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2 하나님의 후회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10월 9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 하나님의 후회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날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 6:13)

지난 주 샤밧 디너 후 토라포션 공부를 할 때 유발 자매가 질문을 했다. 창세기 6장 6절에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사”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한탄하고 후회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냐는 것이었다. 정말 좋은 질문이다. 하나님은 왜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을까? 하나님이 후회하신다면 하나님이 하신 인간 창조는 과연 실패한 것일까?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홍수 심판과 바벨탑 사건이 나온다. 오늘은 이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후회하신 감정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을까?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말이 아닐까? 하나님이 결정적으로 한탄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자. 6:1-2,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홍수기사의 서문에는 부패와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일까? 히브리어로는 ‘베네 하엘로힘(בני האלהים)’이다. 누가 ‘베네 하엘로힘’일까? 이것은 ‘하나님이 세운 자들’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로 아들은 ‘벤(בֵן)’인데 이것은 ‘세우다’라는 동사 ‘바나(בָנָה)’에서 온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육신적으로 낳은 자식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운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은 당시 지도자일 수도 있고, 아담의 아들 셋의 계보를 잇는 경건한 자손일 수도 있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외모에 반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을 데려다가 아내로 삼은 것이다. 창조 이후 불과 몇 세대 만에 도덕적 타락이 극심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잘 다스리라고 세우신 강하고 권세 있는 자들이 그들의 힘을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6:3-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여기서 ‘네피림(נפלים)’은 ‘떨어지다, 넘어 뜨리다’라는 뜻의 ‘나팔(נפל)’에서 온 단어다. 네피림은 ‘남을 넘어뜨리는 자, 타락한 자’라는 뜻이다. ‘용사’는 히브리어로 ‘하깁보림(הגברים)’인데 좋은 뜻만이 아니라 ‘폭군들’이라는 나쁜 뜻도 있다. 이들은 고대에 ‘네피림’이라는 그룹으로 불릴 정도로 힘과 권력을 휘두르던 폭군들이었다. 경건해야 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타락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남용하여 약한 자들을 지배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의 딸들을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마음대로 취했다. 하나님은 이들의 폭력과 그로 인해 타락한 세상을 한탄하신 것이다.

6:5-7,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여기서 ‘한탄하다’는 히브리어로 ‘나함(נחם)’이다. 한탄하고 후회하는 것은 너무도 인간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아무 감정도 없는 분이 아니라 한탄하고 후회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나함’에 또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불쌍히 여기다, 위로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함’은 ‘한탄과 후회’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위로’라는 긍정적인 감정으로 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긍휼과 위로의 사역을 노아라는 사람을 통해 펼쳐가신다. 6:8-9,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힘과 폭력의 지배가 가득했던 당시 세상에서 노아 한 사람만 의인이었다. 노아 한 사람만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었다. 노아의 이름에는 뜻이 있다. 5:28-29,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여기서 ‘안위하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나함(נחם)’이다. 노아(נח)라는 이름은 바로 이 ‘나함’에서 온 말이다. ‘쉼, 위로’라는 뜻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없이 힘의 지배만 있었던 세상에서 노아의 존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위로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늘 자신과 동행하던 노아를 통해 당신의 구원 계획을 펼치기로 작정하신다.

6: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날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는 것이 어떻게 위로의 사역이 될 수 있을까? 13절은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세상에 가득했다고 말한다. ‘포악함’은 히브리어로 ‘하마쓰(חמס)’다. 남을 해치거나 난폭하게 빼앗는 것을 말한다. 당시 세상은 포악함이 가득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끝(קץ,케츠)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미 세상은 위로 받고 쉴 곳이 없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물로 씻어내기 원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선함을 다시 회복하기 원하신 것이다. 회복된 세상만이 진정한 쉼과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은 결국 진정한 안식과 위로를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노아에 대한 평가는 이러하다.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물로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정은 너무도 엄위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묵묵히 순종한다. 그가 방주를 짓는 망치 소리는 그 자체로 당시의 세대를 꾸짖는 회개의 선포였을 것이다. 그 울림은 방주가 완성되는 날까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눅 17:27)’ 일상을 반복했다.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것,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다. 그것은 사실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노아의 때 사람들의 그러한 일상이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킴과 회개 대신 자신들의 일상 만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면서 세상은 타락하고 포악함만 가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다.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40일 동안 비가 땅에 쏟아졌다. 한자 ‘배 선(船)’자는 배에 여덟 명의 식구가 탄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방주에 탄 생물들과 노아의 가족 여덟 명 만 제외하고 모든 생물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했다. 홍수 심판이 끝난 세상에 무지개가 나타났다. 그리고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8:22)”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다. 세상은 이렇게 다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새롭게 재편되었다. 그리고 인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홍수 이후 세상은 좀 나아졌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 사건이 나온다.

11:1-3, “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인류가 하나님께 대항한 가장 극명한 사건이 바로 바벨탑 건설이다. 시날 평지는 니므롯이 건설했던 도시들이 있었던 곳이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바벨탑 건설을 주동한 인물이 바로 니므롯이라고 기록한다. 그가 쓴 유대고대사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니므롯은] 하나님께서 다시 땅을 홍수에 잠기게 하려 하실 경우 복수를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는 물이 미칠 없을 정도로 높이 탑을 쌓아서 조상들의 멸망에 대해 복수하려 하였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노예살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니므롯] 충고에 열심히 따랐으며, 그래서 그들은 건축에 착수했고 ··· 탑은 누구의 예상도 뛰어넘는 빠른 속도로 건축되어 올라갔다.”—「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I, 114, 115 (iv, 2, 3). 탈무드에 의하면 니므롯은 바벨탑을 건축하면서 이런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구분할 권리가 없다, 우리가 하늘로 가자” 이처럼 니므롯은 땅의 권력자였을 뿐 아니라 이제 하늘을 다스리며 하늘의 권력까지 욕망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자 반역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류의 반역을 보고 한탄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탄만 하고 계시지 않으셨다. 11:6-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무리가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후로는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없으리로다 ,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벽돌을 만들자’는 말은 히브리어로 ‘레베나(לבנה)’이다. ‘라반(לבן)’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혼잡하게 하자’는 히브리어로 ‘나발(נבל)’이다. 이것은 ‘라반(לבן)’이란 단어를 거꾸로 뒤집은 말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벽돌을 쌓아 하늘에 닿고자 했던 인간들의 반역을 뒤집으신다. 이것은 니므롯의 힘의 지배로 신음하던 사람들에게는 위로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사건 이후 또 다시 새로운 위로의 역사를 진행하셔야 했다. 그래서 주목하신 것이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은 니므롯이 정복한 땅 갈대아 우르지역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한 사람을 통해 구원과 위로의 역사를 계속해서 펼쳐 가시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홍수 심판이 있고 나서도, 4대 만에 바벨탑을 쌓는 반역이 있었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보면,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 구분하신 신의 영역을 깨고 스스로 신이 되려는 시도를 한번도 멈추지 않았다. 히브리대 역사학 교수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호모 데우스’에서 인간이 행복과 불멸을 추구하면서 생명공학과 인공지능 개발을 통해 신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새로운 기술 종교가 실리콘밸리와 같은 연구소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알고리즘과 유전자를 통한 구원을 약속함으로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고 그는 예측한다. 그들은 기존의 종교가 약속하고 있는 보상들, 즉 행복, 평화, 번영, 심지어 영생까지도 죽은 뒤에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곳 지상에서 기술을 통해 이루겠다고 약속한다. 요즘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의 창업자들은 많은 돈을 영생을 위한 생명 연장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세상은 계속해서 하나님 없이도 안전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러한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묵묵히 동행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보다는 세상에서 힘을 가진 자들이 보장하는 열매를 따먹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아갈 것이다.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은 반드시 구속이 필요하다. 죄에서 구속을 경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를 발견하며 위로를 얻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8:19-21,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노릇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지금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길 고대하고 있다. 권력과 힘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빼앗고 통제하려는 ‘폭군들’이 아니라, 진정한 영광의 자유에 이르도록 이끌어 줄 ‘하나님의 아들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상은 망가져가고 있다. 네피림과 니므롯과 같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며 세상을 하나님 없이도 행복하고 안전한 곳이 되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보시며 한탄하고 계실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끝(קץ,케츠)’을 물어보는 제자들에게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4:37)”라고 말씀하셨다. 노아의 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가는, 그저 소소한 일상을 반복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개의치 않았고, 하나님 나라와 의라는 더 높은 부르심을 위해 살지 않았다. 인자가 다시 오시는 그 ‘끝’이 언제인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끝을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이 세대를 보시며 한탄하시는 ‘나함’의 하나님은 이 ‘끝’을 통해 완전한 구원과 위로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모든 피조물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다. 나의 소소한 일상 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영광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인 것이다. 우리는 이 부패하고 포악한 세대에서 노아처럼 먼저 하나님께 위로가 되는 사람들이 되야 한다. 세상이 조롱해도 묵묵히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되야 한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은 진정한 위로가 아니다. 세상이 뭐라 해도 참된 구원의 길을 끝까지 보여줄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위로를 세상에 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여기 있는 우리가 그런 위로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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