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40 쩨다카의 편 손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8월 15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0 쩨다카의 편 손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 15:11)

광야가 끝나는 곳에서 가나안이 펼쳐진다. 광야의 혹독한 시험을 거친 광야 2세대들은 이제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있다. 광야에서의 삶과 앞으로 펼쳐질 가나안에서의 삶,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힘들까? 물론 광야일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도 만만치 않은 곳이다. 그래서 모세는 그의 임종을 앞두고 백성들에게 당부의 말을 거듭한다. 신 8:11-14,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광야가 궁핍에서 오는 시험의 장소라면 가나안은 풍요에서 오는 시험의 장소라 할 수 있다. 풍요함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통과해야 할 시험이었다.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때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흩어져 다시 광야의 삶을 반복해야 했던 것이다. 오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셨던 가나안 땅에서의 삶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공의’라는 단어다. 신 16:20,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원어로는 쩨데크, 쩨데크(צדק צדק), 즉 ‘공의’라는 단어를 두번 반복하면서 ‘너는 그것을 뒤쫓으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랍비들은 이 말씀을 ‘너는 마땅히 구제하라’는 말씀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구제라는 단어는 없다. 탈무드 시대를 거치면서 공의라는 뜻의 ‘쩨다카(צדקה)’를 구제라는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구제가 공의의 차원에서 해야 할 유대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구제를 많이 한다. 미국 인구 2%의 유대인이 전체 기부액의 50%를 한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쩨다카를 통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쩨다카’는 구제라는 뜻으로 한정할 수 없다. 더 넓은 의미가 있다. 쩨다카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원하셨던 의로운 삶의 총체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을 이렇게 밝히신다. 창 18: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의와 공도’를 행하는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말한다. 여기서 ‘의’는 히브리어로 ‘쩨다카(צדקה)’, ‘공도’는 ‘미쉬파트(משפט)’이다. 지난 주 헤세드에 이어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두 단어라 할 수 있다.

‘쩨다카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행하는 의로운 행위를 말한다. ‘분배적 정의’라 할 수 있다. ‘미쉬파트’는 뇌물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르게 내리는 판결을 의미한다. ‘판결적 정의’라 할 수 있다. 보통 구약성경에서 공의를 말할 때 이 쩨다카와 미쉬파트라는 개념이 같이 사용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고 부르신 이유는 한마디로 쩨다카와 미쉬파트를 행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복을 받는 비결이었고, 천하만민 역시 그들이 행하고 받는 복을 통해 하나님께 나오는 통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대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사회 안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정의와 공의의 모습이 사라졌음을 탄식한다.사 5: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사야는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극상품 포도나무인 이스라엘 족속을 심으셨다고 비유했다. 그런데 거기서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랬건만 먹지 못하는 들포도만 맺었다고 탄식한다. 하나님은 그런 백성을 더이상 복주실 수 없으셨다.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 말은 원어로 보면 더 그 의미가 다가온다. 그들에게 ‘미쉬파트(משפט)’를 바라셨는데 도리어 ‘미쉬파흐(משפח)’였다. 즉 ‘정의’ 대신 ‘포학과 피흘림’을 보았다는 말이다. 그들에게 ‘쩨다카(צדקה)’를 바라셨는데 도리어 ‘쩨아카(צעקה)’였다. 즉 ‘공의’ 대신 ‘부르짖음과 절규’를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강같이 흐르는 세상을 만들기 원하셨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이 고스란히 담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가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이신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복이 어떠한 것인지 세상에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다. 신 15:4-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가난한 자가 없는 사회는 모든 통치자들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매 칠년마다 모든 빚을 면제하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신 15:1-2,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매 칠년마다 빚의 면제가 시행된다면 어떻게 될까? 가난의 대물림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로 하면 실직, 파산, 부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면제년의 규례는 빚을 진 자들에게는 복음이었지만 채권자들에게는 부담스런 규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면제년의 규례를 지키는 자들에게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신 15: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여러분이 채주라면 면제년이 돌아올 때마다 모든 빚을 기꺼이 면제해 줄 수 있겠는가?

‘매 칠년마다 모든 빚을 면제하라’는 것은 세상의 논리로는 있을 수 없는 경제 원리다. 그러나 ‘너희가 믿음으로 이것을 따르면 내가 복을 주고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게 하겠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경제 원리였다.

‘너희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손을 펴면 나도 너희에게 손을 펴겠다. 그리하여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복을 주겠다’ 이처럼 미쉬파트와 쩨다카를 행하기 위해 아낌없이 손을 펴는 자에게 나도 축복의 손을 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경제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미쉬파트와 쩨다카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풍요와 번영을 약속하는 바알을 따라갔다. 나눔보다는 부의 축적을 위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망각한 삶이다. 내가 가진 모든 소유가 나의 것이라고 착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삶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해 부를 쌓는 삶의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뇌물을 받으며 판결을 굽게 했다. 판결적 정의, 미쉬파트를 행하지 않은 것이다. 부자와 고관들은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고 자기 배만 불렸다. 분배적 정의, 쩨다카를 행하지 않은 것이다. 피흘림과 억울한 부르짖음이 가나안 땅에 점점 쌓여갔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고 만다. 한마디로 미쉬파트와 쩨다카라는 그들의 소명을 놓쳤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올바른 판결인 미쉬파트가 사라지고, 공의로운 나눔인 쩨다카가 사라진다는 것은 멸망의 전조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정글과 같은 시장 경쟁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위기감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다. 이러한 시대에는 남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우선 나와 내 가족이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다. 여기에 교회의 위기가 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이 절박한 생존경쟁 때문에 뒷전으로 밀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좀더 벌고, 안정되고 난 그 다음에 신앙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위기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엿새 일하고 하루 안식하는 것이다. 내가 거둔 소득의 십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물질만능주의에 빠지지 않고, 내가 가진 풍요를 나보다 더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이다. 물질만능주의시대에 위험한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신앙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돈을 추구할수록 우리는 상대적인 궁핍을 느끼며, 더 물질에 매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가난과 돈 걱정이 없는 세상에 살고 싶어 한다. 사회주의를 하면 가난이 없어질까?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가난이 사라질까?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가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 같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신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이 구절에 의하면 가난의 문제는 어느 시대나 그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다. 국가 권력을 전복하거나, 탐욕적인 자본가들을 징계하는 것으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고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가난한 자가 없는 좋은 사회는 결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장(market)이나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대가 어떠하든, 사회 체제가 어떠하든, 우리 각자의 도덕적 선택과 실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겠으니 너는 네 손을 펼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6:25, 33,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그의 의’는 바로 올바른 판결인 ‘미쉬파트’와 이웃을 위해 내 것을 나누는 ‘쩨다카’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할 때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미쉬파트와 쩨다카를 행할 때 모든 것을 더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경제 원리인 것이다. 우리가 이웃을 향해 쩨다카의 손을 펼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축복의 손을 펴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맛보며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딤전 6:17-19,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을 방해한다. 재물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지금 선을 행하고 나누어주는 삶을 살기 힘들다. 맘몬에 지배될 때 우리는 쩨다카를 위해 손을 펴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손을 펴지 못하면 하나님도 축복의 손을 펴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의 손을 펼쳐 선한 사업을 하며 나눠주기를 좋아하다면 우리의 삶에서 맘몬의 권세는 떠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가져도 가져도 부족한 삶이 아니라 풍성한 나눔과 하나님의 채우심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쩨다카의 편 손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쩨다카(צדקה)는 그림언어다. 짜딕(צ)은 낚시바늘의 모습이다. 사자가 먹잇감을 잡으려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포획하다, 물고기를 잡다’라는 뜻이 있다. 달렛(ד)은 ‘문’이다. 카프(ק)는 머리의 뒤를 표현한 것이다. ‘마지막에 오는 사람, 가장 작은 자’를 뜻한다. 헤(ה)는 ‘열린 창’을 상징한다. ‘보여준다’는 의미다. 그리하여 쩨다카는 ‘문을 열어 가장 작은 자에게 하나님나라를 보여주기 위해 웅크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우리 가까이에 있는 이웃들에게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이 되길 원한다. 우리이웃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관대한 마음으로 손을 펼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이 땅에 끌어오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소유를 나눠주는 복된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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