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41 거룩한 전쟁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8월 22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1 거룩한 전쟁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신 20:1)

광야가 끝나고 가나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이제 힘든 여정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진짜 전쟁은 가나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가나안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된 땅이었지만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전쟁은 하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이에 모세는 가나안 진입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전쟁의 성격이 무엇인지, 어떻게 싸워야 할 전쟁인지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인류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한 방편으로 사용하셨다. 그리고 이 전쟁은 성도인 우리들이 매일 치러야 하는 영적전쟁의 예표가 되기도 한다. 오늘은 신명기 20장에 나오는 이 전쟁의 성격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의 97%는 전쟁 기간이었고 단 3%만이 평화로운 시대였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인류의 전쟁에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물리적인 차원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영적인 차원이 있다. 성경은 인류의 역사를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의 갈등의 역사로 본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뱀의 후손은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을 말한다. 여자의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한편 요한계시록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하늘의 전쟁에 대해서 말한다. 계 12:7-9,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우리는 여기서 사탄의 세력이 최종적으로 패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사탄의 세력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전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도인 우리는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서 매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 20장에 묘사된 가나안 정복전쟁 역시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흐름 가운데 이해 해야 한다. 신 20:1,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출애굽 당시 하나님은 당대 최고의 제국인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셨다. 전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굽의 속박에서 빼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제 가나안 정복전쟁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주시기 위해 또한 필요했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분명 하나님이 허락하신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죄악으로 가득한 가나안 민족을 심판하는 수단이 되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전쟁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수행하시는 전쟁이라는 점에서 그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었다. 거룩한 전쟁은 군사력의 싸움이 아니다. 내가 강해서 정복하는 전쟁이 아닌 것이다. 나는 약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셨고 함께 하시기에 승리하는 전쟁인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적군의 군사력이 우위에 있다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신 20:2-4,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할 것이며” 거룩한 전쟁에 임할 때는 군사적 준비보다도 영적인 준비가 중요했다. 그래서 전쟁터에는 항상 제사장이 따라갔다. ‘종군 제사장’이라 할 수 있다. 탈무드에 의하면 이들은 히브리어로 ‘메쉬아흐 하밀하마’로 불리웠다. 전쟁을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이들에게는 대제사장 다음 가는 권위가 부여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전쟁터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군사들을 독려하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일을 했다. 그들은 ”쉐마 이스라엘,”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라는 말을 시작으로 군사들을 독려했다.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이 말을 들으며 하나님이 그들의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담대히 싸움에 임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사탄과 영적전쟁을 치르실 때 이 쉐마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영적전쟁에 임할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싸움의 방향이 보인다. 향방없이 공격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우리가 상대하는 적이 누군지 분명히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사탄이 천하만국의 영광을 준다해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 20:5, “책임자들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군대 징집을 연기해주는 사례들이 나온다. 먼저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못한 자이다. 낙성식은 쉐마를 기록한 종이를 메주자에 넣어 문기둥에 다는 예식이라고 한다. 새 집을 지었는데 낙성식을 하지 못하고 전쟁에 끌려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 마음이 전쟁터가 아니라 새 집에 가 있을 것이다. 새 집에 가서 낙성식을 하려고 전쟁에서 죽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신다. 두번째 징집 연기 대상자는 포도원을 만들고 그 괴실을 먹지 못한 자다. 그 역시 마음이 포도원에 가 있을 것이다. 세번째 연기 대상자는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다. 그 역시 마음이 사랑하는 약혼자에게 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세밀한 배려를 볼 수 있다. 한편 징집 연기의 또 다른 기준이 나온다. 신 20:8, “책임자들은 또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하고” 우리는 여기서 거룩한 전쟁의 기준을 알 수 있다. 거룩한 전쟁은 수의 우위로 싸우는 싸움이 아니다. 비록 수가 적더라도 전심을 다해 목숨 걸고 싸울 수 있는 사람만 참여하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영적전쟁도 마찬가지다. 영적전쟁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전심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전쟁을 수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많은 관심사로 우리 마음이 분산되어있기 때문이다. 전투에 올인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도들이 경험하는 영적 전쟁을 이렇게 묘사한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가 사는 게 힘든 이유는 혈과 육의 배후에 사탄과 어둠의 권세가 우리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한다. 벧전 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베드로는 대적 마귀의 실상을 말한다. 마귀는 믿는 자를 삼키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한다. 대적 마귀와의 영적전쟁은 실제인 것이다. 이 영적 전쟁에서는 아무도 열외가 될 수 없다. 영적 전쟁에서 열외가 된다는 것은 곧 마귀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영향력 아래 살아간다는 말이다.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면 반드시 우리의 삶에 시작된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신 20:10-11,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가나안 전쟁의 목적은 단순히 영토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통치 영역의 확장을 위한 전쟁이었다. 따라서 거룩한 전쟁은 전쟁 이전에 화평을 선언하는 전쟁이었다. 여기서 ‘어떤 성읍’은 가나안 밖에 있는 성읍을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먼저 화평을 선언해야 했다. 우리 역시 영적 전쟁을 수행한다고 해서 모든 세상을 다 정복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이 싸우라고 하신 전쟁만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화평케하는 자로 부름받았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신 20:16-17,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우리는 여기서 거룩한 전쟁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을 보게 된다. 그것은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진멸은 히브리어로 ‘헤렘’인데 ‘격리하다’라는 뜻의 ‘하람’에서 온 말이다. 가나안 정복전쟁은 철저히 가나안 족속과 격리하기 위한 전쟁이었다.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만 해도 가나안 족속의 죄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창 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그러나 가나안 정복 당시 가나안 족속의 죄는 하나님이 심판하셔야 할만큼 그 땅에 가득했던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은 당시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자녀를 바치는 인신제사를 드렸다. 농사의 풍작과 다산을 기원하며 바알 성전의 창기들과 공적으로 음행을 행했다. 하나님은 이들의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해 진멸을 명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진멸의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신 20:18,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가나안 족속이 남아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진멸하라는 것이다. 원수를 진멸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앞에 범죄하여 자신들이 진멸 당할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거룩한 전쟁은 자신들이 파멸당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적을 진멸해야 하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진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해당되는 엄중한 명령이었다. 레 18:24-25, 28,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하나님의 거룩의 기준은 그 땅의 가나안 원주민들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똑같이 적용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져 그 땅을 더럽히면 그들도 그 땅에서 토함을 당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영적전쟁도 마찬가지다. 요한일서 3:8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마귀의 일을 멸하지 않으면 우리 역시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이미 사탄의 권세를 무력화시키고 구원 역사를 시작하셨다. 골 2:14-15,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 승리가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무저갱에 던져지는 최후 심판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일어난다. 따라서 성도인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이미’와 ‘아직’의 긴장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사탄의 속박에서 이미 벗어났지만 마귀는 아직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으며 공격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 마귀의 세력과 맞서서 영적전쟁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가나안은 그냥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영적전쟁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누리게 되는 것이다. 사탄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견고한 진을 만들어 놓고 자신의 지배를 강화하려 한다. 우리가 상대하는 통치자들과 권세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은 분명 우리보다 강하다. 그러나 거룩한 전쟁은 수와 군사력의 싸움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앞장 서시는 거룩한 전쟁에 소집 명령받은 자들이다. 세상의 관심사에 마음이 나뉘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영적전쟁에서 열외되어 있지 않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깨어 있어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이 누구인지 분별하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로 우리 삶에서 원수가 형성해 놓은 견고한 진들을 진멸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 이 땅에 마귀가 심은 영향력으로부터 격리되어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나안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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