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1 계시의 창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6월 1일 설교 이익환 목사

갈라디아서 1 계시의 창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 1:11-12)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에 의하면 ‘프레임’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을 말한다. 우리는 프레임이라는 마음의 창을 통해서 보게 되는 세상만을 볼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프레임을 통해 채색되고 왜곡된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책에서 ‘핑크대왕 퍼시(Percy the Pink)’라는 동화를 소개한다. 이야기는 이렇다. 퍼시대왕은 핑크색을 좋아했다. 그가 입는 옷, 먹는 음식도 온통 핑크색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성 밖에 핑크가 아닌 다른 수많은 색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핑크대왕은 백성들의 모든 소유물을 핑크색으로 바꾸는 법을 제정한다. 또한 그 나라의 모든 나무와 풀과 꽃, 동물까지도 핑크색으로 염색하도록 명령한다. 자, 군대가 동원되어 세상을 온통 핑크로 염색한다. 갓 태어난 동물들도 핑크색으로 염색된다. 드디어 세상 모든 것이 핑크로 변한 듯 했다. 그러나 바꾸지 못한 곳이 있었다. 하늘이었다. 왕의 권세로도 하늘을 핑크색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스승을 찾아간다. 스승은 며칠 고민 끝에 묘책을 찾아낸다. 스승은 왕에게 가서 “이미 하늘을 핑크색으로 바꿔놓았으니 준비한 안경을 끼고 하늘을 보라”고 했다. 안경알을 핑크색으로 만든 것이다. 안경을 끼고 보니 온통 핑크색이었다. 왕은 너무 행복했다. 핑크대왕은 매일 핑크 안경을 끼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백성들은 더 이상 핑크색 옷을 입지 않아도 되었고, 동물들도 핑크색으로 염색할 필요가 없었다. 핑크 안경을 낀 대왕의 눈에는 세상은 언제나 핑크였다. 어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 보인다는 이야기다. 

오늘부터 갈라디아서 강해를 시작한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화가 나서 쓴 편지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화가 났을까? 자신이 1차 전도여행을 통해 세운 교회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이방인 신자들을 유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너희들도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돼야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거야’ 그들은 핑크대왕처럼 세상을 온통 자신들의 색깔로 바꾸기 원했다. 바울은 그것을 막아야 했다. 진리는 지키지 않으면 무너진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인데, 진리를 잃으면 우리는 비진리로 인해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갈라디아서는 자유를 위한 바울의 투쟁이 담겨있는 편지다. 우리가 함께 살펴보며 비진리로 인해 잃어버렸던 자유를 되찾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갈 1:1-3,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갈라디아 여러 교회가 회람할 수 있도록 편지를 쓴다. 그는 1차 전도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들은 바울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방 선교의 첫열매들이었다. 바울은 그들이 은혜와 평강가운데 있기를 원했다. ‘은혜’가 뭘까? 은혜는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호의’를 말한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리가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다. ‘평강’은 뭘까? ‘구원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누리는 화목’을 말한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죄의 댓가는 사망이다. 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임한다. 따라서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뛰어드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아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누리게 된 것이 바로 ‘평강’인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해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늘 예배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 ‘은혜’와 ‘평강’이 있게 되기를 원한다.

갈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바울은 그리스도 대속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것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셨다. 우리 역시 우리 스스로 죄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우리는 우리를 건져내시는 구원자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어디로부터의 구원인가? 바로 ‘악한 세대’로부터의 구원이다. 세대는 헬라어로 ‘아이온(Αἰών)’이다. 로마서에서도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다. 이 세대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대적하는 요소가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에베소서에도 ‘아이온’은 ‘풍조’라는 말로 나온다. 엡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 세대는 다름 아닌 세상의 신, 사탄이 다스리는 악한 세대인 것이다. 구원이란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받아 주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대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자신의 몸을 주신 것이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악한 세대를 본받지 말고, 다 거기서 구출되기를 바란다.

갈 1:6-7,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놓치면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된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 때문에 받는 상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유대인’이라는 그들의 옛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되려면 여전히 구약의 규례들, 특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새로 믿게 된 이방인들에게도 자신들의 생각을 주입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주장이 ‘다른 복음’이라고 선언하며 그들의 영향을 받지 말라고 편지한다. 그들의 주장은 왜 잘못된 것인가? 구원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기에 잘못된 복음인 것이다.

갈 1:9-10,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른 복음’의 피해는 개인의 구원뿐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무너지게 한다. 그러하기에 바울은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강경하게 말한다. ‘저주를 받다’의 헬라어는 ‘아나테마(ἀνάθεμα)’다. 아나테마는 하나님의 금지명령을 어겼을 때 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다. 아간이 하나님이 진멸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약탈한 물건을 가졌을 때, 그는 하나님의 진노로 죽게 되었다. 그것이 아나테마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대적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다른 복음’이다. 오늘날 강단에서도 ‘험한 십자가의 복음’은 좀처럼 선포되지 않는다. 대신 ‘번영과 축복’이라는 ‘값싼 은혜’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다. 문제는 성도들이 이런 ‘다른 복음’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된 너무도 인간적인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인 줄 알고 따르는 교회들이 너무도 많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음을 따르느냐, 하나님에게서 온 복음을 따르느냐 이것이 지금 한국 교회가 직면한 문제이다. 우리가 지금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아나테마에는 예외가 없다. ‘누구든지’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면 저주를 받는 것이다. 훗날에 하나님의 저주, 아나테마가 임하는 것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다른 복음’을 버리는 것이 지혜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복음과 진짜 복음을 구별해낼 수 있을까? 바울의 경우를 살펴보자. 갈 1:11-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이나 전통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계시’는 헬라어 동사 ‘아포칼립토(ἀποκαλύπτω)’에서 온 말이다. ‘덮개를 제거하다’는 뜻이다. 덮개를 벗겨야 그 안에 숨겨졌던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과거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유대주의’라는 덮개로 가려져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고백한다. 갈 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기독교를 박멸하고 세상을 유대교로 물들이기 원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덮개를 하나님이 벗겨주셨다. 갈 1:15-16,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여기서 ‘나타내신다’는 말이 ‘아포칼립토’다. 바울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유대주의라는 프레임이 씌어 있었다. 유대주의의 관점에서 예수는 나무에 달려 죽은 자, 곧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에 불과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도 그의 제자들이 시신을 감추고 만들낸 이야기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한 바울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그에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하늘로부터 빛과 함께 소리가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사울이 물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이 살아있는 인격으로 바울에게 계시되었을 때 바울은 변하게 된다. 드디어 그를 가리고 있던 수건이 벗겨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보게 된다. 더이상 종교나 전통의 프레임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평가한 것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예수님을 직접 알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계시가 필요하다. 계시를 통해 예수님을 살아있는 인격으로 만나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가 다른 복음을 쫓지 않게 된다. 바울은 당대 유대인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후 3:13-16,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지금도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수건이 그 마음을 덮고 있다. 그 수건이 그리스도를 보는 것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쫓는 교회, 종교시스템이 강화된 교회, 그리고 예수가 아닌 이 ‘세대’를 따르는 개인도 마찬가지다. 다른 것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기에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고후 4:4,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지 못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그 마음의 다른 여러가지 관심사가 마치 수건을 덮은 것처럼 그 사람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광채가 우리 삶에 비춰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신을 따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리가 비쳐지지 않는 심령은 딱딱하고 완고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의 삶에 계시의 빛이 임하길 바란다. 계시는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알리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이 예수님을 주목할 때 하나님의 진리로 인도함을 받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동안 내가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 나의 프레임을 반드시 벗어야 한다. 나의 프레임을 내려놔야 계시가 임한다. 계시가 임해야 살아계신 예수님을 인격으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는 이 세대에서 구출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에 계시의 창이 열리길 원한다. 그리하여 ‘다른 복음’을 분별해 내고,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자유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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