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 같이 먹는 밥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6월 8일 설교 이익환 목사

갈라디아서 2 같이 먹는 밥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 2:11-13)

시 한 편 나눈다. 오인태 시인의 ‘혼자 먹는 밥’이란 시다.

찬밥 한 덩어리도
뻘건 희망 한 조각씩
척척 걸쳐 뜨겁게
나눠먹던 때가 있었다

채 채워지기도 전에
짐짓 부른 체 서로 먼저
숟가락을 양보하며
남의 입에 들어가는 밥에
내 배가 불러지며
힘이 솟던 때가 있었다

밥을 같이 한다는 건
삶을 같이 한다는 것

이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누구도 삶을 같이 하려 하지 않는다

나눌 희망도, 서로
힘 돋워 함께 할 삶도 없이
단지 배만 채우기 위해
혼자 밥 먹는 세상

밥맛 없다
참, 살맛 없다

우리는 종종 ‘밥 한번 같이 먹자’는 인사를 한다. 실제 밥을 같이 하면서 시인이 표현한 것처럼 삶을 같이 하곤 한다. 가족을 식구(食口)라고도 표현한다. 같이 밥을 먹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밥 한끼를 같이 먹으면서 서로 가족이 되어간다. 초대교회에서도 식탁의 교제는 중요했다. 함께 어울려 식사하면서 서로 마음의 담을 허물고 가족이 되어 갔다. 그런데 오늘 갈라디아서 2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서둘러 자리를 뜨는 장면이 나온다. ‘나 너희들과 밥 같이 안먹어!’라는 메세지를 남기고 베드로가 자리를 뜬 것이다. 남아 있던 이방인들은 밥맛이 뚝 떨어졌을 것이다. 안디옥에서 벌어진 이 일을 ‘안디옥 사건’이라고 표현한다. 단순히 밥 한 끼를 같이 안 먹은 사건이 아니라 이것으로 인해 향후 이방인 구원문제가 달려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 사건을 아주 심각한 문제로 여기고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한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 우리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2:11-12,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게바는 베드로의 아람어식 이름이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 베드로는 안디옥 교회가 부흥하자 이곳까지 순회사역을 오게 된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어떻게 이방인이 다수인 안디옥교회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욥바에서의 환상을 통해 베드로가 유대인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편견을 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부정한 음식들, 돼지고기, 새우 같은 것을 이방인들은 너무도 맛있게 잘 먹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음식법을 명령하신 이유는 뭘까? 그것은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세상과 구별하기 원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길 원하셨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그들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당신의 존재를 알리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구별된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가셔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유대인이 실패했던 그 제사장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순종하심으로 구약의 율법을 폐하셨다. 더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구별도 필요 없게 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되어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는 새로운 시대를 여셨다.

바울은 이러한 시대 변화를 누구보다도 빠르게 파악했던 사람이다. 엡 2:14-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던 담이 예수님 안에서 허물어졌다고 선포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됨이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됨’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임을 깨달았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는 방법이 뭘까? 밥을 같이 먹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 사도인 베드로에 환상을 보여주시고 환상 속에서 본 부정한 음식을 잡아먹으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 역시 이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가게 된다. 행 10: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놀라운 변화다. 그의 인식 전환이 있었기에 유대인 제자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방세계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가 안디옥교회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방인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한번 만이 아니었다. NIV 성경은 “he used to eat with the Gentiles”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며 교제의 지경을 넓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랬던 그가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이 안디옥에 도착하자 서둘러 식사의 자리를 뜬 것이다. 갈 2: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의 행동은 파급효과가 있었다. 다른 유대인들과 바나바까지 식사교제를 중단하게 된 것이다. 환상을 통해 이미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렸던 베드로가 왜 그랬을까? 성경은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할례자들의 주장을 들어보자.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할례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뿌리깊은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들이 선천적으로 부정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할례를 통해 유대인처럼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허물었던 율법주의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막아야 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다시 율법주의의 한계에 갇힌다면 그것은 곧 복음이 유대주의 안에 갇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가차없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한다. 갈 2: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았다고 책망했다.

바울은 이어서 복음의 핵심을 제시한다. 갈 2:15-16,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신칭의’라고 한다. 칭의는 법정용어다. 칭의의 반대는 ‘정죄’인데 유죄를 선언하는 것이다. 반면 칭의는 죄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대신 죄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무죄 선언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다. 따라서 이 칭의 교리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모든 차별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두가 의롭다 함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율법에 젖어있던 유대인들이 이 이신칭의 교리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구원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자신들을 위한 것으로만 이해해왔다. 그들에게 메시아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자였다. 따라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장한 자들도 그 구원은 유대인에게 해당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자신들에게 익숙한 음식법과 할례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갈 2:18-19,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바울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담을 허무셨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헐어버리신 기준을 다시 세우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파괴하는 행위임을 알았다. 이런 맥락에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의 식사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명백히 하나님이 허무신 담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할례와 음식법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 밖에 있는 자들’이라는 암묵적인 메시지였던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한다. 갈 2:20-2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베드로가 외식했던 것은 그의 율법주의가 십자가에 다 못박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까먹은 결과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은 채 여전히 옛 자아의 기준과 편견으로 다른 사람을 차별한 결과이다.

우리 안에 이 베드로의 연약함이 있지 않은지 돌아본다. 나의 기준과 오래된 편견 때문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같이 밥 먹기를 꺼려하는 마음이 내게 있지 않은지 돌아본다. 안디옥교회는 다민족, 다문화 공동체였다. 복음이 이미 유대민족과 유대교라는 경계를 넘어선 교회였다. 그것은 성령께서 주도해가신 역사였다. 우리 욥바교회도 다민족, 다문화 공동체다. 나는 이것이 성령께서 주도해가시는 역사라고 믿는다. 이제 오늘 저녁 오순절이 시작된다. 오순절 성령이 오심으로 교회가 탄생했다. 이 땅의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민족과 언어의 경계를 넘어 서로 주 안에서 하나되어 하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역사를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 삶속에서도 이 경계를 넘는 성령의 역사가 진행되기를 소원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기준과 편견을 십자가에 못박고 믿음 안에서 하나됨을 힘쓰는 삶이 되길 소원한다. 혼자 밥먹는게 익숙해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같이 먹는 밥을 통해 하나님나라 지경이 더욱 확장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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