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37 사랑은 두려움을 이긴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7월 25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7 사랑은 두려움을 이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신 1:29-31)

현대 호스피스 사역에 큰 영향을 미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돌보면서 그들이 끝까지 포기 못하는 두 가지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다른 감정들은 죽음이 가까워오면 점점 약해지거나 사라졌지만 이 두가지 감정만큼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뭘까? 바로 사랑과 두려움이다. 그녀는 이 사랑과 두려움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삶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라고 보았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감정에 이끌려 살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넘어서지 못해서 아픔을 겪었던 유대 민족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의 실패를 돌아보며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신 1:19,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 산을 떠나 너희가 보았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산지 길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것은 출애굽하고 2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을 떠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왔다. 광야를 두려움으로 맞이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까지 별 큰 문제없이 오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제 그들에게 ‘올라 가서 가나안을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진격했다면 그들은 광야 생활을 2년 만에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정탐꾼을 보내자고 모세에게 요청한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을 정탐한 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거기서 거인 아낙자손을 보았기 때문이다. 거인을 보고 쫄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들이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두려움은 인간이 느끼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 중의 하나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다면 위험한 순간을 피하려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두려움이란 감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당하지 않아도 될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순간에 조차 두려움에 사로잡혀 꼼짝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탄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이용해 우리를 속인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그랬다. 뱀이 하와에게 접근했을 때 하와가 말한다.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와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외감이 있었다. 그 경외감은 건강한 두려움이었다. 경외감은 하나님 한 분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 갖게 되는 감정이다. 이에 뱀이 응수한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뱀은 하와에게 있었던 경외감을 약화시킨다. 그리고 거짓말을 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심는다.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하와의 마음속에 심는다. 그것은 거짓 감정이었다. 하와의 마음에는 경외감 대신 거짓 두려움이 자리잡게 된다. 그 두려움의 결과 하와는 선악과를 선택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고 사탄이 주는 거짓 두려움에 휘둘린 결과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삶에서 ‘두려움’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라고 말한다. FEAR는 ‘False Evidence Appearing Real’의 약자 라는 것이다. 우리보다 많은 경험을 했던 사람들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이 가짜 감정에 휘둘렸다. 정탐꾼들은 거인들을 보고 왔고, 생각할수록 거인들은 실제보다 더 크고 두려운 존재로 여겨졌다. 그들은 아낙자손의 큰 손에 자신들이 죽어나가는 장면들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들의 두려움은 커졌고, 그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으로 발전했다. 모세는 그러한 그들의 태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신 1:26-27,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그들은 두려운 대상에 시선을 빼앗겨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두려움은 그동안 키워왔던 그들의 믿음을 무너뜨렸다. 하나님을 오해하게 했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이끄시는 가나안을 바라보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한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허락하신 가장 영광스런 모험을 포기하고 차라리 과거 노예시절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모세는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신 1:29-31,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미래가 불확실 할 때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위험이 예상될 때 우리는 불안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그분과 함께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그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을 나와 불확실한 미래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애굽 군대와 친히 싸우신 분이다. 광야에서 지친 자녀들을 안고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이르게 하신 아버지로 묘사된다. 그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광야에서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칠 곳을 찾으신 분이셨다. 모세는 이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했다. 이 사랑의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기에 너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여호수아와 갈렙 역시 이 사랑의 하나님을 신뢰했다.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넘어섰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민 14:9)”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함으로 두려움을 넘어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들지 못했다. 두려움이라는 가짜 감정에 휘둘려 그들의 현실을 원망과 절망으로 채웠다.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언하셨다. 민 14:22-23,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선언이 티샤 베아브, 아브월 9일에 있었다고 말한다. 티샤 베아브는 그들이 사랑의 하나님보다 두려움을 선택한 결과 맞이한 슬픈 역사의 날이다. 그들은 두려움이라는 거짓 감정에 휘둘려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함께 지나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지 못했다. 그들이 연약하고 힘들 때 그들을 안고 가신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광야에서도 장막 칠 자리를 먼저 찾아주신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도 그러하실 것이라고 믿지 못했다. 그들은 두려움을 이기는 사랑을 붙잡지 못한 것이다.

다음 주 29일 저녁이 바로 ‘티샤 베아브’이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슬픈 날이 바로 ‘티샤 베아브’다. 아브월 9일은 기원전 586년 제1성전이 파괴된 날이기도 하다. 또한 AD 70년 제2성전이 파괴된 날이다. AD 135년에는 바르 코크바 항쟁이 실패하며 10만명이 학살당한 날이다. 또한 AD 1096년에는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날이다. 그리고 AD 1492년 아브월 9일에 유대인들은 스페인에서 추방된다. 히틀러가 600만 유대인 학살을 위해 뉘른베르크법을 선포한 날도 1935년 아브월 9일이었다. 유대 민족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사건들이 모두 ‘티샤 베아브’에 일어났다.

많은 정통유대인들이 이날을 기념하며 금식한다. 이 날엔 목욕도 하지 않는다. 부부관계도 하지 않는다. 돌바닥에서 돌베게를 베고 자거나 낮은 의자나 바닥에 앉아 기도한다. 가장 낮은 자세로 겸손히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날 회당에서는 예레미야 애가를 낭독한다. 애 1:1-3,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회당에서는 평소보다 촛불을 희미하게 밝히고 모임이 끝나고서는 불을 완전히 꺼버린다. 유대 민족이 직면했던 캄캄했던, 암흑과도 같았던 날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아브월 9일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의 샤밧은 ‘샤밧 하존’이라고 불린다. ‘계시의 샤밧’이란 뜻이다. 오늘이 바로 샤밧 하존이다. 이 날 토라와 함께 읽는 하프타라 선지서 말씀이 이사야서다. 그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여기서 계시란 말이 히브리어로 ‘하존’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남유다가 멸망하기 약 54년 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을 유다 백성에게 전했다.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계시였다. 이 계시를 들을 때만해도 유다 백성들은 여전히 회개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길 거절했고 그 결과 54년 뒤 멸망이 그들에게 임하게 된 것이다.

지금 정통유대인들은 샤밧 하존을 통곡과 회개의 시간으로 보낸다. 그들은 예레미야 애가서 말씀을 읽으며 기도한다. 애 5: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 풍요의 신 바알에게 절했다. 그들은 힘없는 자들을 짓밟으면서까지 부를 쌓으며 자신들의 안전한 미래를 건축하려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들의 부르심을 잊었다. 두려움 때문에 사랑의 부르심을 포기한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시대의 우상 앞에 절한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그들을 더 안전하게 해줄 것 같은 선악과를 선택하고 만 것이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간 참혹한 결과를 맞이한 뒤에야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돌아갈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도 거인만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인생이 두려움으로 가득해질 때가 있다. 우리는 질병과 고통이 닥치지 않을까 두려워 한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두려워 한다. 청년들은 구직 때문에 두렵고, 중년들은 실직 때문에 두렵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생수업’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두려움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다른 감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감정입니다…적극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선택하지 않으면 당신은 자신 안에서 두려움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감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전에 없던 코로나 19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그 자체보다도 거기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불확실한 상황으로 우리의 인생이 흘러갈 때 두려움이란 감정이 찾아온다. 두려움은 내가 지금 눈 앞에 보고 있는 현실이 전부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믿음은 현실 너머의 미래를 바라보고 기대하게 한다.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다. 자녀를 위해 반드시 좋은 것을 예비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다른 것은 다 놓쳐도 이 믿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를 위해 우리가 생각치도 못한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우리는 크고 두려운 광야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두려움 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의 인생에서 두려움을 다 제거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두려운 곳으로 이끄실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그 두려운 상황 속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우리에겐 어떤 두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붙들어야 한다. 이 믿음이 우리의 인생을 끌고 가게 해야 한다. 두려움 자체가 없는 것이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단지 겁을 상실한 사람일 뿐이다. 정말 용기있는 사람은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방해하는 모든 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흔들림없이 믿는 사람이다. 성공과 부라는 세상의 우상으로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을 덮어 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두려움을 이기는 사람이 되야 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호소한다. 요일 4:16,18,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아담과 하와를 속였던 마귀는 지금도 두려움이라는 무기로 우리를 낙심시키려 한다. 우리의 발을 묶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선포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거짓 감정을 넘어서야 한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보다 앞서 가시는 분이다. 우리의 갈 길을 예비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다. 두려움 때문에 타협하거나, 멈춰서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기 바란다. 그리하여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나안에 이르게 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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