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 권위의 이전

2018년 9월 8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상 2 권위의 이전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삼상 3:19-20)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창 1:3) 하나님은 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그 말씀에 운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고 말씀으로 작정하신 일을 진행하신다. 이스라엘 역사 뿐만 아니라 모든 개인의 영적인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부재할 때 일어난다. 잠언 29:18절에서도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말한다. 엘리 제사장 당시 사사시대가 그랬다.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이 사라지자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기 시작했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권위가 사라진다. 아내가 남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자식들이 부모의 말을 거역한다. 직장 부하들이 상사의 말을 우습게 여긴다. 사회 안에서 그들의 위치만으로도 존중 받아야  할 리더들의 권위가 존중되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 소견이 옳은대로 살기 때문이다. 말의 권위가 떨어진 시대에서 우리는 매일 상처받는다. 관계는 단절되고 사람들은 남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살아간다. 어떻게 해야 내 삶에 부흥이 올까? 오늘 사무엘서 3장을 살펴보며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삼상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으면 누가 가장 손해를 볼까? 사람들이다. 우리들이다. 아모스서 8:11절은 말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영혼의 문제다. 영혼의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다. 사람들은 이 영혼의 기갈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다른 거짓 기쁨으로 채우려 한다.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명예를 추구한다. 지식을 추구한다. 음식과 쇼핑과 다양한 오락거리를 추구한다. 성에 탐닉한다. 이러한 것들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우리 영혼에 채워져야 할 하나님의 자리, 하나님 말씀의 자리를 밀어내고 우리 영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짜 기쁨들은 우리 영혼의 기갈을 결코 해결해주지 못한다. 더 목마르게 할 뿐이다.

 

삼상 3: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세대를 향하여 침묵하셨다. 제사장 엘리는 늙었고 그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할 아들들은 타락했다. 엘리의 눈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자 그 시대는 함께 어두워져 보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삼상 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영적으로 어두워진 시대에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말에서 희망이 느껴진다.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워자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에 누워있던 사무엘을 주목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사무엘을 부르셨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은 엘리가 부르는 줄 알고 그에게 달려간다. 이 일이 세번이나 반복된다. 그제서야 엘리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신 줄을 깨닫는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말한다. 삼상 3:9,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 후 사무엘은 다시 자기 처소에 눕는다.

 

그 후 또 다시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신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은 엘리가 가르쳐준 대로 대답한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란 말은 단지 귀로 듣겠다는 말이 아니다. 듣고 따르겠다는 말이다. 즉 순종하겠다는 말이다. 순종의 결단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오는 것이다.

 

삼상 3:11-14,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2]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13]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

 

사무엘은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서 듣는다. 그것은 엘리 가문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었다.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은 곧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겠다’는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의 시작을 의미한다.

 

사무엘은 아침에 일어나 여호와의 집 문을 연다. 그러나 지난 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이상을 엘리에게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사무엘을 만난 엘리의 첫 질문은 당연히 “하나님이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였다. 그는 사무엘에게 숨김없이 말할 것을 요청했다. 사무엘은 하는 수 없이 사실을 말했다. 그러자 엘리는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권위의 이전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이전에 하나님 말씀의 권위자였던 엘리는 이제 어린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 권위를 부여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 하나님이 하실 계획과 이상을 보이시기 때문이다.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할 때만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에 사무엘은 말씀을 받았다. 그는 윗세대가 타락했다고, 무능하다고 혁명을 주도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 앞에 머물며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로 자신을 준비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그 말씀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갔다.

 

사무엘은 하루 아침에 혜성처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등장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엘리 밑에서 제사장이 되는 수업을 받았다. 제사장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지를 엘리에게서 배웠다. 구세대가 다 나쁜 것이 아니다. 구세대에서 배울 것이 반드시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무엘은 엘리와 그의 가문이 왜 실패했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반면교사가 되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매년 실로에 제사를 드리러 올라오면서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입혔다. 한나가 그에게 겉옷만 입혔겠는가? 아니다. 한나는 기도로 그를 입혔다. 어머니의 기도는 중요하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작정이 이루어지는 통로로 준비되었기에 사무엘은 때가 되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삼상 3:19-20,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가 되자 그에게 권위가 세워졌다.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이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이는 현실 세계 속에 새로운 하나님의 질서를 창조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을 찾고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을 통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자 이스라엘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이상이 생겨나고 다시 하나님께 헌신하려는 마음이 살아나게 된다. 이것이 부흥이다.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오는 것이다.

 

히 11:3절은 말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통, 사람들은 보이는 현실 세계만을 중요시 한다. 그리고 그 현실만 보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리가 사는 현실의 세계를 결정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져야 땅에서도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땅의 현실을 결정하는 것은 하늘의 뜻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의 뜻을 알아야한다. 하늘의 뜻을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늘의 뜻을 알고 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태초에 말씀으로 존재하셨던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역사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다 이루는 역사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 연결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 들어올 때 우리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우리의 삶에 들어오는가? 먼저 기록된 말씀을 읽어야 한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다. 그 말씀이 들어올 때 우리의 혼과 영에 새로운 질서가 생긴다. 내 생각이 정리되고 하나님의 뜻이 세워진다. 그랬을 때 우리 삶에 하나님의 이상이 보이게 된다.

 

성경을 읽어도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단지 지식적으로 읽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태도로 읽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임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레마라고 한다. 레마의 말씀이 임해야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 하나님 말씀의 운동력이 내 삶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믿음과 소망이 생기며 더욱 사랑할 마음이 부어진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내 삶에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부흥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 권위의 이전이 이루어질 때 부흥은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절망을 더 많이 이야기 하는 시대가 된 듯 하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사람들은 가짜기쁨에서 위로를 얻으려 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 우리가 목마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기갈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져서 이상이 보이지 않기에 꿈을 잃고 소망을 잃어버린 삶을 사는 것이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삶을 회복하길 바란다. 내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는 삶이 되길 바란다. 나타난 현실에 지배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되어 이 현실 세계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하늘의 일을 이루어가는 삶이 되길 바란다.

 

이제 내일이면 로쉬 하샤나, 유대인의 신년이 시작된다. 유대인의 신년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접하고자 한다. 다락방에서도 창세기부터 말씀을 함께 읽고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공부하고자 한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며 내게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며 함께 엎드리고자 한다. 말씀이 임해야 부흥이 온다. 그것이 내 개인의 삶을 회복하고 가정을 살리는 길이다. 시대가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진행하신다. 여기 있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 떨며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가 되는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펼쳐지는 부흥의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 있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