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1 진짜 세상

2018년 12월 29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전도서 1 진짜 세상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세대는 가고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 1:2-4)

2018년 한 해의 마지막 샤밧예배를 드린다. 시간은 똑같은 속도로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 지난 주 청년들과 전도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연말연시에 이 전도서 말씀으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의미 있는 삶, 보람 있는 삶을 위한 지혜를 얻게 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누굴까? 가장 적합한 사람은 솔로몬이다. 그는 자신을 전도자라고 표현한다. 히브리어로는 ‘코헬렛’이다. 코헬렛은 뭔가를 말해주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은 사람을 뜻한다. 이 전도자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해주기 원했을까? 그 첫마디를 들어보자.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Meaningless! Meaningless!” says the Teacher. “Utterly meaningless! Everything is meaningless.”) (הֲבֵ֤ל הֲבָלִים֙ אָמַ֣ר קֹהֶ֔לֶת הֲבֵ֥ל הֲבָלִ֖ים הַכֹּ֥ל הָֽבֶל) 히브리어 ‘헤벨’을 영어로는 ‘meaningless’, 한국어로는 ‘헛되다’라고 번역했다. ‘헛되다, 의미없다’ 이 말을 계속해보라. 아마 살기 싫어질 것이다. 그런데 헤벨은 ‘숨, 바람’이란 뜻이다. 인생이 한 숨, 바람과 같다는 것이다. 겨울에 밖에서 한 숨을 쉬어보면 그 입김이 잠깐 있다 사라져 버린다. 그만큼 인생이 짧다는 것이다.

다윗도 같은 고백을 했다. 시 39:4-6,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헤벨)뿐이니이다 (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헤벨)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인생이 한 숨과 같다는 것은 그게 영원할 것 같지만 금방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잘 콘트롤하기 원한다.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안정된 것으로 만들기 원한다. 더 확실한 삶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쏟아붓는다. 얼마나 더 노력해야 나의 직업이 안전해질까? 얼마나 더 애를 써야 나의 자녀들이 나의 통제 안으로 들어올까? 그러나 삶은 쉽지 않다. 우리가 잡으려 하지만 어느새 내 손에서 빠져나간다. 내 삶을 내가 콘트롤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 나오는 한숨이 바로 ‘헤벨’이다. 다윗도 그런 탄식을 내뱉었다. 시 103:15-16,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멋진 성과 같은 인생을 세우기 원했는데, 아직 바닥공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을 때 우리는 초조해진다. 별로 이룬 것 없이 또 한 해가 지나고, 나이는 먹고 주름은 늘어나고 몸은 작년과 같지 않음을 느낄 때 우리는 우울해진다.

전도자는 이제 인생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전 1: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무엇이 유익한가(מַה־יִּתְרֹ֖ון)는 ‘무엇이 남는가’란 뜻이다. 내가 그렇게 수고하고 애쓰는데 내 인생에서 남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하루 종일 공부하느라 애쓰고, 직장에서 돈 버느라 애쓰고, 애들 키우느라 애쓰는데, 그런 수고를 통해 나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영원한 것이 없는데 내가 수고하며 뭔가를 남기려는 하는 것이 덧없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해 아래에서’라는 조건에서 예외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 질문에서 예외되지 않는다. 한 세대가 지나고 또 다른 세대가 오지만 땅만 영원히 있지 모든 삶의 자취는 사라지고 만다.

어떤 사람은 인생이 너무 짧고 허무하기에 쾌락에 몰두한다. 그러나 그것도 피곤한 일이다. 전도자는 말한다.전 1: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것들을 추구한다. 그러나 전도자는 말한다. 전 1:9-10,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삶에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냉소주의에 빠지기 쉽다.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쾌락에 몰두하는 삶도 피곤하고, 해 아래에서 새로운 것이 없다면 내 삶의 의미는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전도자는 오늘 본문에서 아직 그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데 전도자가 인생이 헛되다고 몰아가는 이유가 있다. 헛되지 않은 진짜 세상이 있음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전도자로 소개되고 있는 솔로몬은 온갖 부와 영광을 다 누려본 사람이다. 세상 지식과 지혜가 탁월했던 지성인이었다. 놀만큼 놀아봤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그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 어찌보면 얄밉다. 그와 같은 삶을 추구하려던 사람들은 김이 샌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추구하는 것이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절대자를 찾지 않는다. 쾌락을 추구하며 인생을 즐기려 한다. 새로움을 추구하며 인생의 족적을 남기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살아야 할 진짜 세상이 아니다. 자신의 기대와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가짜 세상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한 숨과 같이 짧고 허무한 것이구나를 절감할 때에야 비로소 영원한 것을 찾게 된다. 그래서 전도서는 하루라도 젊었을 때 읽어야 하는 책이다.

그러면 무엇이 헛되지 않은가, 무엇이 영원한가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라고 노래했던 다윗은 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은 시편을 남겼다. 시 103:17-18,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성경은 여호와의 인자하심, 즉 헤세드 사랑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히 주어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영원’은 히브리어로 ‘올람’이다. 헤벨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올람’은 명사다. ‘감추다, 가리다’(hide)라는 뜻의 히브리어 ‘알람’(alam)이란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과거나 미래의 시간은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감추어진 시간’이다. 과거는 우리가 살아보지 않았기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가 예측할 수 없기에 역시 감추어져 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는 히브리어로 ‘메올람 베아드올람 (וְעַד־עֹ֭ולָם מֵעֹולָ֣ם) 으로 표현되어 있다. ‘메올람’은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과거의 영원이다. ‘아드 올람’은 우리의 죽음 이후에도 있게 되는 미래의 영원이다. 덧없는 인생, 한 숨과 같은 인생이 어떻게 영원에 연결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영원과 연결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0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지금 나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될 때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 부어진다. 그리고 그 사랑과 구원의 은혜는 자신의 세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손의 자손까지 세대를 이어서 이르게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가 영원에 연결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렇게 말했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도 요한도 이런 말을 남겼다.요일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영원과 연결되는 것이다.이 영원과 연결될 때 인간은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이 세상을 살되, 쾌락주의, 냉소주의, 성공지상주의, 물질주의에 빠져 살지 않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할 때 우리의 삶에 만족이 찾아온다.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와 노력이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함이며, 그것이 영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하는 수고만이 영원과 연결되는 것이고, 그 결과 허무함이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영원과 연결된 사람만이 진짜 세상을 살아간다. 똑같은 ‘해 아래서’라는 인간 조건도 새로워진다. 시 113:3,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이런 찬양과 감격으로 해 아래서 수고의 땀을 흘리면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애 3:22-23,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하나님의 영원과 연결된 사람은 포로로 끌려간 상황속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노래했던 예레미야처럼 날마다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중세 신학자 어거스틴은 젊었을 때 놀만큼 놀아본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그런 그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다. 어느 날 그는 “들어서 읽어라. 들어서 읽어라.”(Take up and read; Take up and read.)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서 읽은 구절이 로마서 말씀이었다. 롬 13:13-14,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는 이후 변화되어 유명한 말을 남긴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만드셨기에 당신 안에서 쉼을 찾기까지 우리의 마음은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인간이 되는 조건은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우리는 그 분 안에서만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분의 영원에 연결될 때 우리는 허영과 자랑과 쾌락과 허무로 가득한 가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흐르는 진짜 세상을 살게 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진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던 다윗처럼 부족함 없는 인생,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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