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13 스스로 있는 자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12월 25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3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3:14)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우린 이력서(履歷書)를 쓴다. 이력은 밟을 이 또는 신발 이(履)에 경력 력(歷)자가 합해진 단어이다. 신발 신고 발로 밟고 다닌 역사를 기록한 것이 바로 이력서다. 모세는 그의 나이 80세에 하나님께 채용된다. 하나님은 모세의 어떠한 이력을 보고 그를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는 지도자로 뽑으셨을까? 오늘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의 조건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모세는 애굽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태어날 무렵 애굽의 바로 왕은 명령을 내린다. 히브리 여인이 해산 할 때 남자 아이라면 죽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나라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그가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모세가 태어나자 그의 부모는 3개월 동안 그를 숨긴다. 그러나 더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아기 모세를 넣어 나일강에 띄워 보낸다. 갈대 상자가 히브리어로 ‘테바(תבה)’다. 테바는 방주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방주는 그곳에 탄 자가 방향을 정하고 갈 수 있는 배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 방주가 이를 곳을 정하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아기 모세가 담긴 갈대 상자를 마침 목욕하러 나일 강에 나온 바로의 딸 앞으로 인도하셨다. 그리하여 모세는 물에서 건져져 애굽의 왕자로 자라게 된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모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7: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모세는 결코 말을 못하던 자가 아니었다. 신약 성경이 기록하는 모세는 말과 하는 일에 능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모세의 나이 40세 때의 이력이었다. 7:23-25, “나이가 사십이 되매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사람이 원통한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죽이니라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모세는 애굽의 왕자였지만 히브리인으로 자랐다. 그것은 그의 유모이자 엄마인 요게벳의 영향이었다. 그는 자신의 민족이 애굽의 노예로 고통 받는 현실이 괴로웠다. 그는 자신의 경력으로 자기 민족을 돌보는 자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그가 했던 일은 무력으로 애굽 사람을 쳐죽인 일이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그의 신분이 드러나고 만다. 그리하여 모세는 그를 죽이고자 하는 바로의 낯을 피해 미디안으로 도망치고 만다. 그는 그곳에서 결혼하여 40년간 장인의 양 떼를 친다. 그의 이력서에 양치기라는 경력이 추가된다.

하나님은 모세의 나이 80에 그를 찾아 오신다. 떨기 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신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는 어리둥절하며 대답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40세였다면 그는 아마도 하나님의 이 부르심에 주저함이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드디어 나를 알아보시는구나’ 그는 속으로 기뻐하며 당장 신을 벗었을 것이다. 4 0세 때 그는 능력자였다. 말과 하는 일에 능한 자였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80의 나이에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실 거라고?’ 그에겐 더이상 애굽의 왕자라는 타이틀도 없다. 자식들 먹여 살리기 위해 양을 치는 경력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여겼다. 하나님은 그 지점에 이른 모세를 찾아 오신 것이다. 그리고 다만 그에게 신을 벗을 것을 요구하셨다. 왕자로 살아온 40년, 도망자로 살아온 40년, 그가 밟아온 80년의 이력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 앞에 서라는 요구였다. 물론 하나님은 애굽의 왕자로서 그의 경력을 활용하셨다. 그러나 모세가 그것만 의지하지 않도록 40년의 시간을 더 기다린 후에 그를 부르신 것이다.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질문한다. 주저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대답하신다. 3:12,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후에 너희가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출애굽이 모세의 능력과 경력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그의 순종에 달린 것이었다. 사실 출애굽의 역사는 모세의 이력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경력을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도 그 일에 적합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자신의 경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지에만 주목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출애굽을 위한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세우는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압제 아래 신음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일하라’는 것이었다. 히브리어로 일하다는 ‘아바드(עבד)’다.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가치를 그들이 만들어내는 노동의 양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그들을 놓아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바로의 밑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해야 할 일은 아바드, 고된 노동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이 애굽에 머물며 고된 노동으로 신음해야 할 존재가 아님을 아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가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노동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예배하는 존재였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섬기다’라는 단어도 히브리어로 ‘아바드(עבד)’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노동하는(아바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아바드)’ 자로 만들기 원하셨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의 군주 밑에서 노동만 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한 분을 섬기며 예배하는 자로 살기를 원하신다.

모세는 계속 하나님께 질문한다. 3:13,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이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에흐예 아쉘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라고 자신을 소개하신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 한국어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 호온’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하면 하나님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된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미래 시제로 번역한다. “I will be what I will be,” 이 말은 ‘내가 어떤 하나님인지는 앞으로 내가 하게 될 행동을 통해서 알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행동하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가르며, 출애굽의 역사를 행하실 때,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경험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셨고, 우리의 미래에도 우리를 위해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항상 존재하시는 분으로 계셨다. 이렇게 항상 존재하셨던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 장차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동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이번 주 파라샤의 내용이다.

오늘은 성탄절이다. ‘스스로 있는 자’가 인간 역사 속에 나타나 행동하신 사건이 바로 성탄절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이다. 헤롯은 이 때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모든 아기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면 자신의 권좌가 빼앗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베들레헴에서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엄마들은 통곡했다. 마태는 그것을 예언의 성취로 보았다. 2:17-18,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베들레헴의 어미들은 아들을 잃어버리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메시아가 태어나면 인류가 죄 가운데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이 세워진다. 그러기에 사탄은 세상의 권력을 이용해 그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세가 태어나면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세워지기에 그 때도 사탄은 바로를 이용해 그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사탄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영적 실체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정사와 권세를 통해 하나님 나라 역사의 진행을 저지하려고 지금도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누구이신지 계시하셨다.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는 …이다’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다. 주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8:23,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8:58,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여기서도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 즉, ‘내가 존재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이에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했다. 영원 전부터 계셨던 예수님은 이처럼 때가 차매 인간 역사 속에 오신 분이다. 그분은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셨고, 미래에도 우리를 위해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행동하신 하나님을 경험했다. 유대 민족만큼 많은 고난을 경험한 민족도 없을 것이다. 그들을 전멸하겠다고 덤벼든 시도들도 많았다. 앗수르 제국, 바벨론 제국, 로마제국이 그랬다. 하만이 그랬고, 히틀러가 그랬고, 오늘날 이란이 그렇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고통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을 위해 행동하실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31:35-36, “낮에는 해를 주셔서 빛을 밝혀 주시고, 밤에는 달과 별들이 빛을 밝히도록 정하여 놓으시고, 바다를 뒤흔들어 파도가 소리 치게 하시는 , 이름은 만군의 주이시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정해진 질서가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스라엘 자손도 앞에서 언제까지나 민족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을 멸절시키려던 제국은 사라졌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반유대주의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세상은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싫어한다. 이스라엘을 멸하려 하는 나라도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유대인들이 회복되면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사탄은 영원한 불못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은 어떻게 해서라도 세상의 정사와 권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멸하려 하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나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륜을 대적하는 사탄의 영에 조종되어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반유대주의는 영적인 현상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영적 긴장과 진통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23: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바룩하바 베셈 아도나이’를 외치며 예수님을 그들의 메시아로 영접할 때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세상은 지금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덕담을 주고 받으며 이 날을 기뻐한다. 그러나 메시아가 다시 오시는 때까지 누군가는 또 다시 애통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진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루실 경륜을 바라보며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자로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소명은 이력서에 적힌 나의 경력이나 능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정체성, 나의 소명은 위로부터 나를 부르신 자에게서 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권력자 밑에서 노동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 한 분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는 자’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그분의 존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기 위해 모세처럼 우리의 신을 벗어야 한다. 나의 경력,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앞으로 그분이 이루실 경륜을 주목하는 자가 되야 한다. 과거의 상처와 실패 때문에 모세처럼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는가? 미래의 불확실함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진 않은가? 나의 능력이 아니라 미래에 우리를 위해 행동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길 바란다. 하나님은 앞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될 모든 삶의 현장에 오셔서 행동하실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을 기대하고, 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한 해의 마지막이 되길 바란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 매이지 않고, 우리의 미래를 여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그분의 부르심을 따라 나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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