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행전 1 가자

성지행전1 가자: 예배를 회복하라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2] 가사 사람들에게 삼손이 왔다고 알려지매 그들이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3] 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밤중에 일어나 문짝들과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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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 땅에는 고대로부터 많은 전쟁이 있었다.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가자도 성경에 나오는 성경의 땅이다. 이 땅은 한글 성경에는 ‘가사’라고 나와 있고, 히브리말로는 ‘아자’로 불린다. 지금 전세계 사람들이 이 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주목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이 전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오늘은 우리가  과거 이 지역에서 어떠한 전쟁이 벌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과거의 역사가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가자는 블레셋 사람들이 세운 도시국가 중 하나였다. 에그론, 아스돗, 아스글론, 가자, 가드가 블레셋의 도시국가들이었다. 블레셋(Philistines)은 어디서  온 사람들일까?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지금의 키프로스(갑돌)에 살던 해양민족이었다. 그들은 B.C 1190년 애굽의 라암셋 3세에게 패배하여 이스라엘의 해안 평야에 정착하게 된다. 성경도 이 사실을 기록한다.

2:23, “또 갑돌에서 나온 갑돌 사람이 가사까지 촌에 거주하는 아위 사람을 멸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거기에 거주하였느니라” 9: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아모스 선지자의 표현에 의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움직인 것이다. 에게해의 한 섬에서 나와 이스라엘 해안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B.C. 1095년경부터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가장 강력한 대적이 된다. 이것이 바로 사사시대 삼손이 등장하는 배경이 된다.

13:1,5,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5]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성경은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일으키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블레셋의 압제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삼손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신다.

삼손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라는 정체성을 태어나면서 갖게 된다. 나실인으로 서약한 사람이 지켜야 할 것이 있다. 포도나무 소산 및 독주를 금해야 했다. 머리를 깎아서도 안되었고, 시체를 가까이 해서 몸을 더럽혀서도 안되었다. 그는 구별된 몸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 몸을 거룩히 구별해야 했다.

그러나 삼손은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한다. 딤나에 있던 블레셋 여자를 보고 아내로 삼는다. 여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사자를 죽이고 그 시체에서 생긴 꿀을 먹으면서 나실인의 서약을 지키지 못한다. 결혼 잔치에서 친구들에게 수수께끼를 냈는데 아내의 재촉으로 답을 말해줬고, 그 결과 내기에서 진다. 그는 홧김에 블레셋 사람 30명을 쳐죽인다. 그 후 삼손과 블레셋 사이에 피의 보복전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싸움의 핵심은 삼손이 나실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지켰는가 아닌가에 따라 그 승패가 결정된다. 그는 이방 여자와 구별되지 않는 관계를 갖는다. 가사의 기생과 관계하고 들릴라와도 관계한다. 이상하게도 그는 블레셋 여자들에게만 마음이 꽂혔다. 그 여자들 뒤로는 자기를 죽이려는 블레셋 사람들이 있음을 알았을텐데도 그는 이 위험스런 만남을 계속한다. 하루는 그가 들릴라가 하도 독촉하니까 자기의 비밀을 말해준다. 자신의 힘의 근원이 머리카락에 있음을 알려준 것이다. 들릴라가 기회를 잡는다. ‘삼손, 내 무릎을 베고 자’  삼손은 그녀의 무릎 위에서 잠들고 그의 머리카락은 싹뚝 베인다. 그리고 힘이 없어진다.  블레셋사람들이 그를 잡으려고 들이닥쳤을 때 그는 힘도 못 쓰고 붙잡힌다. 성경은 그가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한다. 그는 두 눈이 뽑히고 놋 줄에 매여 맷돌을 가는 신세가 된다. 그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호소한다. 그리고 다곤 신전 기둥을 무너뜨리며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게 된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지 못한 채 그의 삶은 끝난 것이다.

삼손이 죽고 난 뒤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다. 아벡골짜기에서 이스라엘 군대 4000명을 죽인다. 이스라엘은 다급해졌다. 그래서 실로에 있는 법궤를 전투현장에 가져오기로 결정한다. 법궤가 뭔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다. 이 법궤를 가져오면 그것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법궤의 등장은 오히려 블레셋 군인들의 전의를 불태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는 이 아벡골짜기 전투에서 3만명을 잃게 된다. 법궤는 빼앗기고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는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엘리도 놀라서 죽는다. 이스라엘은 충격에 빠진다. 이 위기 상황에서 선지자 사무엘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을 얻는 해법을 제시한다.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그렇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이스라엘의 위기는 그들의 대적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 내부에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그 마음이 하나님에서 떠나 우상에게로 향할 때 그들은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대적을 만나는 것이었다. 사무엘은 당시 위기의 본질을 알았다. 그래서 백성들을 미스바로 소집하여 대각성 집회를 한다.

삼상 7:5-6, “사무엘이 이르되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이 미스바는 블레셋 수비대가 있던 게바와 가까운 곳이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좀 간이 부어 오를 때가 있다. 현실적으로 위험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온 백성이 모여 기도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이 소식을 안 블레셋 군대가 치러 올라온다. 당황한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간청한다.

삼상 7:7-8,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8]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그 다음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까? 삼상 7:9-10절을 보자. “사무엘이 먹는 어린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스라엘은 손 하나 까닥 안 하고 승리를 경험한 것이다. 사무엘은 응답하신 하나님께 돌을 세우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라는 의미로 에벤에젤이라 불렀다.

삼상 7:13-14,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1095년에 시작된 블레셋의 압제는 40년 만인 1055년에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블레셋과의 악연을 좀더 살펴보겠다. 미스바의 승리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구한다. 아벡 전투에서 너무 많은 인명 피해를 당했기에 왕을 통해 보다 강력한 국가를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된다. 왕이된 사울의 첫번 째 과제는 여전히 산지에 주둔하고 있던 블레셋 수비대를 해안 평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들 요나단과 함께 이 일을 진행한다.

삼상 13:3-4,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4] 이스라엘이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를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함을 듣고 백성이 길갈로 모여 사울을 따르니라”

사울이 요나단을 통해 블레셋 수비대를 친 것이 블레셋을 자극했다. 그래서 블레셋은 대군을 이끌고 내륙으로 올라온다.

삼상 13:5,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치매”

대군이 몰려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 떨게 된다. 사울은 미스바의 승리를 기억하며 전쟁에 앞서 번제를 드리기 원했다. 그러나 일주일을 기다려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백성들이 사울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사울은 제사장만 드릴 수 있는 번제를 자신이 임의로 드린다. 그가 드린 제사는 온전한 제사가 아니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전심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상황에 쫒겨 제사를 부적처럼 사용한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예배에 실패했다. 이것은 왕으로서 그의 운명을 좌우한 실수였다. 제사가 끝나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했다. 그는 사울에게 말한다.

삼상 13:13-14,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누구였나? 다윗이다. 그는 이후 계속되는 블레셋과의 대치 상황에서 골리앗을 향하여 이렇게 외친다.

삼상 17:45,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은 예배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여 당당히 전장에 나선 것이다. 

그 후 이스라엘은 길보아산에서 블레셋과 2차 전면전을 치른다. 사울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블레셋 군사는 사울왕의 시체를 찾아 머리를 베고 그 몸은 벳산 성벽에 못 박아 매단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죽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국가로서 절망적인 순간을 맞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다윗이 있었다.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힘을 키운 다윗은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다윗왕국의 수도로 삼는다. 이 소식을 듣고 블레셋이 놀란다.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자신들 앞에서 미친 척 하던 다윗이었다. 한 때 자신들 밑에 있었기 때문에 헤브론에 있을 때만 해도 별반 염려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다윗이 너무도 커져버린 것이다. 블레셋은 이런 다윗을 제거하기 원했다.

삼하 5:17-18,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찾으러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새로 나가니라 [18]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다윗은 상황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오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삼하 5:19,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다윗은 기도하고 움직였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삼하 5:20,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그들을 치고 다윗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앞에서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부르니라”

이 후 블레셋은 정말 흩어져 버린다. 그리고 솔로몬 시대 이후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여기까지가 성경에 나오는 블레셋과의 전쟁 역사다. 

블레셋 족속은 사라졌지만 지금 가자지구에는 팔레스타인사람들이 산다. 이들은 물론 해양민족이었던 블레셋 사람들과는 혈통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이란 말이 언제 다시 등장한 것일까? 기원 후 132년 유대인들은 바르코흐바를 중심으로 로마제국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는 이 반란을 진압하고 유대라는 이름을 로마제국의 지도에서 지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숙적 블레셋의 이름을 따서 이 지역 이름을 팔레스티나로 바꾼다. 반란을 일으킨 유대민족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의도였다. 그 후로 이 땅은 팔레스티나라고 불리워진 것이다.

성경 역사 속에서 분명했던 사실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정체성을 떠나 거룩함을 잃어버렸을 때 블레셋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들이 온전한 예배를 놓쳤을 때 블레셋이 일어섰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프란시스 쉐퍼는 오늘날 미국교회는 성도들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거룩함을 버렸기 때문에 교회가운데 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 교회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교회와 성도의 위기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오는 것이다. 예배를 놓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할 때 대적 블레셋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온전한 예배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설 때 블레셋은 흩어지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는 이러한 영적 함수관계가 있어 왔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가자지구 문제의 본질은 영적인 것이다. 단지 영토와 인권에 관한 것이 분쟁의 본질이 아닌 것이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멸절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그것은 이슬람 근본주이자들의 신념이다. 이들은 이슬람이 한번 지배한 나라는 영원토록 이슬람 나라로 본다. 만일 그 나라가 이슬람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것은 알라가 쇠퇴한 것이 된다. 그렇기에 그들은 반드시 그 나라를 이슬람 국가로 회복해야 한다. 이스라엘 땅도 역사상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기에 그들은 알라의 영광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반드시 수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슬로건이 있다. 오늘은 토요일의 족속을 죽이고, 내일은 일요일의 족속을 죽인다.” 것이다.  이것은 첫째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다음으로 기독교를 믿는 모든 나라에 이슬람 지배국가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목적을 위해 지하드도 불사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알라를 위해 하는 모든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 된다. 꾸란에는 그들이 지하드를 하다 죽으면 그 즉시 천국에 들어 간다고 한다. 거기서 일흔 명의 처녀에게 영접을 받으며 마시고 싶은 모든 술을 마실 수 있다고 한다. 이슬람 교리에 충실할수록 자살 폭탄 테러가 가능한 것이다.

무함마드는 최후의 심판이 올 때까지 무슬림들은 단 한 명의 유대인을 남겨 놓고 모든 유대인을 다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한 명의 유대인은 바위 뒤에 숨을 것이고 그 바위는 유대인이 이 뒤에 숨어있다고 무슬림들에게 알려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믿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목표는 이스라엘을 멸절하는 것이다. 이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그들은 끝나지 않는 전쟁을 할 것이다. 평화협상을 백날해도 이슬람 근본주의세력은 유대인들과의 평화스러운 공존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이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게 목적이 아니다. 아라파트가 1991년 마드리드에서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었을 때 그들은 이런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가 평화 협정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 신앙의 최고 의무인 지하드를 수행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협정을 받아들일 없다. 그리고 꾸란에 유대인은 최후의 심판 날까지 우리의 최대의 적이고 우리는 그들을 게속해서 증오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유대인에 대한 적의를 거두어들일 없다.”

오늘날 가자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이다. 자살 폭탄테러도 거룩한 전쟁으로 여기는 무슬림이 있는 한 이 땅에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가자는 성경에 나오는 성경의 땅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여자를 미끼로 매복하여 있다가 삼손을 죽이려 했던 곳이다. 지금 가자는 힘없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만 사는 곳이 아니다. 아이들과 시민들을 미끼로  지하터널에 매복하여 있다가 이스라엘을 멸절하기 원하는 이슬람 무장 세력들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하루 속히 끝나고 무고한 희생이 더 이상 없기를 기도한다. 교회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과 언약관계 있는 백성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언약백성으로서의 신분과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스라엘이 삼손처럼 자신의 힘만 과신하면 안 될 것이다. 우리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놓쳐선 안된다. 세속화를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백성답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땅의 사람들이 참으로 예배하는 백성이 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4: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 말씀에 사마리아 여인이 반응한다. 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그 때 다시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4:26,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사마리아 여인은 그 분이 메시야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목마르고 목말랐던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알 때 생수가 터지는 삶이 되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를 참으로 예배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지금 악착같이 살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그들이 하늘 아버지를 제대로 예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알 때, 그래서 온 국민이 하늘 아버지를 진정으로 예배하는 백성이 될 때 그들은 온 열방을 섬기는 참된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다. 그 때서야 이 땅에 전쟁은 그치고 샬롬이 오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없이 그저 이 땅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오길 바라는 것은 순진한 바램이다.

바라기는 이 땅에서 온전한 예배가 회복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이 땅에 있는 우리가 더욱 깨어 기도하고, 이 땅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또는 함께 더욱 더 예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한다.

 

텔아비브욥바교회 샤밧설교 20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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