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 문제 해결의 열쇠

2018년 5월 5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고린도전서 1 문제 해결의 열쇠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

 

문제를 만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내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 없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문제를 만난다. 문제는 우리가 그 문제를 해결하느냐 해결하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2016년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회원국 33개국 성인들의 능력 평가를 했다. 영어 공식명칭은 PIAAC:  Programme for the International Assessment of Adult Competencies이다. 한국 성인 역량을 보면 읽기 16위, 쓰기 14위, 수리 11위, 정보통신기술 스킬 활용도 17위, 비교적 우수한 편이었다. 하지만 미래 4차 산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 되는 ‘문제 해결 스킬의 활용도’에서는 29위였다. 최하위권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교육이 ‘문제 해결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암기 위주의 교육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수직적인 직장 문화도 그 원인일 것이다. 상명하복, 위계 서열이 중시되는 문화 속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의견과 창의적인 발상이 무시되기 쉽다. 서로 토론하고 협력하면서 문제를 해결해가는 능력이 길러지기 쉽지 않은 게 한국 직장 문화의 현실이다.

 

문제가 생기는 건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이 모인 교회 역시 많은 문제가 있다. 오늘부터 살펴볼 고린도교회에는 정말 많은 문제가 있었다. 가장 먼저 파당 문제가 발생한다. 성도들이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뉜다. 또한 음란한 도시 문화의 영향으로 여러가지 음행의 문제가 발생한다. 한편 성도 간에 다툼이 발생했는데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의 법정에 고발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바울이 AD 51년 고린도에 와서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세운 교회가 고린도 교회였다. 그런데 그가 떠나고 AD 54년 경, 불과 창립 3주년 만에 고린도교회는 다양한 문제에 직면한다. 당시 에베소에 머물고 있었던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전해 듣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편지를 쓴다. 그 편지가 바로 고린도 전서다. 바울의 문제 해결 능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가 문제 해결책으로 제시한 해법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고린도는 지금의 그리스의 한 지역이다. 지금은 도시 기능이 사라진 곳이지만 바울 당시 고린도는 아가야 지역의 수도로 인구 60만 명의 대도시였다. 이 도시에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신전이 있었다. 그 신전에는 천 여 명의 여 사제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밤이면 그 지역 주민들 뿐 아니라 외국인들을 상대로 종교적 행위로서의 매춘을 행했다. ‘고린도 사람처럼 행하다’라는 뜻인 ‘코린티아조마이(Korinthiazomai)’라는 말은  ‘음행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도시 분위기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도시 한복판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운 것이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많은 대적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밤에 주님이 환상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 말씀이 있었기에 바울은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 이처럼 자신의 사역 중 많은 기간을 머물며 말씀으로 세운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자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편지를 쓴다.

 

고린도 전경

 

고전 1:1-3,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여기 나오는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이었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당시 회당장 그리스보가 바울의 전도로 그리스도인이 된다. 소스데네는 그의 후임으로 회당장이 된 사람인데 그 역시 바울의 전도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회당장들이 줄줄이 유대교를 떠나 그리스도인이 되었기에 고린도 유대인 공동체는 큰 충격에 빠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바울은 편지를 통해 그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 부른다. 여전히 문제 가운데 있었던 고린도 교회 구성원들을 향해 ‘성도’라 부른다. 바울은 물론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문제들보다도 그들을 온전하게 하실 그리스도께 더 소망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8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전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그가 문제 많은 교회, 문제 많은 성도를 포기하지 않고 편지까지 써가며 권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 그 교회와 성도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들을 향한 소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사말을 끝으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직면하는 말을 한다. 고전 1:10-11,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그들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었다. 고린도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후예들이었다. 그들은 말주변과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아테네 정치가 아리스티데스에 의하면 고린도에서는 길을 가다보면 어디에서나 인간의 문제에 대해 자신만의 해결책을 가진 소위 지혜자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바울 당시 그리스에는 50여 개의 철학 학파가 있었다고 한다. 그 지도자를 중심으로 소크라테스 학파, 플라톤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등으로 파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신앙을 갖게 되었을 때 그들은 세상의 방식을 그대로 교회 안으로 가져왔다. 자기가 선호하는 지도자를 따라 파벌을 형성하는 것, 그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고린도교회 안에 파벌이 형성된 근본 원인이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세웠기에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바울이 떠나고 아볼로가 왔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이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지금의 이집트의 한 도시다. 당시 로마제국 내 제2의 도시로 학문의 중심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당시 이 도시 백만 인구 중 40%가 유대인이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이 이 도시에서 나왔다. 이곳 출신 아볼로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였다. 철학과 수사학을 좋아하는 고린도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가르침에 열광했다. 설교할 때 말이 어눌했던 바울보다 이제 그들은 말 잘하는 아볼로에 매료되어 그를 추종했던 것이다. 한편 베드로를 따르던 게바파가 있었다. 게바는 베드로의 아람어식 이름이다. 여전히 코셔를 지키던 베드로의 가르침을 선호하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게바파였을 것이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무시하는 듯한 바울에 저항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사도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베드로를 따랐던 그룹이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분쟁하게 된 근본 이유가 뭘까? 그들이 복음의 본질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음을 세상의 지혜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자신들의 지혜를 앞세워 상대를 판단하며 하나되지 못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답을 제시한다.

 

고전 1:18-20,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바울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은 십자가의 도였다. 십자가의 도는 헬라어로 ‘호 로고스 가르 호 투 스타우르 (ὁ λόγος γάρ, ὁ τοῦ σταύρου)’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다. 무엇이 십자가에 관한 말씀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류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말씀, 즉 복음이다. 이것이 어떻게 고린도 교회의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열쇠가 될까?

 

모든 분열은 자기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자기주장에서 시작된다. 십자가의 도를 따르기보다 자신의 지혜를 따르기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쉽게 비판한다. 내가 더 낫다는 우월의식이 있기에 쉽게 판단하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구변과 지식이 뛰어났다. 거기에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을 체험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세상적 가치를 버리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저 받은 구원과 은사를 누가 더 옳고 뛰어난가 하는 문제로 바꾸어버렸다.

 

세상의 지혜는 비교를 통해 끊임없이 내가 더 옳음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는 그러한 증명을 무효로 만든다.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지혜로, 자기의 의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일 뿐이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는 서로를 정죄할 수 없다. 내가 옳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자랑할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놓치는 사람은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 눈에 있는 티를 먼저 보는 사람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쉽게 비판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정말 십자가의 도를 붙들고 있는 사람인지 반문해보시길 바란다.

 

십자가는 한마디로 의로우신 예수님이 피흘리신 곳이다. 죄 없으신 그분이 죄를 뒤집어쓰고 죽은 곳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를 따른다는 것은 한마디로 나 역시 피흘리며 상처받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옳아도 나의 의를 주장하지 않고 스스로 못박는 곳이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는 희생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신 곳이다. 십자가는 나 또한 희생하는 곳이다. 내가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곳이 십자가다. 부부 사이에서 십자가를 적용해 보라. 서로 내가 옳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을 때 부부 사이는 더 멀어진다. 그러나 내가 옳아도, 내가 억울해도, 용서하고 사랑을 선택할 때 끝내고 싶은 관계도 다시 회복되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를 선택하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인 것이다.

 

바울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한다. 고전 1:21-24,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었다. 그들이 꿈꾸는 메시아는 플라톤보다 위대한 철학자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결코 그들의 메시아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인과율이라는 세계관을 따랐다. 인과율은 모든 만물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 따른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어떤 사람이 죄인으로 죽었다면 그것은 그의 악행에 대한 응당한 처벌이라 생각했다. 죄인으로 죽은 사람이 더군다나 그들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된다는 생각은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다윗보다 위대한 왕이었다. 그들의 삶을 바뀌 줄 많은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메시아로 왔다는 사람이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건 그들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신명기 21장에 의하면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였다. 그래서 그들에게 십자가에서 죽은 자는 거리끼는 존재였던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십자군과 기독교를 국교로 했던 나라들에 의해 역사상 너무도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기독교의 복음을 잘못 추구했던 사람들에 의해 유대인들은 너무도 많은 고통가운데 죽어갔다. 예수님의 사랑의 복음을 잘못 사용한 기독교의 역사가 너무 안타깝다. 기독교인으로 너무 부끄럽고 유대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 이런 역사가 있었기에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더더욱 거리끼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정말 비극이고, 유대인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오해하게 하는 사단의 역사임이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한다. 왜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가 될까? 인류를 구원하는데 왜 꼭 십자가가 필요했을까?

 

그것은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것은 불순종의 죄였다. 그로 인해 이 세상에는 사망이 왔다. 사단은 두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에게도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또다시 불순종의 죄를 짓도록 유혹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말씀으로 이기셨다. 사단은 유대 종교인들과 로마 권력자를 동원해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죽이는데 성공한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죽음. 그것이 끝이었을까? 반전이 있었다.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신의 한 수 였다. 사단은 자신이 이긴 줄 알았지만 하나님은 죽기까지 순종한 예수님을 다시 죽음에서 일으키셨다. 십자가의 순종이 있었기에 사단이 패한 것이다. 순종에 실패한 인간의 역사를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뒤집은 것이다. 그래서 사단은 더이상 사망 권세로 인류를 위협할 수 없다. 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창세기 3:15절의 예언이 이루어진 곳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발꿈치를 상하셨지만 결국 십자가를 통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다. 십자가는 결국 모든 인류의 문제였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하나님의 해결책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한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그를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자로 삼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였다.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셨다. 그래서 십자가의 구원은 세상에서 더 지혜로운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다. 더 의로운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다. 더 힘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다. 단순하게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사람이 받는 것이다 거기에는 차별이 없다.

 

고전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에서 지혜로운 것, 세상에서 강한 것, 그것은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한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혈통으로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것도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오직 겸손히 십자가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 된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가장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다. 십자가는 차별과 판단이 기준이 되는 세상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이런 십자가의 도를 따르지 않고 세상의 기준으로 자기의 옳음을 주장했기에 벌어진 문제였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 고린도교회를 바라보았기에 교회가 여전히 문제가 많았음에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교회로 보았다.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 교회 구성원들을 바라보았기에 결국 하나님이 아무 책망할 것이 없이 끝까지 견고하게 붙드실 성도로 볼 수 있었다.

 

나의 기준, 세상의 기준으로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본다면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볼 때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욥바교회가 이스라엘 땅에 세워진 지 11년이 되었다. 그동안 교회에 좋은 날도 있었지만 크고 작은 문제들도 있었다. 고통가운데 그러한 문제와 씨름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었다. 십자가를 통해 문제를 보려 하는 사람은 쉽게 비판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한 마음으로 엎드리며 기도한다. 문제가 있었을 때마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무서울 정도로 신실하셨다. 욥바교회를 정말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죄가 반드시 죄로 드러나게 하셨다. 흔들릴 것이 흔들리게 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뿌리내리지 않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들이 떨어져 나가게 하셨다.

 

나는 이러한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욥바교회가 많은 문제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임을 믿는다. 그리고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임을 믿는다.

 

욥바교회는 모두가 떠나는 교회이다. 정말 독특한 교회다. 우리 가정도 언제 떠날지 모른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의 1년은 다른 어느 곳에서의 10년보다 더 귀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욥바교회는 그 어느 누구의 교회도 아닌 하나님의 교회다. 바라기는 11년이 된 욥바교회가 계속 이 곳에 남아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차별없이 구원을 주시는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 표적을 봐야 감동하는 유대인에게도 투박하지만 변함없이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

 

고전 1:30-31,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바라기는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주님만을 자랑하고, 주님 안에서만 자랑할 수 있는 주의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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