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34 비느하스의 창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7월 4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4 비느하스의 창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민 25:6-8)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이 4개월 정도 남은 상황이다. 드디어 40년 광야 생활의 끝이 보인다. 마라톤으로 치자면 42.195km 가운데 약 300m만 남겨 놓은 상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 진을 친다.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이다. 그러나 강을 건너기까지 아직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모압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 이만 사천명이 죽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들 중에는 가나안 진입이 허락되었던 광야 2세대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왜 가나안 진입을 코 앞에 두고 죽어야 했을까? 그것은 그들을 해하려고 친 원수의 덫에 걸렸기 때문이다.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신앙 경주는 포기될 수 없다. 반드시 완주해야만 천국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원수는 우리의 경주를 방해하기 위해 덫을 놓는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졌던 덫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덫에 걸리지 않는 인생, 신앙 완주를 위한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덫을 놓으려 계획하는 사람이 나온다. 모압왕 발락이다. 민 22:2-3,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음으로 말미암아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더라” 모압왕 발락은 심히 두려워한다. 자기 주변의 나라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무참히 깨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모압평지에 진을 치기 전 이스라엘은 아모리왕 시혼을 패배시킨다. 바산왕 옥도 물리친다. 이스라엘을 상대할 나라가 없음을 모압왕은 알았다. 그는 고민 끝에 미디안 장로들을 찾아간다. 그들의 결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의 덫을 놓는 것이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최고의 점술가가 있었다. 발람이라는 사람이다. 그가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것으로 유명한 점술가였다. 모압왕 발락은 그를 불러오기로 결정한다.

자, 발람을 불러오기 위해 모압의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많은 복채를 가지고 떠난다. 그러나 이 저주를 막기 위해 하나님은 직접 나서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일하신다. 하나님은 꿈에 발람에게 말씀하신다. 민 22:12,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때문에 발람은 장로들을 돌려보낸다. 그러자 모압왕은 더 높은 고관들을 보낸다. 이에 발람이 말한다. 민 22:18,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상당히 신앙적인 말처럼 들린다.그러나 그가 했던 말,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이라는 표현은 이미 돈에 대한 그의 환상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는 이미 복채에 사로잡혔고, 결국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이런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가 아니라 복주기 원하신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발람은 물론 발락이나 다른 신하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문제는 그들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복신앙의 문제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하나님을 단지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순복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목적이 너무도 소중하여 복만 구하는 기복신앙을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모압왕 발락은 아침 일찍 발람을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른다. 거기서 이스라엘의 진영이 다 보였다. 이곳에서 발람은 이제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 때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그 결과 발람의 저주는 축복으로 바뀌어 선포된다. 발락은 장소를 두번 더 옮긴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발락이 놓은 저주의 덫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나고 만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사람은 저주로 건드릴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저주도 축복으로 바꿔 놓으신다. 그것이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다.

민 24:25, “발람이 일어나 자기 곳으로 돌아가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더라” 이스라엘은 승승장구했다. 발락이 놓은 저주의 덫도 이스라엘의 행진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때가 위험한 때다. 사탄이 노리기 쉬운 때다. 발람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철수했을까? 아니다. 그는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어뜨릴 실제적인 제안을 하고 돌아간다. 그 사실은 이 사건이 끝난 후인 민수기 31장에 기록되어 있다. 민 31: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발람의 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음행이라는 덫을 놓는 것이었다. 즉, 모압의 여자들을 풀어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덫에 걸려들고 만다. 이것은 하나님이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 모든 결과를 볼 때 발람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발람은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는 꾀를 낸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서도 복채를 받은 만큼 맘몬 앞에 절하고 만 것이었다.

민 25:1-3,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여기서 ‘음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자나(זנה)’라는 동사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성행위가 아니라 이방신과 관련된 음행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계시록에서도 이 음행의 성격을 말한다. 계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 행음은 결국 바알숭배와 하나님에 대한 배교까지 연결되는 것이었다.

바알브올에게 가담했다는 말은 브올지역의 바알과 연합했다는 말이다. ‘가담했다’는 단어 ‘짜마드(צמד)’는 ‘함께 멍에를 지다. 짝이 되다. 연합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의 성축제에 참여함으로 바알과 계약을 맺고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어로 ‘진노하다’는 ‘코가 뜨거워졌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 받으신 것이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은 간음한 여인처럼 그들의 남편되신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의 조치는 단호했다. 민 25:4-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 이것은 전체 백성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다.

메튜 헨리라는 주석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험상궂는 세상의 두려움에 의해서보다는 미소 짓는 세상의 매력에 의해 더 위협을 당한다.” 이스라엘이 무너진 것은 그들을 향해 미소 짓는 여자들 때문이었다. 사탄은 음란의 덫, 돈과 명예라는 덫을 놓아 그것에 걸리게 한다. 그 덫에 걸린 사람은 잠시 기쁨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후 깊은 영적인 어둠에 빠지게 된다. 음행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졌다. 그리하여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변질시켜 갔다. 하나님은 공동체에서 음행을 제거하기 위해 바알브올에 가담한 자를 죽이라는 조치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한 사건이 벌어진다. 우리가 처음 읽은 본문이다. 시므리라는 시므온 지파 지도자가 고스비라는 미디안 수령의 딸을 데리고 음행하기 위해 막사로 데리고 들어간 것이다. 음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고 있는 시국에 정말로 정신 나간 행위였다. 이것을 본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진노한다. 그는 막사로 들어가 이 두 사람을 창으로 찔러 죽인다. 그러자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서 그치게 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민 25: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 때문에 질투하셨다.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눈이 돌아가는데 질투하지 않는 남편을 보고 관대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과 언약으로 맺은 사랑을 버리고, 다른 우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우셨다. 하나님의 질투는 죄에 대한 분노였고, 그들을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거룩한 사랑이었다. 이 때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일어선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내 질투심으로 질투한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여기서 질투는 히브리어로 ‘킨아(קנאה)’인데, 성경에서는 ‘열심’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자기 백성을 향한 열정적인 사랑이 바로 여호와의 질투, 여호와의 열심인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질투하실 때 함께 질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열심을 내시는 대상을 향하여 함께 열심을 내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마음이 합해진 사람이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해진 사람은 원수의 덫에 걸리지 않는다. 모두가 덫에 걸려 들 때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을 위해 창을 들게 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평화의 언약을 맺으신다. 민 25:12-13,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비느하스가 창을 든 건 자신의 야망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 한 분을 향한 열정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 빠져가는 것을 보았을 때 비느하스 마음에는 거룩한 질투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긴밀히 연결되었기에 하나님이 느끼시는 질투를 그도 고스란히 느꼈던 것이다.

우리는 비느하스처럼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합되어야 한다. 사랑으로 연합될 때 우리는 원수의 덫에 걸리지 않는다. 사랑으로 연합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창을 들 수 있게 된다. 사랑의 연합이 먼저인 것이다. 신랑을 깊이 사랑하는 신부가 될 때, 신랑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용사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후 11:2-3,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 역시 비느하스의 심정으로 고린도교회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세운 교회의 성도들이 원수의 덫에 걸려 부패하지 않고,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신부가 되길 원했던 것이다.

자, 복채를 받고 이스라엘에게 음행의 덫을 놓았던 발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음행으로 넘어지게 한 미디안 족속에게 원수를 갚게 하신다. 그리고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일 때 발람도 칼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돈에 눈이 멀었던 발람의 최후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정한 기준들이 계속 무너지고 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성도들이 덫에 걸려 넘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맘몬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돈과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모습들이 보인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으로 우리의 구원을 안심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창을 들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한다. 그래야 덫에 걸리는 인생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질투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다른 것에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는 사람이다. 오직 하나님만 갈망하는 사람이다. 우리 마음은 결코 진공 상태가 아니다. 반드시 뭔가로 채워져 있게 된다. 내 안에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내가 하나님과 연합된 것이 아니라 다른 우상과 연합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탄은 지금도 돈과 성공, 음란과 쾌락이라는 덫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이 덫에 걸리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그저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자로 전락하고 만다. 모두가 망하는 길이 대세가 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비느하스의 열심을 구해야 한다. 내 야망, 내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품는 인생이 되길 구해야 한다. 신앙의 최종 목표는 형통한 삶이 아니다. 복을 많이 받는 것도,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온전히 연합되어 하나님을 위해 창을 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덫에 걸려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생이 아니라 천국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경주를 완주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이 느끼시는 질투를 나도 느끼며, 하나님을 위해 분연히 창을 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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