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43 질투의 힘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7월 23일 설교 이익환 목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25:10-13)

‘질투는 나의 힘’이란 제목의 시가 있다. 끝부분의 내용이 이렇다.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 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감정이다. 부정적인 감정이다. 질투가 자신의 힘이 된 사람은 남처럼 되기 위해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질투가 삶의 동기가 되는 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힘들다. 남만 부러워 하다가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 성경 본문에는 ‘질투’란 단어가 나온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여기서의 질투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하나님은 비느하스의 질투를 칭찬하신다. 오늘은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질투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먼저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겠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진입을 바로 앞두고 벌어진 사건이다. 25:1-3,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여기서 ‘음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자나(זנה)’이다. 이 단어는 단순한 성 행위가 아니라 이방신과 관련된 음행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바알브올에게 가담했다는 말은 브올 지역의 바알과 연합했다는 말이다. ‘가담했다’는 단어 ‘짜마드(צמד)’는 ‘함께 멍에를 지다. 짝이 되다. 연합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의 성축제에 참여함으로 바알과 계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바알에게 내어준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 ‘진노하다’는 히브리어로 ‘하라 아프’ 즉, ‘코가 뜨거워졌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 받으신 것이다. 시내산에서 자신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간음한 여인처럼 그들의 남편 되신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염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조치는 단호했다. 25:4-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 이것은 전체 백성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다. 바알 숭배와 관련된 음행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것은 발람의 꾀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와해시키기 위해서 그는 모압왕 발락에게 음행이라는 덫을 놓으라고 조언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체 이스라엘을 지키시기 위하여 과감히 바알 숭배에 가담한 자를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한 사건이 벌어진다. 시므리라는 시므온 지파 지도자가 고스비라는 미디안 수령의 딸을 이스라엘 진영 안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25:6,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이 회막 문에서 때에 이스라엘 자손 사람이 모세와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 음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고 있는 시국에 정말로 정신 나간 행위였다. 그것도 모세와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회개하며 울고 있을 때, 그는 버젓이 그들의 눈 앞에서 이방 여인을 데리고 온 것이다. 이것을 본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진노한다. 그는 그들을 따라 막사로 들어가 시므리와 그 여인의 배를 창으로 꿰뚫어 죽인다. 그러자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치게 된다. 그 때까지 염병으로 이만 사천 명이 죽어가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비느하스의 행동으로 더 이상의 희생이 그친 것이다. 그의 행동의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전멸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5: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노를 돌이켜서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 때문에 질투하셨다. 여기서 질투는 덜 성숙한 사람이 ‘저게 나보다 예뻐?’하면서 갖게 되는 그런 감정이 아니다.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아내를 바라보며 남편은 질투를 느껴야 정상이다. 그것은 아내와 남편이 배타적인 언약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배우자는 이 놈, 저 놈 함께 소유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나 하고만 언약을 맺었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아 4:12)이 되야 한다. 그래서 언약적 사랑에는 반드시 그것을 방해하고 빼앗는 것에 대한 불 같은 질투가 따르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질투하는 분으로 묘사한다. 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시는 분이다. 질투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독점적인 사랑을 요구하신다. 우리의 마음이 결코 우상들에게 빼앗기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혹 우리의 마음이 돈, 명예, 성공, 자식, 쾌락 때문에 나누인다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 때문에 질투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언약을 맺은 대상을 보호하고 지켜내기 위한 질투인 것이다. 질투는 히브리어로 ‘킨아(קנאה)’인데, 성경에서는 ‘열심’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자기 백성을 향한 열정적인 사랑이 바로 여호와의 질투, 여호와의 열심인 것이다.

하나님은 비느하스의 행동을 내 질투심으로 질투한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질투하실 때 함께 질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열심을 내시는 대상을 향하여 함께 열심을 내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과 마음이 합해진 사람이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해진 사람은 원수가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기 위해 놓은 덫에 걸리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우상 숭배라는 덫에 걸려 들 때 오히려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을 위해 창을 들게 된다. 지난 주 토요일 유럽 전도여행 간 청년들이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그간 베를린 교회 청년들과 함께 거리 전도도 나가면서 은혜의 시간을 보냈었다. 그런데 그 날 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음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도착하면서 동성애 퍼레이드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영적인 타격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외치는 구호도 과거에 비해 너무도 당당해졌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우리 제발 결혼하게 해주세요’ 정도였는데, 이제는 법적으로 그들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현지에게 동성애 문제는 이제 다음 세대인 너희들이 실제적으로 부딪치며 씨름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프로파간다가 강한 유럽의 한 도시에서 그 행렬을 마주친 것에는 이 시대를 위해 더 기도하고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동성애를 찬성하고 가담하는 것은 과거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동성애가 법제화되면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고 있는 성경이 위법이 된다. 그리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와 사람들은 법의 제재를 받게 된다. 동성애는 이제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흔들고 허무는 이 시대의 바알 숭배인 것이다. 현지가 이틀 뒤 사진을 보내왔다. 동성애자들의 상징인 6개 색깔의 무지개 글자판 위에 성경 말씀을 붙이고 다닌 것이다. 지혜로운 반격이었다. 9:13,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동성애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인 무지개를 6개 색깔로 변형시켰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가 담긴 말씀을 프린트해서 붙인 것이다. 작은 행동이었지만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한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며 창을 들고 일어서는 비느하스가 필요하다.하나님은 하나님의 감정을 품은 비느하스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다. 25:12-13,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비느하스가 창을 든 건 자신의 야망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 한 분을 향한 열정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 빠져가는 것을 보았을 때 비느하스의 마음에는 거룩한 질투가 일어났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긴밀히 연결되었기에 하나님이 느끼시는 질투를 그도 고스란히 느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아론과 엘르아살에 이어 대제사장의 직분을 허락하신다.

우리는 비느하스처럼 하나님과 감정적으로 연합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열심을 회복해야 한다. 그 열심이 있어야 우리는 세상의 우상 앞에 절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회복해야 우리는 원수가 놓은 덫에 걸리지 않게 된다. 하나님과 마음과 마음으로 연결되어야 우리는 하나님의 질투심을 가지고 그분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창을 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연합이 먼저인 것이다. 신랑을 깊이 사랑하는 신부가 될 때, 신랑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용사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후 11:2-3,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바울 역시 비느하스의 심정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호소했었다. 바울은 당시 성적으로 문란했던 고린도 지역에서 자신이 세운 교회의 성도들이 원수의 덫에 걸려 타락하지 않고,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신부가 되길 원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정한 기준들이 계속 무너지고 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창을 들어야 할 성도들이 원수가 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있다. 청년들이 교회에서 사라지고, 다음 세대의 관심은 온통 자신의 생존에 대한 염려 뿐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청년들을 점점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 시대의 바알과 맘몬의 힘에 이끌려 돈과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모습들이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세대를 보며 슬퍼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세대를 위한 거룩한 질투심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으로 우리의 구원을 안심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창을 들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한다. 그래야 덫에 걸리는 인생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질투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다른 것에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는 사람이다. 오직 하나님만 갈망하는 사람이다. 우리 마음은 결코 진공 상태가 아니다. 반드시 뭔가로 채워져 있게 된다. 내 안에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내가 하나님과 연합된 것이 아니라 다른 우상과 연합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탄은 지금도 돈과 성공, 음란과 쾌락이라는 덫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이 덫에 걸리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저 내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것은 모두가 공멸하는 길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비느하스의 열심을 구해야 한다. 내 야망, 내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품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신앙의 최종 목표는 형통한 삶이 아니다. 복을 많이 받는 것도,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온전히 연합되어 하나님을 위해 창을 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길 원한다. 질투에는 힘이 있다.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을 이기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세워가는 힘이 있는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하여 하나님이 느끼시는 질투를 나도 느끼며, 하나님을 위해 분연히 창을 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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