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상 1 한나의 일상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삼상 1:10-11)
일상(日常)은 매일 반복되는 하루 하루의 삶을 말한다. 아내의 일상이 다르고, 남편의 일상이 다르다. 키부츠에서 일하는 우리 청년들의 일상도 다르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 오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신앙생활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의 통치를 따를 때 우리의 일상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분의 나라로 연결되는 것이다.
오늘부터 사무엘서 강해를 시작한다. 사무엘서는 다윗 왕조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어떻게 이 땅에 펼쳐지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그런데 사무엘서는 그 첫 이야기를 ‘한나’라는 여인의 일상으로 시작한다. 한나의 일상이 어떻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는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삼상 1:1-2,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이 구절만으로도 우리는 한나의 일상이 어떠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한 여인이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나 징벌로 여겨졌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의 일상은 비통함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삼상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아이를 못 낳는 것도 서러운 일인데 ‘브닌나’라는 남편의 첩이 한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한나가 아이를 못 갖는 것은 한나의 신앙에 문제가 있거나 하나님께 벌 받은 것이라 생각했기에 브닌나는 첩인 주제에 본처인 한나를 격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적수인 브닌나의 존재로 인해 한나의 일상은 분노와 괴로움으로 가득했다.
남편 엘가나는 브닌나보다도 한나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제물의 분깃을 갑절로 주었다. 그러나 브닌나로 인해 화가 난 한나는 밥맛을 잃었다. 울며 먹지 않았다. 그래서 엘가나가 한나를 위로하기 위해 한마디 건넨다. 삼상 1:8, “…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이 말이 위로가 되었을까?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지만 대사가 별로다. 자기 중심적이다. “당신은 나에게 열 아들보다 소중해”라고 말했으면 조금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는 남편이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위로해주지 못하는 남편으로 인해 한나의 일상은 오히려 외로움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괴로움 가득한 한나가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 마침내 기도하고 통곡한다. 통곡 밖에 할 것이 없었다. 오랜 기도 끝에 한나는 입술은 움직이지만 음성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진액을 쏟는 기도를 하였다. 그것을 보고 엘리 제사장이 말한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는가 포도주를 끊으라” 자신은 여호와 앞에 심정을 통하는 기도를 하였건만 제사장이 그것을 오해할 정도로 당시 영적 지도자가 분별력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신앙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오해한 제사장으로 인해 한나의 일상은 억울함이 더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를 가장 근본적으로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누구일까? 하나님이다. 1장 본문에는 ‘여호와께서 한나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이 두 번 나온다. 한나를 가장 절망스럽게 했던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셨다. 왜 그러셨을까?
한나의 절망은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절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나가 살던 시대는 사사시대가 끝나가는 무렵이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말은 당시 시대상황을 잘 요약해주는 말이다. 사사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왕의 통치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아니라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갔다. 결국 하나님의 통치가 이 민족에게 이루어지지 않자 이스라엘 민족은 절망스러운 상태가 된다.
하나님은 이 상황을 돌이키기 원하셨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기 원하셨다.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기 원하셨다. 그래서 택한 것이 한나였다.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이루어지는 데는 반드시 사람의 동역이 필요하다. 새로운 영적 지도자 사무엘을 일으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배후에서 일하기 시작하셨다. 그녀의 태를 닫으셨고, 그녀를 격분시키는 적수를 배치하셨다. 한나의 모든 일상에 괴로움이 가득하게 하셨다. 사람은 괴로워야 기도의 자리로 나간다. 인간적인 희망이 사라져야 하나님을 찾는다. 절망에 빠진 한나는 기도의 자리로 나간다. 하나님이 이끄신 기도의 자리에서 한나는 하나님과 동역하기 시작한다. 한나는 괴로운 일상을 다른 것으로 보상 받으려 하지 않았다.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괴로움의 가장 근본 원인이 되는 불임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구했다. 그리고 아들을 주시면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한나의 심정을 통하는 기도는 결국 하나님이 한나를 위해 일하시기 위한 도구였다. 이 기도가 없었다면 한나의 일상은 운명에 지배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는 불가능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기도는 한나를 둘러 싼 운명의 그늘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자신과 가정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새롭게 하는 역사를 만들어 낸다. 아들 사무엘이 태어났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는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결국 그녀의 기도와 서원에 응답하셨다. 한나는 기도를 통해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이 경험을 통해 한나는 자신의 삶에 끊어져 있었던 것 같은 하나님과 연결된다. 그녀는 기도를 통해 정작 자신이 구했던 아들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는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한나는 이 경험을 통해 이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통치를 구하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한나는 아이가 젖을 뗀 후 서원을 이루기 위해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올라간다. 마카비서에 의하면 보통 3년 후에 젖을 뗀다고 한다. 한나는 엘리 제사장을 만나 이렇게 고백한다. 삼상 1:27-28,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이후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는 그의 경지가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삼상 2:1,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여기서 ‘뿔’은 힘과 권위와 명예를 상징한다. 한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며 이제 원수 앞에서도 항상 머리를 들 수 있는 당당함을 얻게 된다.
삼상 2:6-8,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한나는 3년여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이 절대주권을 갖고 계심을 경험적으로 알고 그분을 찬양하는 사람이 된다.
한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찬양한다. 삼상 2: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아직 왕이 없던 시대에 한나는 장차 하나님께서 왕을 기름 부어 세우시고 그의 뿔을 높이실 것을 찬양한다. 이것은 그녀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작정을 알았기에 할 수 있었던 예언적인 선포였다. 한나는 이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하는 자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기도를 왜 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내가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다. 즉 기도할 때 변화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나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무엘이 젖 떼기까지 한나의 일상은 기도로 채워졌다. 한나는 뒤늦게 얻은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작 아들을 얻었을 때는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아들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얻은 아들 이삭을 통해 하나님이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심을 경험했기에 그도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무엘이 젖 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결국 한나가 변한 것이다. 이처럼 기도의 가장 큰 응답은 내가 원했던 것을 얻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는 내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다.
사사시대의 혼돈이 끝나고 이스라엘의 왕조가 시작되는 새 시대의 출발은 이처럼 한나라는 한 여인의 기도 속에서 시작되었다. 괴로웠던 한나의 일상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분노와 열등감, 수치와 외로움으로 가득했던 한나의 일상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자 하나님 나라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한나의 기도는 한 가정의 축복을 넘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는 축복이 되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시대의 혼돈을 끝내고 새로운 시대로 우리를 이끌기 원하신다. 그래서 한나와 같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 기도로 동역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여러분들의 일상이 남들에게 말 못할 고통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여러분을 동역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일지 모른다. 하나님은 고통가운데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끄신다. 우리가 신음 속에서 엎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 속에 당신의 나라를 시작하시고 건설해 갈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내가 주인이 되어 나의 왕국을 가꾸는데 다 소비될 수도 있고, 하나님이 왕이 되어 그분의 왕국을 건설하는데 사용되어질 수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높은 부르심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의 왕국 만을 위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왕의 자녀들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 정말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존재들로 지음을 받았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예견했다. 행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더 높은 부르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자녀들이 공부 잘하는 자녀가 되는 것 좋다. 그러나 그들이 예언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더 높은 부르심이다. 우리 아빠들이 직장에서 성공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는 자가 되는 것이 더 높은 부르심이다. 우리 청년들이 친구들 속에서 인정 받는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젊은 날 창조주를 기억하며 그 분이 그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환상을 보는 자가 되는 것, 그것은 더 높은 부르심이다.
사탄은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나 자신의 왕국에 제한되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창조되었다. 국가 뿐만 아니라 개인의 역사도 결국 누가 왕이냐의 싸움이다. 누구의 통치를 받고 있는가의 싸움이다. 사무엘서에서 이스라엘의 왕들의 시대 시작되지만 결국 이 왕들도 자신의 왕국을 구하느냐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바라기는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위한 더 높은 부르심에 연결되길 원한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나의 작은 일상 속에서도 매일 매일 이루어지는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