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9 크리스천 DNA

2018년 6월 30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고린도전서 9 크리스천 DNA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1-12)

 

 

 

월드컵 지난 대회 우승국이었던 독일이 한국에 졌다. 낯선 풍경이었다. 16강에 당연히 갈 거라 생각했던 그들은 가지 못했다. ‘선 줄로 생각했던 그들이 넘어질까 조심하지 못한’ 결과였다고나 할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고 있는 일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경고의 메세지를 보낸다. 바울이 세운 고린도교회는 그가 떠나 있는 동안 망가져가고 있었다. 바울로서는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다시 승리하는 교회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사항을 네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고전 10:1-4,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반석은 그리스도시라”

 

바울은 먼저 이스라엘 조상들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 누렸던 축복의 순간들을 회고한다. 출애굽 당시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인도하심을 경험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구름 아래에 있었다. 출 14:19-20, “이스라엘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뒤로 옮겨 [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하나님은 구름기둥까지 옮기시면서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 그들은 또한 바다 가운데로 지나갔다. 세상의 어느 민족이 바다가운데로 통과한 민족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바다를 열어주셨기에 그들은 바다 한가운데를 통과해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면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홍해와 같은 인생의 문제도 열리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경험을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 받은 것으로 표현했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애굽을 탈출해 나온 것을 구원이라고 하면,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며 다 세례를 받은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광야를 지나며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 바울은 그 신령한 음료를 제공했던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표현했다. 광야교회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생수를 공급받은 것이라 표현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다. 그러나 반전이 있었다. 고전 10: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어떻게 구원받은 백성이 멸망 받을 수 있는가? 광야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다수의 백성을 기뻐할 수 없었던 것일까?

 

고전 10: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가 역사의 본보기가 되길 원했다.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았던 과거의 경험이 내일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하기 원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끌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도 분명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다수는 그 약속을 누릴 수 없었다. 출애굽은 구원의 시작에 불과했다. 구원의 완성은 가나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오직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었다. 시작된 구원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고린도교회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피흘리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세례를 통해 온 세상에 하나님이 건지신 백성임을 고백했다. 그들은 또한 성찬을 통하여 그들이 구원받은 백성이며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고백하고 있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믿음 위에 굳건히 서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넘어질 수 있는 위기에 처해있음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경험하고도 다수가 광야에서 멸망했던 것과 같은 그런 위기감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실패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네 가지로 제시한다.

 

첫번째 원인은 ‘우상 숭배’다. 고전 10: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출애굽기 32:6절 말씀을 인용한다.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그들은 누구에게 번제를 드린 것인가? 하나님이 아니다.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우상 앞에 제사를 드린 것이다. ‘뛰놀았다’라는 말에는 성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우상숭배에 성적인 향연이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우상숭배의 위험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당시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육신적인 것은 영혼의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령을 체험했고, 또한 세례 받고 성찬에도 참여하고 있었기에 자신들은 확고한 믿음 위에 서 있는 줄로 확신했다. 그리하여 음란한 성적 향연이 따르는 아프로디테 신전에서의 제사와 잔치에도 거리낌없이 참여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단호히 말한다. 고전 10:14, 20,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사실 우상신들은 아무 능력 없는 목석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뒤에는 귀신들이 작용하고 있다. 귀신들은 사람들이 거짓 신들에게 형상을 만들어 거기에 절하도록 악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귀신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들이 되길 원했다.   

 

예수님이 경계하신 우상숭배는 뭘까? 맘몬이다. 돈이다. 마 6:24, “사람이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나오는 재물이 원어로 맘몬이다. 맘몬은 풍요에 대한 숭배다.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벌어진 성행위들도 풍요와 다산에 대한 기원이란 점에서 모든 우상숭배의 근원은 같다. 즉 하나님보다 세상에서의 풍요를 더 숭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지극한 우상숭배의 위험에 빠져있는 것이다.

 

우상숭배의 위험에 맞서서 놓치지 말아야할 크리스천의 DNA는 뭘까? 그것은 한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상들은 너무도 잘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성경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말한다. 더 풍요해지려는 탐심을 버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목숨을 다해 섬길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 두번째는 ‘음행’이다. 고전 10: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모압에 이르렀을 때 모압 여인들과 집단 행음에 빠진다. 신약성경은 이 사건을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명했던 주술사 발람의 계략이라고 말한다. 계 2:14,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꼴을 못본다. 그래서 그들이 넘어지도록 덫과 걸림돌을 놓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음행이라는 덫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덫에 걸리는지 모른다.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이방신전에서 벌어지는 행음의 유혹 앞에 놓여 있었다. 현대 사회에도 음란한 기운이 가득하다. 음행으로 갈 수 있는 유혹 앞에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다.

 

음행의 덫에 빠지지 않기 위한 크리스천의 DNA는 뭘까? 그것은 주님의 신부라는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신부는 신랑을 위해 자신을 단장한다. 몸과 마음을 함부로 내어주지 않는다. 여기 있는 여러분이 주님의 신부로, 하나님의 거룩한 세대로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세번째 원인은 ‘주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고전 10: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바울은 민수기서에 나오는 사건을 언급한다. 민 21:4-6,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삶의 기본적인 필요들이 채워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마음이 상한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상황을 하나님과 지도자에 대한 원망으로 가져간다. 그들은 마실 물이 없음을 불평했다. 하나님의 공급해 주신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부르며 싫어했다.

 

출 17:7, “그가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인생에 결핍의 순간을 맞이할 때 ‘하나님이 정말 계신 것이 맞나,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맞나?’ 우리는 의심한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들 안에 부족한 것을 보게 하며 시험한다. 사탄은 예수님께도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고 유혹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천사들을 명하여 받아 줄 것이라고 유혹한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은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로 그를 대적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순종의 길을 가셨다.

 

인생에서 나에게 십자가의 길이 허락될 때가 있다. 내가 왜 이것을 져야하는지 마음이 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을 우리는 하나님을 기준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의심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주를 시험하는 것이다.

 

주를 시험하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갖춰야할 크리스천의 DNA는 뭘까? 그것은 모든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분을 찬양하는 것이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시편 95:6-9,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이 인생이 힘들어지는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분 앞에 무릎 꿇는 주의 백성 되기를 축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원인은 ‘원망’이었다. 고전 10: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원망은 어떤 일이 내가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원망은 바이러스처럼 쉽게 전염된다. 민 11: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광야에서 원망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다른 인종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불신의 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곧 전염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세우신 지도자를 향한 원망의 대열에 모두가 가담하게 된 것이다.

 

지금 바울이 편지를 보낸 고린도교회에서는 분파를 나뉘며 서로를 향한 비난과 원망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지도자인 바울의 리더십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도 있었다.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릴 때 원망은 시작된다. 현재의 축복에 익숙해지면서 감사를 잃어버린다. 미래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지 않을 때 우리는 원망으로 오늘을 살게 된다. 원망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묶는 행위다. 그래서 원망은 크리스천의 DNA가 아니다. 크리스천의 DNA는 감사하는 것이다. 모두가 죽겠다고 절망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하실 일을 신뢰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원망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면 습관처럼 감사하길 바란다.

 

시편기자는 말한다. 시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로 나아가는 자가 결국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이 쉽게 남을 원망하고 싶을 때, 오히려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주의 백성 되기를 축원한다.

 

고전 10:11-12,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전한 말은 지금 우리에게도 본보기가 되고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 기록된 것임을 믿는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DNA를 따라 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가나안이라는 구원의 완성에 들어가지 못했다. 여기 있는 우리들 대부분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성찬에도 참여한다. 그렇게 우리는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주의 백성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 하다. 우리는 우리가 선 줄로 과신하면 안된다.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와 같은 인생을 지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넘어져 결국 다수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럴 수 있는 위험이 오늘 광야 같은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 역시 이 시대의 우상에게 얼마든지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 사탄이 놓은 음행과 주를 시험하는 것과 원망하는 덫에 얼마든지 걸릴 수 있다. 시작된 구원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바라기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크리스천의 DNA를 따라 살 때 우리는 넘어지지 않고 우리의 신앙 여정을 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구원의 완성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