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42 이스라엘의 운명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7월 16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2 이스라엘의 운명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8-9)

퀴즈를 하나 내겠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들에 의해 침공을 당했지만, 그 어느 제국들보다 오래 지속된 민족은 어디일까? 정답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정말 그 존재가 신비로운 민족이다. 많은 주변 민족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존재를 지우길 원했다. 애굽의 바로가 그랬고, 페르시아의 하만이 그랬고, 독일의 히틀러가 그랬다. 그리고 오늘날 이란 역시 이스라엘을 날려 버리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라가 망하여 떠돌이 생활을 한 적은 있어도 이스라엘 민족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31:35-36, “낮에는 해를 주셔서 빛을 밝혀 주시고, 밤에는 달과 별들이 빛을 밝히도록 정하여 놓으시고, 바다를 뒤흔들어 파도가 소리 치게 하시는 , 이름은 만군의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정해진 질서가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 이스라엘 자손도 앞에서 언제까지나 민족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의 말이다.” 약 2600년 전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이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나님은 인류 역사의 시간표를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돌리고 계신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아는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나온다. 그들의 운명이 지금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가나안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민족은 그 행진의 속도를 내고 있었다. 이들의 행진을 막아 서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무너뜨렸다. 이에 모압 왕 발락이 다급해졌다. 발락은 자신의 군대로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비군사적인 수단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무너뜨리길 원했다. 그것은 당대 유명한 주술사였던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는 것이었다. 발락은 발람이 저주하면 저주가 임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서 그는 모압 장로들을 두둑한 복채와 함께 발람에게 보낸다. 그러나 그날 밤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하나님은 발람에게 “너는 그 백성을 저주하지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미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축복하셨다.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또한 광야에서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뒤 이렇게 지시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라,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이에 광야에서는 매일 대제사장의 축복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향해 울려 퍼졌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복을 받기 위해 태어난 민족이었다. 따라서 발람은 자신이 그런 이스라엘을 저주했다가 그 저주가 자신에게로 돌아올 것을 알았다. 그는 단호하게 발락이 보낸 사신들을 돌려보낸다. 그러자 발락은 더 높은 고관들을 발람에게 보낸다. 아마도 더 큰 금전적인 보상이 제시되었을 것이다. 발람은 이렇게 말한다.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여기까지는 그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발락이 보낸 사신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발람은 그들을 단호히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미 그의 마음은 은과 금에 넘어간 것이다. 그는 결국 이튿날 사신들을 따라 모압의 바알 산당에 오른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이렇게 예언한다. 23:8-9,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백성은 홀로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자, 여기서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 일까? 친구도 없고, 미움 받고, 외톨이로 사는 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이란 말인가?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는 표현은 또 어떤 의미일까? 이것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한 말이 아님은 분명하다. 랍비 이븐 에즈라는 “다른 모든 국가들과 달리 유대인이 비유대인 문화의 소수자일지라도 동화지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서 ‘홀로’는 히브리어로 ‘레바다드(לבדד)’이다. ‘나뉘다, 분리되다’라는 뜻의 ‘바다드(בדד)’에서 온 말이다. 이스라엘은 주변 문화와 철저히 분리되어 사는 자들이다. 그들은 음식법을 지켜야 했고, 정결법을 지켜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받은 그들의 부르심이자 사명이었다. 다른 민족들은 그들이 사는 곳에서 쉽게 동화되어 살아간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달랐다. 그들은 여러 나라로 흩어져 살았다. 그들은 거기서 물론 그 지역의 언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변 민족들이 보기에 어디까지나 ‘유대인’으로 살았다. 그들은 주변 문화에 섞이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주변과 구별되는 한 민족으로 만들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함께 토라에 의해 세워진 민족이었다. 그들은 땅에 들어가기 이전 이미 광야에서 토라를 받았다. 그들은 땅을 잃고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도 토라와 함께 살았다. 그것이 그들을 열방 가운데 홀로 사는 나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홀로 사는 그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했다는 것이 주변 나라들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것이 반유대주의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국제 정치분야에서 여전히 고립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들을 저주하며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나라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 나오는 반유대주의는 지금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기원전 700년 경에 활동한 미가 선지자는 발람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6:5, “ 백성아 너는 모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발람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셨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킨다. 신명기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23:4-5,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신 이유는 뭘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잘나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그들을 자녀 삼기로 약속하셨기에, 그들을 언약으로 낳았기에 사랑하시는 것이다. 이 원리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말한다.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의 확장이 일어났다. 예수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원리는 이제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사탄은 발락 왕처럼 우리를 정죄하고 저주하며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소멸시키려 한다. 원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려는 축복을 취소하려 한다. 그의 사명은 복 받는 우리의 정체성을 부인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은 주변 나라가 보는 시각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지가 중요했다. 우리의 정체성 역시 주변 사람들의 평가의 말이나 저주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과거 내 주변의 권위자의 평가에 의해 나의 정체성이 결정될 수 없다. 거절감의 쓴 뿌리가 있는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너무도 쉽게 자신을 정죄한다. 축복보다 저주의 그늘에 머물러 있는 게 더 익숙한 듯하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의 패턴을 끊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저주에서 건지시기 위해 저주 받으셨음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복주시기 원하시는 존재가 되었음을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미가 선지자는 말한다.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 실패한 것은 이 부분이다. 그들은 정의와 인자와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삶을 잃어버렸다. 그저 세상과의 분리만 있었다. 하나님은 순종 없는 백성들에게 맹목적인 축복을 약속하시는 분이 아니다. 정말 세상과 구별되어 혼자 살지만, 세상 속에서 정의와 인자와 겸손히 행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축복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상 많은 아픔과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들은 약 2000년간 나라 없이 떠돌다가 1948년 다시 나라를 회복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1:1,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없느니라 11:11,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이스라엘의 운명은 우리 이방인의 운명과 상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우리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미래 운명에 대해 또 이렇게 말한다. 11:25-27,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것이라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이 말씀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 것이다. 59: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발람은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올 것(민 24:17)이라고 예언했다.바울이 보고 있는 이스라엘의 운명은  주님이 장차 왕으로 다시 오실 때 그들이 회개하며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국가로 존재하지 않았을 때 많은 성경학자들은 ‘온 이스라엘’을 ‘교회’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단순히 지리적으로 국한된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세상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된 유대 민족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에는 후회가 없으시다. 하나님은 반드시 처음 택하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저주받고 사라져야 할 존재가 아니라, 구원받고 회복되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실패와 시행착오를 우리는 정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실패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 구원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인 우리를 위해 결과적으로 희생의 대상이 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그들의 회복을 위해 대가지불을 해야 할 차례인 것이다. 원가지 였던 유대인들이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여지는 날이 오길 기도한다. 하나님 나라 선교는 방향이 있고 끝이 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유대인의 우둔함이 벗겨지고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날이 올 것이다. 바라기는 유대 민족에게 다시 구원이 임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선교가 완성되기를 기도하고 힘쓰는 교회와 성도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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