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8 진짜 나로 살기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12월 14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8 진짜 나로 살기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 32:27-28)

어제 이스라엘 유도 전국대회가 있었다. 유창이도 참가했다. 원래 설교준비하는 시간이라 갈 계획이 없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 갑자기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서 사진이라도 찍어주고 싶었다. 도착하니 이미 많은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드디어 유창이의 시합이 시작되었다. 대등한 경기가 펼쳐졌다. 당연히 이기기를 바랬고, 그래도 한 경기는 이길 줄 알았다. 그런데 막판에 상대 선수의 암바기술에 걸렸다. 1라운드에 탈락하고 말았다. 나중에 보니 상대는 유창이보다 세 단계 높은 갈색띠의 선수였다. 갈색 띠를 따기까지 그 선수가 흘린 땀이 훨씬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도 그랬지만, 우리 자녀들도 평생 힘겨운 씨름을 하면서 살게 된다. 그러한 씨름을 통해 우리나 우리 자녀들이 보람있는 삶을 찾게 되길 바란다. 그러나 힘겨운 씨름만 지속될 뿐 삶의 보람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야곱의 삶이 그랬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쌍둥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 악착같이 남을 속여서라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던 목적을 달성해도 힘겨운 씨름은 끝나지 않았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와도 씨름을 하게 된다. 그의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씨름이었다. 오늘 이 시합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경쟁과 싸움이 끝이지 않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왜 그렇게 힘든 싸움을 해야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창 32: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다시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야곱은 불안했다. 분노하며 자신을 죽이려는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형 에서가 아직도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야곱은 에서에게 전령을 보낸다. 그들은 다녀와서 보고한다. “에서가 사백명을 거스리고 주인을 만나러 오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나 기도가 끝나도 그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형의 분노를 풀기 위해 예물을 먼저 보낼 계획을 세운다. 총 550마리의 가축을 몇 떼로 나누어 보내도록 종들에게 조치한다. 그러나 그래도 불안했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밤중에 일어나 그는 가족들을 먼저 얍복강 건너편으로 보낸다. 그리고 그는 홀로 얍복강 이 편에 남았다. 가족들을 총알받이로 먼저 보낸 것이다. 인간적인 꼼수를 다 쓰고 나서 그의 불안은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불안한 상황이 오면 그 사람 존재의 본 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평생 악착같이 남을 속이면서라도 자신의 목적을 쟁취해왔던 야곱이었다. 그는 야곱의 모습으로 그곳에 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에 개입하신다.

창 32:24-25,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그곳에 나타나 야곱과 씨름을 벌인다. 그 씨름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을 때 야곱은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 순간 어쩌면 자신이 살아왔던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야곱은 평생 씨름하며 살았던 자였다. 그는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형 에서와 씨름했다. 그는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기 위해 눈이 잘 안보이는 아버지 이삭과 씨름했다. 그는 자신의 몫을 되찾기 위해, 자신을 이용해먹은 외삼촌 라반과 씨름했다. 그는 두 아내 사이에서 그들의 질투심과 씨름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가 평생 씨름해온 것은 그 자신과의 씨름이었는지 모른다. 형 에서를 편애하는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그는 씨름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예정으로 이끌려는 엄마 때문에 그는 지금껏 도망자로 살아야했었다. 그는 그런 삶을 이제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음에도 그는 더욱 악착같이 매달렸다. 창 32: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때 천사는 야곱에게 묻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냐’라는 질문이다. 야곱은 그 질문에 “야곱이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천사는 왜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질문했을까? 그것은 야곱을 직면하기 위해서다. 아버지 이삭은 야곱에게 같은 질문을 했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아버지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간다. 그 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이삭은 야곱에게 질문한다.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이 때 야곱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맏아들 에서는 사냥을 잘하는 들의 사람이었다. 반면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집에 있기 좋아하는 집돌이였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를 편애했다. 반면 야곱은 장막에 머물기를 좋아했기에 엄마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했다. 야곱은 아버지의 사랑과 축복을 받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숨겨야 했다. 에서의 옷을 입고 거짓 자아로 아버지 앞에 섰던 것이다.

야곱은 에서로 변장하고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을 이삭으로부터 받아낸다. 그 축복의 내용을 보자. 창 27:28-29,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풍성한 소유를 얻게 된다는 것과 만민이 너를 섬기며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된다는 것이 축복의 내용이다. 한마디로 ‘부와 권력’에 대한 축복이다. 이 축복대로 그는 부를 쌓고, 종들을 거느리는 권력자가 된다. 그런데 20년 후 야곱은 에서를 만나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창 33:10-11,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מנחתי, my gift)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ברכתי, my blessing)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야곱은 에서에게 ‘예물(my gift)’을 주면서 ‘내가 받은 축복(my blessing)’을 받으라고 바꿔 말하고 있다. 그는 그가 받은 부의 축복을 에서에게 되돌려주고 있다. 550마리의 가축을 에서에게 되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에서에게 자신을 ‘종(עבדו, his servant)’이라고 칭하고, 에서를 ‘주(אדני, my lord)’라고 부른다. 야곱은 그가 취한 권력도 에서에게로 되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어차피 아버지 이삭이 했던 축복은 에서에게 돌아갈 몫의 축복이었다는 것이다.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는 것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의 데스티니였던 것이다. 따라서 에서에게 돌아갈 이 축복을 받기 위해 야곱은 에서로 변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거짓 자아의 옷을 입고 살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지 이삭은 형을 피해 떠나는 야곱에게 또 다른 축복의 기도를 해주었다. 창 28:3-4,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자녀와 땅에 관한 축복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어갈 운명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었던 것이다. 그가 받게 될 축복은 ‘부와 권력’에 대한 것이 아니라 ‘후손과 땅’에 관한 것이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속이는 자, 발꿈치를 붙잡은 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그는 “야곱이니이다”라고 답한다. 악착같이 남을 속이며, 거짓 자아의 옷을 입고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말한다. 창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하나님이 새이름을 주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새로운 정체성과 사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이스라(ישר)’와 ‘엘(אל)’이 결합된 말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그의 데스티니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부과 권력을 소유해야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확신할 때 이기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우리의 내일을 불안해 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편법과 속임을 쓰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남의 운명을 부러워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거짓 자아의 옷을 벗고 진짜 나로 살게 된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에서의 축복을 구한다.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원한다. 그래서 자신을 숨기고, 에서의 옷을 입고 에서처럼 말하려 한다. 내 모습 그대로 보여주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까봐 불안해 한다. 부와 권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내일이 불안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행복하기 위해 남에게 허락된 운명을 자신의 데스티니로 정하고, 자신을 채찍질 하며 정신없이 살아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데스티니대로 살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도 계속 불안하며,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야곱은 그가 씨름했던 곳을 ‘브니엘’이라고 부른다. 그곳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난 곳이었다.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한 야곱은 이제 더이상 부와 권력이라는 에서의 축복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에겐 그만의 데스티니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데스티니를 완성하는 것은 한 가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그의 믿음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특하게 예비하신 데스티니를 발견해야만 한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이 그들에 맞게 예비하신 데스티니가 있다. 우리는 기도하며 우리 자녀들이 그것을 잘 찾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 데스티니를 찾지 못한다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힘겨운 씨름을 계속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삭은 아버지로서 부족함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자녀들의 운명에 걸맞는 축복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처럼 자녀를 축복하는 사람이다. 안타까운 것은 부모에게 받은 상처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거짓 자아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축복을 축복으로 받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얍복강은 야곱에게 있어 자신의 삶의 전환점이 된 곳이다. 우리에게도 혼자 우리 자신의 삶을 되짚어볼 수 있는 얍복강이 필요하다. ‘나는 지금껏 무엇때문에 씨름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껏 다른 사람의 기대나 내가 설정한 목표 때문에 거짓 자아의 옷을 입고 살아오진 않았는가?’ 바라기는 하나님과 그 문제를 가지고 씨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결국 하나님을 대면하여 나의 데스티니를 발견하는 브니엘의 새아침을 맞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진짜 나로 사는 삶이 여러분에게 열리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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