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0 다윗의 분노 

2018년 11월 3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상 10 다윗의 분노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31]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 (삼상 25:30-31)

 

 

분노(憤怒)는 우리가 살면서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감정이다.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분노를 자주 폭발시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분노를 안으로 쌓아 놓는 사람이 있다. 표현되지 않는 분노는 우울증이 된다. 그래서 우울증을 ‘응고된 분노’라고 한다. 그러나 분노를 함부로 쏟아놓는 사람에게도 우울증이 찾아온다. 지나치게 화를 낸 것에 대한 후회 때문에, 또한 화를 내도 상황이 별로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우울한 것이다.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니다. 옳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하나님도 분노하신다. 시편 7편11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의 분노는 공의를 행하고, 인생을 바로 건설하기 위한 분노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분노는 옳은 것 같지만 너무도 자주 충동적이고 파괴적으로 흐른다는데 문제가 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분노하는 사건이 나온다.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크게 뚜껑이 열린 날이 아닐까 싶다. 다윗의 분노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분노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삼상 25:1,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오늘 본문 25장은 사무엘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었던 사무엘이 죽었다. 다윗도 라마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바란 광야로 도망간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다윗은 왕이 되기는 커녕 도망자로 피해 다니고 있다. 사무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더욱 희미해지고 왕이 된다는 전망은 더욱 어두워졌을 것이다.

 

삼상 25: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한 부자가 나온다. 그의 이름보다도 그가 가진 재산이 먼저 소개된다. 이어서 그의 이름이 소개된다. 삼상 25: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나발은 ‘바보’,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보요”라는 소개에서 우리는 그의 캐릭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삼상 25:3,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나발이 부자이고 갈렙 족속이라는 소개는 그가 유대지파의 재력가임을 보여준다. 한편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소개된다. 등장인물에 대한 이러한 소개를 통해 우리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대강 짐작해볼 수 있다.

 

삼상 25:4, “다윗이 나발이 자기 양 털을 깎는다 함을 광야에서 들은지라” 양의 털을 깎는 것은 보통 5~6월 여름 전에 벌어지는 연례 행사였다. 삼천 마리 양의 털을 깎는 큰 행사가 나발 집안에서 벌어진다. 양 주인은 양털을 통해 큰 소득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양털 깎는 행사는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먹고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된다. 다윗은 이 때 자신의 부하 10명을 나발에게 보내 떡과 고기를 달라고 정중히 요청한다.

 

그러나 나발은 다윗의 부하들에게 매몰차게 답변한다. 삼상 25:10-11,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이 말이 고스란히 다윗에게 전달된다. 다윗의 뚜껑이 열린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왕 앞에서도 침착했던 그였다. 쫒기던 아둘람굴 속에서도 자신의 원통함을 하나님께 토하며 평정심을 지켰던 그였다. 그러나 자신을 모욕한 나발의 말에 다윗은 이성을 잃는다. 그는 복수의 칼을 빼어 든다. 400명의 부하를 무장시켜 나발을 죽이기 위해 출발한다. 삼상 25:22,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자, 이 소식을 하인에게서 들은 아비가일이 급해진다. ‘급히 떡 이백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 등의 음식을 나귀들에게 싣고 다윗에게로 달려간다. 아비가일은 총명했다. 다윗을 만나자 그녀는 훌륭한 분노 상담가 역할을 한다. 먼저 그녀는 화로 가득한 다윗의 마음을 공감해준다. 삼상 25:25,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분노 유발자인 자기 남편을 깎아 내린다. 그는 불량하고 미련하기 때문에 다윗이 분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분노에서 벗어나는 첫번째 스텝은 나를 화나게 하는 그 사람이 정말 내가 화낼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평가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말과 행위 때문에 화가 났지만 그 화가 나를 지배하고 이끌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어서 아비가일이 말한다. 삼상 25: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비가일의 말은 다윗의 시선을 다시 하나님께 돌리게 했다. 그동안 다윗은 자신의 원수에게 피 흘려 스스로 보복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잘 지켜왔다. 그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비가일은 29절에서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고 말한다. 아비가일은 원수 갚은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임을 다윗에게 상기시킨 것이다. 분노에서 벗어나는 두번째 스텝은 내가 분노하며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아비가일은 또 말한다. 삼상 25:28,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한다. 다윗이 나발에게 격노하게 된 이유는 그의 어리석은 말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윗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다윗은 자신이 누구이며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잊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자이고 장차 왕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사람이었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일깨워주며 다윗의 정체성과 부르심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든든한 집, 다윗 왕조를 세우실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도망다니며 고단한 싸움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여호와를 위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당신의 삶속에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은 잘 해왔습니다.’ 이런 아비가일의 말은 다윗의 마음을 새롭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분노에서 벗어나는 세번째 스텝 나의 부르심과 정체성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직장에서 상사가 나를 화나게 해도 흔들리지 않고 나의 사명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여집사님들이 자녀와 씨름하며 지지부진한 싸움을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위한 싸움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를 키우면서 분노는 여전히 힘든 싸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분노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힘들어서 지쳐갈 때 우리는 우리를 어미로, 아비로 부르셔서 자녀를 맡겨주신 사명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필요 이상의 분노를 쏟지 않고 사명자로 일어서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비가일은 말한다. 삼상 25:30-31,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31]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 다윗은 지금 분노로 인해 자신의 미래를 잊고 있었다. 만약 다윗이 나발 집안의 사람을 다 죽였다면 어떤 결과가 따랐을까? 나발은 유다지파의 세력가 였다. 후에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대지파의 왕이 된다. 만약 다윗이 나발과 그 집안 남자들을 다 죽였다면 그는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되더라도 그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아비가일은 지금 다윗이 분노를 느끼는 현재의 상황을 미래와 연결해서 판단하도록 도운 것이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했기에 다윗은 지금 코 앞에 있는 상황과 분노를 유발하는 사람 때문에 분노라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다시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분노에서 벗어나는 네 번째 스텝은 현재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노의 감정과 그에 따른 행위가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며 결정하라는 것이다. 내 안에 분노가 가득할 때에 우리는 잠시 스스로 ‘타임 아웃’을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이 분노가 미칠 미래의 결과를 한번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결국 다윗은 그의 분노를 파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않게 된다. 아비가일은 잔치로 취한 나발을 깨우지 않고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그간에 벌어진 일을 보고한다. 나발은 그것을 듣고 낙담하여 몸이 돌같이 된다. 그리고 열 흘 뒤에 죽게 된다. 하나님이 나발을 치신 것이다.

 

우리는 평생 분노라는 감정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는 옳은데 다른 사람은 틀려서 또 화가 나게 될 것이다. 분노라는 감정은 나의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옳을지라도 나의 분노는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요나는 자기를 시원하게 해주던 박넝쿨이 없어져서 화를 낸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질문한다. “네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요나가 대답한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사실 요나는 적국인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싫었다. 도망가다 잡혀서 결국 마지못해 가서 전했는데, 니느웨 백성들이 정말 회개하자 더 화가 났던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욘 4: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행을 저질렀던 원수도 사랑하시고 그들을 아끼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고서 요나는 더이상 분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엡4:31-32절은 우리에게 도전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점점 더 쉽게 분노하는 사회에 살면서 적용하기 힘든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 왕같은 제사장이 되라고 부름 받았다. 쉽지 않겠지만 분노할 수 있는 권리를 내려 놓고 친절과 긍휼과 용서를 심는 삶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다윗처럼 우리를 왕으로 세워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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