸 허구적 인물로 여겨졌다. 그리고 성경은 꾸며낸 이야기라는 조롱을 받았다. 그런데 1854년 영국의 영사 테일러가 바벨론의 신전에서 한 비문을 발견해 낸다.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있는 나보니두스 실린더다. 거기엔 이런 글귀가 씌여 있었다. 바벨론의 왕인 나보니두스가 당신께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소서. 그리고 나의 장남인 벨사살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이 있게 하소서” 벨사살이 실존인물이었음이 역사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보니두스는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었다. 무그하일(Mughair)에서 발견된 또 다른 비문에 의하면 나보니두스가 BC 550년경 중앙아라비아 데마(Tema)로 원정을 가면서 그 아들 벨사살에게 왕권을 위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벨사살 왕은 귀족 천 명을 초청하여 술 잔치를 벌인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바벨론 제국의 권력을 나눠가진 권력의 핵심인물들이었다. 벨사살 왕은 술자리가 무르익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온 성전 그릇을 가져오라고 명한다. 개역성경에는 느부갓네살을 그의 부친이라고 번역했는데 아람어 ‘압’은 ‘조상’이라는 뜻도 있다. 실제로 느부갓네살은 벨사살의 할아버지다. 벨사살은 성전에서 탈취해온 그릇에 술을 부어 귀족과 왕후들과 후궁들과 더불어 마신다. 하나님을 모독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는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자기들의 신들을 찬양했다. 자 이런 술잔치가 벌어진 이유가 뭘까?

 

 

술잔치가 벌어진 것은 주전 539년 10월 13일이었다. 어떻게 아느냐? 그날이 바벨론 제국이 망한 날이기 때문이다. 술잔치가 벌어지기 이틀 전인 10월 11일에는 바벨론 옆의 요새도시인 시파(Sippar)가 함락되었다. 그리고 벨사살의 부친 나보니두스는 전투에 패하여 바벨론 남쪽 보르시파(Borsippa)에 피신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왠 술판이 벌어졌을까? 학자들은 바벨론이 이중성벽으로 워낙 견고하게 지어져서 벨사살이 아무 문제없다고 판단했을 거라고 한다. 오히려 그가 제국의 강인함을 과시하기 위해 술자리를 벌였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랍비들의 전통에 의하면 다른 이유가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대해서 예언한 적이 있다. 렘 25: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랍비들의 전통에 의하면 이 예언을 바벨론 제국의 왕들도 알았다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이 지났고, 이제 그 예언이 잘못으로 드러났다고 벨사살이 생각했기에 축하연을 베푼 것이라는 것이다. 랍비들의 결론은 벨사살이 시간을 잘못 계산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벨사살은 역사가 어디로 흐르고 잇는지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운명의 시간이 그와 그의 제국에 다가오고 있었음을 그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에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단 5:5-6,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6] 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 무릎이 달달 부딪힐 정도로 벨사살왕은 공포에 휩싸인다. 그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바벨론의 모든 점쟁이들과 지혜자들을 부른다. 그리고 이 글자를 읽고 해석하는 자에게 상을 주고 나라의 셋째통치자를 삼겠다고 말한다. 왕의 지혜자들이 다 들어왔지만 모두 다 그 글자를 읽지도 못한다. 이 때 왕비가 벨사살 왕에게 다니엘을 부르라고 권한다. 그녀는 다니엘이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를 추천한다. 이 때 다니엘은 80이 넘은 나이에 정계에서 물러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니엘이 왕의 부름을 받고 왕 앞에 선다. 왕은 다니엘에게 그 글씨를 읽고 해석해 주면 금사슬을 목에 걸어주고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말한다. 다니엘이 이에 응답한다. 단 5:17,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예물은 왕이 친히 가지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글을 읽으며 해석을 아뢰리이다” 술잔치에 모인 귀족들은 자신들의 데스티니가 바벨론 왕에게 달려있었다. 왕이 주는 상급은 자신들의 데스티니를 완성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받지 못해 안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신의 데스티니가 바벨론 왕에게 달려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왕이 약속하는 세속 지위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그가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과 운명의 방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는 벨사살 왕에게 그의 조부 느부갓네살 왕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교만했을 때 왕위에서 쫒겨나 소처럼 풀을 먹으며 지냈던 때가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결국 그가 그러한 일을 겪은 후에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그 자리에 세우신다는 것을 알기에 이르렀다고 다니엘은 말한다. 그러면서 다니엘은 벨사살 왕에게 직언을 한다. 단 5:22-23,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23]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이후 다니엘은 벽에 쓰여진 글자를 읽고 해석해준다.

 מנא מנא תקל ופרסין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것은 아람어다. 다니엘서는 부분적으로 아람어로 기록된 책이다. 아람어는 당시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에서 사용되던 공용어였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배 기간 동안에 아람어를 배우고 사용한다. 미국 이민 2세만 해도 한국말보다는 영어를 더 익숙하게 쓴다. 유대인들도 아람어를 사용하면서 히브리어는 점점 생활언어로는 잊혀져 가고 성경의 언어로만 남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일상 언어는 주로 아람어였다. 신약성경에도 아람어가 나온다. 달리다쿰, “소녀야 일어나라”란 뜻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뜻이다.

렘브란트, 벨사살의 연회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비슷하다. 기본 알파벳이 똑같고 히브리어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고 읽는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니엘은 벽에 쓴 글씨를 읽을 수 있었던 반면, 바벨론의 지혜자들은 읽을 수 없었던 걸까? 우리는 17세기 화가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렘브란트는 벨사살의 연회를 그림으로 그린다. 그런데 그는 동시대 유대인 랍비 메나세 벤 이스라엘의 자문을 얻어 벽에 새겨진 글자를 그려 넣었다. 그것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 것이 아니었다. 오른쪽에서 세로로 세 글자씩 총 네 열의 글귀를 적은 것이다. 바벨론의 지혜자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려했지 발상의 전환을 하지 못해 그것을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리 있는 설명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거룩한 영이 있는 자였기에 하나님이 정하신 바벨론 제국의 데스티니를 알았다.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기에 벽에 쓰여진 글씨를 읽고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해석을 보자. 단 5:25-28,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아람어 메네는 ‘수를 세다’라는 뜻이다. 데겔은 ‘무게를 재다’라는 뜻이다. 우바르신은 ‘그리고’라는 접속사 ‘우’와 ‘나누다’는 뜻의 페레스의 합성어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상 나라의 시대를 세시는 분이다. 그 지도자들을 저울에 달아보시는 분이다. 함량미달이 될 때 그 나라를 나누시는 분이다. 역사와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다니엘서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세시고 그 무게를 재어 보신다. 그래서 우리의 데스티니는 세상 왕이나 세상 권력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우리 운명의 방향을 정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데스티니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이름을 남기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데스티니를 따라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말한다. 엡 1:11-12,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예정은 운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신 데스티니를 이루어가시기 위해 부단히 우리의 삶을 세시고 재어보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것에 우리의 삶을 드리며 삶의 방향을 맞춰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순종과 선택에 따라 우리의 데스티니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비전이 아니라 나를 향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비전을 붙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다니엘은 왕의 상급과 왕이 주려는 지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데스티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의 방향을 아는 것은 계시의 영역이다. 성령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야 계시가 임한다. 다니엘이 그런 사람이었다. 결코 술자리에서 여러분의 운명의 방향이 결정되지 않는다. 권력을 가진 자의 총애를 얻는 것에서 여러분의 데스티니가 결정되지 않는다. 높은 자리에 오를 지는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데스티니는 그보다 훨씬 숭고한 것이다. 타락한 제국의 절대 권력에 빌붙어 술잔을 들었던 귀족 천 명은 바벨론의 멸망과 함께 그들의 운명도 끝났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리, 말씀에 붙들린 자리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의 방향을 감지하게 된다. 거기서 우리의 데스티니가 세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의 방향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거짓 아비 사탄은 어찌하든지 이 운명의 방향을 따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래서 우리 생각 속에 가라지를 뿌린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11:25,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여겼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숨겨졌다. 그러나 어린 아이와 같이 순전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자에게 천국의 비밀은 계시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히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을 구해야 한다. 사 55:8-9, “이는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생각도 점검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와 성품과 맞는 것인지 점검해야 한다.

 

바벨론에 포로 끌려간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큰 충격과 상처였을 것이다. 비극적인 인생의 경험은 자신의 운명을 더욱 비관하게 만든다.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바벨론 신이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생각하고 계신 그들의 데스티니를 듣게 하신다. 렘 29:11-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14]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원하신 그들의 데스티니는 포로지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데스티니를 알면 우리는 비극적 상황속에서도 비관하지 않게 된다. 저주로 여겨지는 인생의 사건이 다시 축복과 소망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겐 각자 저주로 여겨지는 인생의 사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저주를 바꾸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저주와 사망 권세를 무효로 만드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지금의 고통을 반드시 십자가로 재해석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우리의 운명을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꾸기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인생의 비극적인 경험이 비관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데스티니를 따라 다시 일어서는 삶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많은 일을 하는 것,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데스티니의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의 데스티니를 완성하는 본질이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손쉽게 왕위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데스티니를 이루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의 권위를 존중했던 것이다. 룻 역시 나오미를 버리고 오르바처럼 자신의 살길을 찾아 떠날 수도 있었다. 그것이 현실적이고 현명해 보이는 길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늙고 힘없는 나오미를 따라 갔다. 그것이 하나님의 헤세드, 하나님의 인애를 이루는 길이었다. 그런 충성됨이 있었기에 그녀는 보아스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방인인 그녀를 통해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이어지는 하나님의 데스티니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정하신 데스티니를 이루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노력으로 힘들다. 권위자의 축복이 필요하다. 믿음의 조상들도 아비의 축복을 통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데스티니를 완성해갔다. 여러분도 여러분을 축복해 줄 영적 아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들의 축복을 통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을 위해 예비하신 데스티니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데스티니는 개인의 축복만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공동체적인 것이다. 함께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엡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교회인 우리는 부르심의 한 소망이 있다. 함께 이루어가야 할 운명의 방향이 있다. 바벨론 포로시대라고 하나님의 데스티니가 멈춘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하나님의 데스티니는 작동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과 목적대로 진행되었다. 다니엘은 자기 민족의 데스티니를 위해 하루 세번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다. 결코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서만 살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바벨론 제국과 같이 권력과 자본의 힘에 포로가 된 시대를 살고 있다. 돈과 성공이 우선이 되는 시대이다. 청년들은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함께 이루어 가야 할 하나님의 데스티니가 있다. 모두가 자기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정신없이 사는 이 시대에도 우리는 함께 구해야 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가 있다. 지금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도 복음이 활발히 전해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데스티니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다. 바르일란 대학교 중국 친구들이 우리 교회에 40분을 걸어서 매주 오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데스티니 안에 일어나는 일이다. 여러분이 이스라엘에 와서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 남아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하나님의 데스티니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 땅에 이방인들에 의해 욥바교회가 세워진 것도 하나님이 허락 아래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과 공동체의 부르심을 통해 무엇을 이루기 원하시는지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바라기는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의 방향을 따라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구하며, 함께 그 운명의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말씀 나눔
  1. 벨사살 왕이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보이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다니엘이 벽에 쓰여진 글씨를 해석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 적용
  1. 모든 상황 속에서 나를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 즉 하나님의 데스티니를 발견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2. 욥바교회를 통해 부르심의 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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