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서 1 짐을 지는 사명

2019년 3월 16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아모스서 1 짐을 지는 사명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암 1:1-2)

지난 번 이스라엘 단선팀이 왔을 때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 있었다. 그것은 7년 전 이스라엘에 왔을 때 예루살렘에 있는 마하네 예후다라는 재래시장에서 본 풍경이었다. 때는 금요일 2시 50분 경이었다. 시장에 있는 가게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가게주인들은 문을 닫으면서 과일이나 야채들을 밖에 내다 놓았다. 필요한 사람들이 그냥 가져가라고 남겨놓는 것이었다. ‘아, 이게 바로 쩨다카구나.’

쩨다카는 ‘구제, 공의’라는 뜻이다. 나는 그 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공의를 여전히 삶속에서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신기했다. 그 날 나도 아이들과 과일과 야채 꾸러미를 챙겨왔던 기억이 있다. 또 한 풍경이 있었다. 3시가 되자 검은 옷을 입고 털모자를 쓴 정통 유대인 두 명이 두부 종 같은 것을 치며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샤밧이 시작되니 빨리 문닫고 들어가라고 종을 치는 것이었다. 3시가 넘어서도 문을 닫지 않은 가게가 있으면 그들은 그 앞에 가서 빨리 문을 닫으라고 호통을 쳤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유대교의 저력을 느꼈었다.

이번에 그 장면을 보기 위해 금요일 오후 2시 20분경 그 시장에 갔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주문했다. ‘아 이제 조금 있으면 샤밧의 풍경을 볼 수 있겠구나’ 모두들 기대했다. 아닌 게 아니라 식당 앞 채소가게에서 점원이 청소를 하면서 문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 가판대에 과일과 채소를 비닐 봉지에 담아 내 놓았다. 나는 ‘저게 쩨다카다’라고 팀원들에게 알려줬다. 하나 가져와도 된다고 말했다. 팀원 중 형제 한 명이 거기로 갔다. 좀 더 좋은 걸 고르려고 봉지 안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청소하던 가게 직원이 ‘너 뭐햐냐?’고 형제에게 물었다. 쩨다카로 내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거 내가 가져가려고 놔둔 건데 너가 살래?’라고 물었다고 한다. 분위기가 안 좋은 것 같아 내가 다가가서 쩨다카로 내어 놓은 건 줄 알았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야, 많이 변했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3시가 넘었다. 그런데도 열린 가게들이 많았다. 두부 종을 치며 호통치며 다니던 정통 유대인들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야, 이스라엘이 변했구나’ 그 날, 팀원들에게 기대했던 샤밧의 풍경을 보여주지 못해서 아쉬운 것도 있었지만 이스라엘 사회가 많이 변한 것 같아 왠지 안타까웠다.

사회는 빨리 변한다. 오늘부터 우리는 아모스서를 살펴보려 한다. 빨리 변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암 1: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는 ‘짐을 진 자’란 뜻이다. 아모스는 북이스라엘과 주변 나라들을 향한 무거운 경고의 말씀을 전해야하는 짐을 졌다. 그는 남유다 드고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주로 사마리아와 벧엘에서 북이스라엘을 향해 예언했다.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번영기였다. 당시 왕이던 여로보암 2세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에 이르는 영토를 회복했다. 이 시대 북 이스라엘의 번영은 사회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상류 특권층은 겨울과 여름 별장을 짓고 상아궁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반면 하층 계급의 빈민들은 부자들에게 착취를 당하고 적은 돈에 종으로 팔리는 현상이 벌어졌다. 아모스는 착취하는 자와 착취를 당하는 자들로 나뉘어진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이렇게 고발하고 있다.

암 2: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부자와 권력자들은 재판에서 뇌물을 받고 의로운 사람들에게 죄를 선언했다. 그들은 또한 신 한 켤레 값을 받고 가난한 자들을 종으로 팔아 넘겼다. 가난한 자들이 빚을 지고 고가의 이자를 갚을 수 없자 그들은 종으로 팔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공의와 사랑이 무너진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하나님 나라 경제에는 지극히 부자도, 지극히 가난한 자도 없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신 10:17-18,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여기서하나님은 정의를 행하시는 분으로 소개된다. 정의는 히브리어로 ‘미슈파트’이다. ‘법률적으로 선언된 판결’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는 필연적으로 취약계층이 생긴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가난한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미슈파트를 선언하신다. ‘약자들을 돌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세워진 이스라엘 공동체 모두의 의무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선언하신 미슈파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레 25:35-36,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레 25:39-40,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신 24: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자, 그런데 이 하나님의 미슈파트에 역행하는 일이 아모스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벌어진 것이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고리의 이자를 받아내려 했고, 그들이 빚을 갚지 못하자 헐값에 종으로 팔아 넘겼다. 모든 부채를 탕감해주는 희년의 제도도 지켜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정의와 축복으로 유지되어야 할 나라가 마치 자본주의 사회처럼 돈과 권력을 가진 자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런 북이스라엘에 하나님은 복을 더이상 내리실 수 없었다. 기원전 760년경 북이스라엘 사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모스가 고발하는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좀더 살펴보자. 암 2:7,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권력을 가진 자들은 힘없는 자들을 학대했다. 바른 길을 가고자 해도 굽은 길로 가게 했다. 당시 권력층들은 자신들이 악한 길을 가고 있기에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도 굽은 길을 가도록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한 집에 사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자에게 다녔다는 것은 당시 바알숭배와 함께 벌어졌던 집단 혼음을 의미한다. 당시 사람들은 풍요와 성공을 원했다. 바알 신전의 여사제와 음란히 먹고 마시며 바알와 아세라 신을 흥분시킴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였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지금 드러나고 있는 버닝썬 사태도 지극히 작은 한 단면일 뿐이다. 성공하기 위해 뇌물을 주고, 성상납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관행이 극히 일부만 드러난 것이다. 한 집의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이 시대의 바알을 숭배하고 있다. 세대를 이어 성공과 부를 쫓고 쾌락을 위해 사는 삶에 정신 없는 것이다.

암 2:8,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이것은 사람들이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겉옷을 돌려주지 않고 깔고 앉아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이 겉옷을 전당 잡히더라도 저녁 전에는 반드시 이 돌려주라는 미슈파트를 선언했다. 출 22:26-27,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전당 잡힌 겉옷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겉옷은 덮고 잘 이불이 되기 때문이다. 겨울 이스라엘의 밤은 춥다. 겉옷마저 없으면 자다가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모스 당시 권력층들은 이 율법의 말씀을 무시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이스라엘 공동체에 정의가 사라진 모습에 슬퍼하셨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여 이렇게 선포한다. 암1: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부르짖는다는 건 히브리어로 ‘샤아그(שאג)’다. ‘신음하다, 으르렁거리다’란 뜻이다. ‘소리를 내다’는 ‘나탄 콜(נתן קול)’인데, ‘천둥같은 큰 소리로 외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너무도 변해버린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보고 신음하며, 소리쳐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나라로 만드시기 위해 공을 들이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 보자. 암 2:9-11,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가 차지하게 하였고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모리 사람은 가나안 원주민을 통칭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주시기 위해 강한 그들을 물리치셨다. 애굽에서 노예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어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고, 마침내 그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그리고 선지자와 나실인을 세워 하나님의 율법에 토대를 둔 사회를 세우셨다. 

그러나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암 2:12, “그러나 너희가 나실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사회,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사회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작정되고 선언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암 2:13, “보라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섬기기 위해 공의의 짐을 나누어지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네가 너희를 누르겠다’고 선언하신다.

아모스 선지자가 고발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회를 살펴보면서 지금의 한국 사회가 오버랩 된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갑질하는 사회,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사회,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는 사회, 성공과 쾌락을 위해 사람들을 팔아버리는 사회, 약자들을 위한 부의 배분이 구조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사회… 부끄럽게도 아모스의 고발을 통해 우리 시대 교회의 모습, 우리 자신의 모습 역시 오버랩 된다. 나의 구원에만 몰두하고 있는 교회, 나와 내 가정의 행복과 성공에만 관심이 있는 우리의 모습 말이다.

오늘 아모스서가 제시하는 공의의 모습은 연약한 자의 짐을 지는 것이다. 남의 짐을 지는 건 무거운 일이다. 귀찮은 일이다. 손해보고 남의 짐까지 내가 지게 될 때 마음에 눌림이 있게 된다. 그래서 외면하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공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선 누군가 나의 짐을 대신 지어주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샬롬도 지불된 평화이다. 히브리어 ‘레샬렘’은 ‘지불하다’란 뜻이다.샬롬이 거기서 온 단어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무거운 짐을 지고 우리의 죄의 삯을 지불하셨기에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다. 우리도 내 앞에 있는 십자가, 무거운 십자가, 귀찮은 십자가를 기꺼이 질 때 다른 사람이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기 원하시는 공의로운 공동체의 모습인 것이다.

80년대 김준곤 목사님은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가 되기를 소망하며 외쳤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이런 기도가 이루어져 이 나라 모든 것이 뿌리째 송두리째 복음화 되는 날, 예수 한국의 두메 마을, 우물가의 여인들과 김메는 농부들의 입에서도  샘물이 터지듯 찬송이 절로 터지고, 각급 학교 교실마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성경이 최우선 필수 과목으로 배워지고, 계방들이 모조리 성경 교실이 되고, 예수 안 믿는 것이 옛날 쌍놈이 된 것 만큼이나 부끄러워 혼인길도 막히는 민족, 이 땅에 태어나는 어린이마다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기도와 신앙의 핏줄에서 자라며, 국무회의나 국회가 국정의 대소사를 논할 때  의례히 주의 뜻이 앞서고 경건된 기도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예수의 나라 동방의 성민 코리아, 세계의 시장에서 예수 한국이 만든 나사못 하나, 단추 하나까지도  예수 한국의 신앙과 양심과 정성이 보증 수표처럼 으레 믿어지는 민족,  순종하는 개인이나 민족에게는 하나님이 영육간에 축복하신다는 사실은 불변의 대원칙이며 성경의 가르침이다.”

사회는 너무도 빨리 변해간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하나님의 공의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는 개인과, 사회와 민족을 반드시 축복하신다. 공의의 짐을 지는 건 무거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는 공의의 짐을 통해 반드시 누군가가 평화를 누리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이유가 있다면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연약한 이웃을 위해 기꺼이 짐을 지는 수고를 통해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 세워지는 것이다. 바라기는 교회인 우리가 아모스처럼 ‘짐을 진 자’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와 지금 우리가 있는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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