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18 회복의 성소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2월 25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8 회복의 성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 25:8-9)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는 이케아(IKEA)의 창업자다. IKEA라는 이름은 그의 이름 앞 글자와 그가 자란 농장 엘름타드(Elmtaryd), 그리고 근처 마을인 앵규나드(Agunnaryd)라는 이름의 첫 글자를 조합한 것이다. 이케아 가구를 조립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용설명서를 따라 조립을 했을 뿐인데, 다 조립하고 나면 뭔가 뿌듯한 감정이 있다. “내가 만들었다”는 허세감까지 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냥 구입한 가구보다 자신이 조립한 가구에 더 큰 애정을 갖게 된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이케아 효과’라고 한다. 소비자는 자신이 부분적으로 만든 제품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성막을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성막의 모든 설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  말씀해 주셨다. 백성들은 이 지시사항에 따라 예물을 자원해서 드렸고, 그것으로 자신들이 손수 성막을 만들었다. 하나님은 왜 성막을 백성들이 직접 만들게 하셨을까? 그 성막의 효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오늘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성막은 히브리어로 ‘미쉬칸(משכן)’이다. 동사 ‘샤칸(שכן)’은 ‘거주하다’라는 뜻이고, 명사 ‘샤켄(שכן)’은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 즉 ‘이웃’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웃이 되어 함께 사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든 최초의 물건이다. 하나님은 이 성막을 위해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25: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성막을 직접 만들어 주시지 않았다. 그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가져와 그들 스스로 성막을 만들도록 하셨다.

이것은 출애굽 이야기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셨다. 먼저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치셨다. 그리하여 애굽의 종이었던 그들을 자유의 몸으로 나올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 길을 만드셨고, 그들이 마른 땅으로 건너가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배고플 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그들을 먹이셨고, 그들이 목마를 때 반석을 쳐서 물을 마시게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감동한 것은 너무도 잠깐이었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불평했다.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그들은 두려움에 빠진다. 그리하여 자신들을 인도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죄를 범한다.

출애굽기 25장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완전히 다른 것을 주신다. 그것은 이제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이것이 어떤 차이를 가져왔을까? 유대인들은 이번주 토라포션에 나오는 성막 건축을 상당히 중요한 전환점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이 매번 하나님께 받기만 하다가 이제 하나님께 받은 것을 돌려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여기는 것이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이렇게 말한다. “The mishkan became the home of the Divine presence because God specified that it be built only out of voluntary contributions. Giving creates a gracious society by enabling each of us to make our contribution to the public good. That is why the building of the sanctuary was the cure for the sin of the golden calf. A people that only received but could not give was trapped in dependency and lack of self-respect. God allowed the people to come close to Him, and He to them, by giving them the chance to give.” 성막은 하나님께서 자발적인 기부로만 건축하도록 지정하셨기 때문에 신성한 임재의 집이 되었다. 기부는 우리 각자가 공익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은혜로운 사회를 만든다. 그래서 성막을 건축하는 것은 금송아지의 죄를 치유하는 수단이 되었다. 받기만 하고 줄 수 없는 사람들은 의존과 자존감의 결여에 갇히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허락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줄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소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해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왔다. 나중에 너무 많이 가져오자 모세는 그만 가져오라고 명령을 내려야 할 정도였다. 성막이 완성되어 봉헌할 때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은 그 완성된 성막에 충만했다. 이번 주 토라포션의 제목은 ‘트루마(תרומה)’이다. 트루마는 ‘들어 올리다’라는 동사 ‘룸(רומ)’에서 온 것인데, ‘올려 바친 예물’이란 뜻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자원해서 드린 예물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 결과 자신들의 존재가 들어 올려졌다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드린 것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이 존엄을 얻었다고 믿는 것이다.

성막 건축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원하는 예물을 드렸고, 기쁨으로 성막을 함께 만들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일하셨을 때 좀처럼 변하지 않았던 그들은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헌신은 자신들이 올려 바친 예물처럼 자신들을 존귀한 자로 여기는 전환점이 되었다.

자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를 가장 존귀한 자로 여겼던 때는 언제 였을까? 그것은 타락 이전 에덴에서 였다. 에덴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누렸던 곳이다. 옷을 입지 않아도 아무 부끄러울 것이 없었던 곳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이야기 하며 함께 그곳을 거닐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곳, 그곳은 그야말로 완전한 성소였다. 그러나 아담의 죄로 인해 인간은 그 성소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 후 아담은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지으라”고 명령하신다.성막을 짓는 것은 궁극적으로 에덴을 회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다. 하나님은 이 성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는 이웃이 되기로 선언하신 것이다.그리하여 애굽의 종이었던 그들이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 다시 존귀함을 회복한 자로 살아가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길을 다시 열어 주셨다. 그런데 신약 히브리서 기자는 이 성막이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했던 성막의 실제는 무엇이었을까?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된다. 그리고 지성소에는 속죄소가 있었다. 속죄소는 히브리어로 ‘카포레트(כפרת)’다. ‘카파르(כפר)’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카파르’는 ‘덮다, 속죄하다’는 뜻이 있다. 속죄소는 영어로는 ‘mercy seat, 은혜의 보좌’라고 한다. 이 속죄소는 구약시대에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다. 욤키푸르는 일년에 한번 죄를 덮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 속죄소가 언약궤 위에 놓여져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25:21-22, “속죄소를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증거판을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증거궤 위에 있는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증거궤 안에는 율법을 상징하는 십계명 돌판이 놓여 있다. 누구든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증거궤 위에 속죄소, 은혜의 보좌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의 저주 위에 속죄의 은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속죄소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시는 것이다. 율법의 기준이 아니라 그 위에 뿌려진 속죄의 피를 보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속죄소는 하나님의 긍휼이 심판을 이기는 것을 보여주는 모형인 것이다. 

우리는 속죄소를 통하여 우리를 무한히 용서하시며 우리를 만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구약시대 은혜의 보좌 앞에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시대 우리는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은혜의 보좌 앞에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보좌 앞에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는 것이다.

구약시대 지성소는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었던 곳이다.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그 하나님의 뜻에 헌신할 수 있는 민족이 된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지성소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분이 성막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중심이 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 되는 백성을 일으키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자원함으로 구하는 당신의 백성을 만나시기 원하신다. 그들을 당신의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기 원하신다. 성막이 없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금송아지 우상에게로 이끌렸다. 이 시대에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디로 이끌릴까? 그들 역시 하나님이 아닌 시대의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불순종으로 인해 창조 질서가 무너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창조 때 부여 받은 존귀함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우리에게 에덴이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존귀함을 회복할 수 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나주시는 성소가 있는가? 여러분의 죄와 허물이 덮이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회복되는 지성소가 있는가? 바라기는 이제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그분이 임재하시는 성소를 준비할 수 있길 바란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길이요 휘장은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로 가는 길을 여셨다. 그 성소에서 에덴이 회복되길 소망한다. 그 성소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이 예수님의 보혈로 덮이는 은혜가 있길 소망한다. 그 성소에서 깨어졌던 우리의 존귀함이 회복되길 소망한다. 그 성소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가 행할 일을 말씀해 주실 때 우리 삶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부흥은 예배가 회복되는 곳에서 일어난다. 얼마 전 있었던 애즈베리 대학의 부흥도 예배의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우리의 삶에 예배가 회복되길 원한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가 회복되길 원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존귀한 자로 세워 지길 소망한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기 원하신다. 여러분이 그런 통로가 되길 원한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있는 자리,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캠퍼스에서 부흥의 통로가 되어 광야와 같은 곳에 에덴을 회복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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