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20 성지행전: 소돔과 고모라- 욕망의 방향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3월 11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0 욕망의 방향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 16:49-50)

우리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다. 욕망 그 자체는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욕망의 방향이 문제다. 욕망이 악한 것을 향해 달려 간다면 그것은 악한 욕망이 되며, 선한 것을 향해 달려 간다면 그것은 선한 욕망이 된다. 프랑스 철학자 라캉의 욕망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한다. 내가 구매했던 물건들은 어쩌면 나의 욕망이 아니라 부모님이나 친구들, 또는 사회가 욕망하는 것을 선택한 것인지 모른다. 오늘 우리가 가게 될 소돔과 고모라는 욕망의 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도시를 선택했던 롯은 과연 행복했을까? 그는 그가 욕망했던 바를 이루었을까? 오늘을 소돔과 고모라 지역 브리핑을 겸해 말씀을 나누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소돔과 고모라는 어디 있었을까? 그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 고고학적인 증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유력한 후보지 중 하나는 사해 동쪽 요르단 쪽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가나안의 경계를 설명하면서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가 언급된다. 10:19,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이 도시들을 선으로 연결하면 가나안의 경계가 나온다. 이 경계에 따르면 소돔과 고모라는 사해의 서쪽에 위치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해 동쪽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모압과 암몬 족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가는 고모라 지역은 바로 이 가나안 경계 안에 있는 곳이다.

롯이 선택할 당시만 해도 소돔과 고모라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성경은 당시 소돔과 고모라가 에덴 동산과 같고, 문명이 발달했던 애굽 땅과 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도시를 누가 욕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도시는 사해 옆에 위치해 있었다. 사해는 지금도 소금 공장이 있는데, 바닷물을 떠 놓고 말리기만 해도 쉽게 소금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고대에는 소금을 구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소금은 금과 맞먹는 재화였다. 고대 사회에서는 소금으로 품삯을 지불하기도 했다. 월급을 뜻하는 ‘쎌러리'(salary)가 ‘쏠트'(salt)에서 온 말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바로 이 사해 소금을 통해 큰 부를 누렸던 도시였다. 그러나 풍요 뒤에는 그 풍요 자체를 욕망하는 사람들의 은밀한 타락이 있었다. 풍요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여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했고, 풍요가 사람들의 귀를 닫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했다. 소돔과 고모라는 어떻게 타락했을까?

에스겔은 소돔의 죄악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16:49-50,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소돔의 첫번째 죄는 교만함이다. 교만함은 히브리어로 ‘가온(גאון)’이다. 이 말은 ‘올라가다’라는 뜻의 ‘가아(גאה)’에서 온 것이다. 부를 얻으면 사회적 지위가 올라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를 욕망한다. 그러나 지위가 올라갔을 때 쉽게 빠질 수 있는 덫이 바로 교만이다. 우리는 올라갔을 때 나보다 아래에 있는 것들을 내려다 보게 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의 삶과 지위가 올라갈 때 우리는 자랑하고 싶은 것이 많아진다. 이러한 생의 자랑은 쉽게 우리를 교만으로 이끈다. 소돔과 고모라에 살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만 때문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는 곳에는 죄악이 무성하게 될 뿐이다.

소돔의 두번째 죄는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었다. 이 도시에는 빵이 넘쳐났다. 일을 많이 안 해도 먹고 살 만하니 사람들은 육신의 쾌락을 쫒게 되었다. 경제적 부가 영적 타락과 안일함을 가져온 것이다. 예수님은 돈을 맘몬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의 마음을 훔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력한 신이 바로 맘몬이다. 그만큼 돈은 우리가 하나님을도 저버릴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소돔의 세번째 죄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않은 것이다. ‘도와주지 않았다’는 원어로 ‘로 헤헤지카(לא החזיקה)’인데, 그들을 강하게(하자크) 해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 가난한 사람은 그들이 돌보거나 사랑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더 부해지고 강해지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소돔의 네번째 죄는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이었다. ‘가증한 일’은 원어로 ‘토에바(תועבה)’다. 구역질 나는 것, 우상숭배라는 뜻이다. 그런데 레위기서 18장 22절은 남자가 남자와 동침하는 일을 가증한 일, 즉  ‘토에바’라고 표현한다. 소돔 사람들은 롯을 방문한 두 천사와 상관하길 원했다. 즉, 성적인 관계를 욕망했던 것이다. 신약 성경도 소돔의 대표적인 죄를 성적 타락으로 묘사한다. 1:7, “소돔과 고모라와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하나님은 이 타락한 도시를 심판하셔야 했다. 그래서 후세대를 위한 본보기로 삼고자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도시를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신다. 19:24-25, “여호와께서 하늘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성들과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것을 엎어 멸하셨더라오늘 우리가 가게 될 고모라 지역에서는 그 당시 다 연소 되지 않고 흙 속에 박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유황들을 발견할 수 있다.

롯은 이 도시에서 행복했을까? 그는 소돔의 겉모습에 끌려 소돔을 욕망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신약성경은 심판 당시 롯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벧후 2:6-8,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롯은 최소한 아브라함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두가 욕망하는 도시에 살면서도 심령이 상하며 고통 당했던 것이다.  

부(富)는 가난한 사람들이 욕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성(性)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욕망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문제는 그 욕망의 방향이다. 지금 우리는 어쩌면 소돔보다 더 타락한 세속도시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를 이렇게 묘사하신다. 17:28-30, “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불과 유황의 심판은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니다. 미래에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한번 더 있게 될 심판인 것이다. 요한계시록도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14:9-10, “ 다른 천사 셋째가 뒤를 따라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자 그렇다면 세속도시에 사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언제 행복한지 스스로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은 쉽게 타인의 욕망에 감염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욕망하는 것이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소돔의 욕망에 감염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소돔이 아니라 소돔과 반대되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고, 그래야 정말 행복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맹목적인 부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해지길 욕망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막9:35)” 우리는 다른 사람들 위에 높아지기 보다 사람들 중의 끝이 되길 욕망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섬기며 그들을 강하게 해 주길 욕망해야 한다. 아굴이란 사람은 잠언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 30:7-9) 우리는 배부른 성공이 아니라 빵을 나눌 수 있는 넉넉함과 하나님 경외함을 욕망해야 한다. 바울은 말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남편들은 다른 관계가 아니라 아내 사랑하기를 더욱 욕망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욕망했다. 이것이 우리의 욕망이 되어야 한다. 바라기는 우리의 욕망의 방향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있음으로 우리의 욕망을 통해 의의 열매가 이 땅에 심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