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7 아모스가 본 유토피아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5월 25일 설교 이익환 목사

아모스 7 아모스가 본 유토피아

내가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열매를 먹으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9:14-15)

지난 주 미국의 억만장자 로버트 스미스가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졸업생 모두의 학자금 대출빚을 갚아주겠다고 선언했다. 총 4000만 달러(약 480억원)를 기부한 것이다. 이런 일이 전 세계 모든 대학에서 일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기분 좋은 상상을 좀더 해보고자 한다. 토머스 모어는 그의 책 유토피아에서 다음과 같은 세상을 꿈꾸었다. 그가 상상한 섬 이름이 바로 ‘유토피아’였다. ‘그 섬에는 화폐가 없다. 주민들은 각자 시장에 가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만큼 물건을 가져다 쓰면 된다. 집은 모두에게 다 제공되는데, 주민들은 10년마다 이사하며 집을 바꾸어 산다. 유토피아에서는 하루에 총 6시간 일을 한다. 정오까지 세 시간 일을 하고 점심 식사를 한다. 점심 후에는 두어 시간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세 시간 일을 하러 간다.’ 이런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격무와 야근에 시달리는 남자 집사님들이 가장 원하는 세상일 것이다. 그런데 유토피아는 ‘유(ou, 없다)’와 ‘토포스(topos, 장소)’를 결합한 단어다.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토머스 모어가 꿈 꾼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였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에는 아모스 선지자가 꿈 꾼 유토피아가 나온다. 그동안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심판의 메시지만 전한 아모스의 입에서 이번엔 회복의 메시지가 나온다. 그가 전한 회복된 사회의 이상적인 모습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지난 주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여름 과일 광주리를 보여주면서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음을 선포하는 장면을 살펴보았다. 9장에서도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심판의 메시지를 이어가신다. 암 9:1, 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 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 제단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던 장소다. 종교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제단의 기둥머리를 쳐서 무너지게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행위에 대한 심판이다.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그들의 종교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달랐다. 당시 그들의 종교행위는 하나님 한 분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자신들의 번영을 위한 우상 숭배로 가득했던 것이다.

암 9:2, 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안전지대를 만들고 거기 피할지라도 하나님은 다 찾아내서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 중에라도 남은 자들은 반드시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암 9:8-9,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야곱의 집을 다 멸하시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체질을 통해 택하신 자들은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하나님의 심판은 결국 남은 자를 찾기 위한 것이다.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알곡과 같은 사람들을 구별해내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체질 하실 때 남겨지는 알곡이 되길 축원한다.

그러나 그릇된 선민의식을 가지고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던 자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암 9:10,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안전한 게 아니다. 교회 다닌다고 안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는 알곡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선지자의 심판의 메세지는 우리를 두렵게 한다. 지금까지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낱낱이 고발했다. 그리고 가차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다. 그러나 선지자의 또다른 역할은 백성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11절부터 아모스는 회복의 메시지를 전한다. 암 9:11,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첫번째 회복은 다윗의 장막이 다시 세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의 왕국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암 9:12,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두번 째 회복은 열방을 기업으로 얻는 것이다. 여기서 에돔은 이스라엘의 원수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다. 야곱이 자신의 장자권을 가로챘기 때문에 에서는 야곱을 원수로 여겼다. 그래서 그의 후손인 에돔은 대대로 이스라엘의 원수 노릇을 했다. 그런데 그 에돔의 남은 자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이 ‘회복된 다윗 왕국’의 기업이 된다고 아모스는 말하고 있다. 암 9: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세번 째 회복은 땅의 축복이다. 추수할 것이 많아서 추수꾼이 추수하다보니 또 다시 씨 뿌릴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에는 포도가 너무 많이 열려서 단 포도주가 흘러넘치게 된다고 선지자는 예언한다. 땅의 저주가 끝나고 축복과 부요가 온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암 9: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네번 째 회복은 포로생활이 끝나고 평화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며 사람들은 새로운 성을 건축하고 포도원과 과수원을 가꾸며 거기서 나는 열매를 따먹으며 평화를 누린다는 것이다. 암9:15,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마지막 다섯 번 째 회복은 땅을 영원히 상속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가나안 땅에 와서 다시는 거기서 뽑히는 일이 없고,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스라엘의 미래 모습은 유토피아적 환상으로 가득하다. 아모스는 새로운 다윗 왕국에서 사람들이 전쟁의 두려움 없이 평화롭게 풍성한 삶을 즐기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유토피아는 지금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꿈꾸고 있는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이들은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다. 네게브 사막을 개발하고 포도나무와 과일 나무를 심으며 포도주와 열매들을 따먹고 있다. 그러나 주변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없애버리기 원한다. 가자에서는 로케트가 날라오고, 이란도 핵무기를 개발해서 이스라엘을 쓸어버리길 원한다. 전 세계적으로 안티세미티즘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상이 왜 자신들을 미워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항상 두려움이 존재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모스가 전한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어디에도 없는 장소’일까?

우리는 구약 선지자들이 전한 예언을 이해할 때 그 예언이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났는지 궁금해 한다. 그리고 그 예언의 내용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아직 성취되지 않았고 앞으로 일어날 예언으로 간주한다. 특히 메시아 예언들은 그 내용이 워낙 이상적이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모스의 유토피아적인 예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먼저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의 예언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살펴봐야 한다.

행 15:13-14,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예루살렘에서 종교회의가 소집되었다. 안건은 이방인들의 구원문제였다. 종교회의의 의장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였다. 그는 시므온이라고 표현된 베드로의 보고를 들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심을 경험했던 사람이었다. 야고보는 그 사건을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그것이 선지자 아모스가 말한 예언의 성취라고 말했다.

행 15:15-18,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다시 세워진 것은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삼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이것이 다윗언약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역사속에서 망하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로 인해 영원할 것이라 약속된 다윗의 장막이 무너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어찌된 것일까?

눅 1:31-33절을 보자.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우리는 누가복음의 말씀을 통해 다윗의 왕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윗의 장막이 회복된다는 것은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나라가 회복된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회복되어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된다고 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메시아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방인인 우리들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언약 백성이 된 사람들은 전쟁의 두려움과 상관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는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유토피아적인 예언들이 있다. 아직 이 세상에는 없지만 그것은 결국에는 이루어질 미래의 모습이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유토피아적인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린다. 엡 2:13-18,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바울이 제시한 가장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서로 원수처럼 여기던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새 사람이 되어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는 모습이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선민의식과 그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에 대한 자부심으로 이방인에게 담을 쌓고 있다. 반면 이방인들은 반유대주의로 인해 유대인을 미워하며 담을 쌓고 있다. 바울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이 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어지는 것이다. 더 이상 이방인과 유대인 둘이 아닌, 서로 한 몸으로 화목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이 하나되어 한 분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먼 미래적인 이상만이 아니라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바울은 궁극적으로 교회가 세워진 목적은 이 이상을 성취하라고 세워진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스라엘에서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큰 특권이자 기회다.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 제시하신 회복의 환상을 실제로 이루어갈 수 있는 기회가 우리 교회에 있는 것이다. 노예해방이 이루어졌던 것은 피부색에 따라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있을 것 같지 않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는 것은 한 새사람의 비전을 외쳤던 사도 바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이 땅에 실재로 만들어 내는 힘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먼저 바라시고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전해주신 성경 속의 이상들을 이 땅의 실재로 만들라고 부름 받은 교회다. 바라기는 우리를 통해 이스라엘과 온 열방이 회복되는 일이 일어나길 원한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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