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8 사랑이 전부다

2018년 6월 23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고린도전서 8 사랑이 전부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고전 8:1-3)

 

“너 자신을 알라” (γνῶθι σεαυτόν 그노티 세아우톤).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원래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 새겨져 있었던 말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시기하는 원로 학자들에 의해 고발되어 사형을 언도 받게 된다. 재판정에서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질문한다. “도대체 너는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기에 ’너 자신을 알라’고 떠들고 돌아 다니느냐?” 소크라테스가 대답한다. “나는 내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대답을 한 뒤 그는 독배를 마시고 죽게 된다.

 

2015년 미국 예일대 매튜 피셔 박사는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결과 그는 인터넷 검색으로 정보를 획득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인터넷 검색으로 정보를 많이 얻을수록 검색을 통해 방금 얻은 지식을 원래 내가 알고 있던 지식으로 착각해 버린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이 실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사는 것 같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인 볼테르는 “착각은 모든 쾌락 중에 으뜸이다 (Illusion is the first of all pleasures.)”라는 말을 했다. 착각하고 있는 그 순간 만큼은 기분이 좋다.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느낌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고린도전서 9장에는 자신이 뭔가를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바울은 그들이 지식의 착각에 빠져 있음을 서신을 통해 밝힌다. 어떠한 내용인지 살펴보며 우리는 이러한 지식의 착각으로부터 자유로운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당시 고린도교회 내에는 스스로 뭔가를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우리 모두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라고 답한다. 고린도교회 지식파들은 과연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당시 고린도 지방은 우상숭배로 가득했다. 많은 신전이 있었고, 그 신전은 사람들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 신전을 대표하는 신들에게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 제물들은 신전 사제들의 몫으로 돌아갔고, 그들은 필요한 양을 제외를 하고는 다시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래서 시장에서 파는 고기의 대부분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었다. 불신자들은 이러한 고기로 파티를 하면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초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그러한 자리에서 그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고린도교회 지성파들의 결론은 그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방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신들에게 바쳐진 음식은 먹어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방신과 우상 제물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옳은 것이었다. 바울도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지지하는 말을 한다.

 

고전 8:4-6,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분밖에 없는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고린도교회 지성파들은 하나님 한 분에 대한 믿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우상의 제물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믿음이 강한 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바울은 이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덧붙인다.

 

고전 8:7, “그러나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바울은 고린도교회 지성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측면을 말해준다. 그것은 우상의 제물 때문에 여전히 힘들어하는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람들에게 너희가 갖고 있는 지식을 앞세우지 말고 사랑으로 배려해야 한다고 바울은 제안한다. 고린도교회 안의 어떤 이들은 여전히 우상에 대한 습관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우상이나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이 마법적인 효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그들의 양심에 허용되지 않는 행위였던 것이었다. 그것을 먹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 앞에 죄를 짓는 것으로 그들은 여겼다.

 

그래서 바울은 지성파들에게 권면한다. 고전 8:8-12,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지식으로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우상의 제물에 관해서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바울은 같은 권면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한다. 롬 14: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바울에게는 음식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지식 때문에 서로 정죄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은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랑으로 연결되지 않는 지식은 상대방을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의 견해였다.

 

무서운 말이다. 나 역시 내가 뭘 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 그래서 내가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었던 지식이 상대방을 정죄하는 도구였지 사랑으로까지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돌아보게 되었다.

 

바울은 말한다. 고전 8:1-3,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란 말은 원어로 ‘아가페 오이코도메오’다. ‘오이코도네이’는 건축물을 세운다는 말이다. 즉 아가페적인 사랑이 건축물을 세우듯 공동체를 세운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지성파들은 그들이 가진 지식을 자랑하면서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지 않고 정죄했다. 그것은 결국 그들 안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바울의 표현처럼 그들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들은 아직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사랑을 모르는 자였던 것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으로 연결된다. 마태복음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것이 내게 것이니라 따라서 자신들의 지식을 앞세우며 연약한 자들을 정죄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지식은 소중한 것이다. 어떠한 사실을 바로 알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지식은 해가 될 수 있음을 성경은 말한다. 지식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허무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지식만 갖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 거기에 사랑이 더해져야 한다. 그 사랑은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배려한다. 그래서 그 사랑은 공동체를 세워 나간다.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도 알아주신다고 바울은 말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말한다. 고전 8: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고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결단이다. 바울은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겠다는 결단을 한다. 이처럼 사랑은 나의 원함을 넘어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나의 자유도 제한하는 것이다.

 

신앙의 가장 큰 적은 내가 뭘 안다는 교만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데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교회에 다니면서 우리가 뭘 알고 있다는 지식의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자기중심적인 교만한 인간을 만든다. 그러나 사랑이 따르는 지식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게 한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는 정말 나 자신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알고 있고, 올다고 생각하는 그 것 자체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교회에서 정말 필요한 사람은 교리와 성경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 지식과 함께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화평을 이루고, 나보다 연약한 자를 세우기 위해 기쁨으로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이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런 말을 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이후,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 십자가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알았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비판은 커녕 실망할 자격도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나와 비슷한 사람, 비슷한 신앙의 칼라를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 그러나 나와 다른 사람은 쉽게 실망하거나 비판한다. 고린도교회는 서로 신앙의 칼라가 다른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공존했던 교회였다. 이 교회의 문제에 대한 바울의 결론은 지식을 뛰어넘어 사랑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교회는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너무나 다른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수많은 판단과 정죄가 오고 가는 곳이 사실 교회다. 그렇기에 교회는 지식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지식은 정죄하고 판단할 뿐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주신 사랑, 아가페에 기초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다.

 

교회는 동질적인 문화 속에서 우리만의 잔치를 즐기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에게 있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끌어안고 더더욱 이질적인 세상으로 나가는 공동체가 되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이질적인 것을 끌어안는 것은 우리의 이성적인 결단으로 가능하지 않다. 우리의 이성은 선악을 아는 열매를 따먹은 죄로 인해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 성령으로 거듭난 이성이 필요하다. 그래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 그래야 우리 옆에 있는 연약한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 자매임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너무도 이질적인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도 이 예수님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전부임을 고백할 수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기꺼이 나 자신을 희생하며 공동체를 세워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