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25 일상의 거룩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4월 29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5 일상의 거룩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 19:2)

이번 주 토라포션의 제목은 ‘케도쉼(קדשים)’이다. ‘너희는 거룩하라’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던져진 명령이었다. 이 명령에서 우리는 거룩한 삶이 홀로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거룩하라’는 명령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19장 6절에서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선언하셨다. 여기서 “되리라”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티히유’다. 이것은 미완료태인데, 장차 어떠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선언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티히유”라는 미완료태가 사용되었다. “케도쉼 티히유” 이것은 거룩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라는 명령이라기 보다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라는 존재에 대한 명령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었을까? 오늘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이 왜 거룩한 존재가 되어야 할까? 그냥 자유롭게 살고 싶은 대로 살면 안 되는 걸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이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신명기 10장 17~19절은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이 본문에서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그들에게 떡과 옷을 주시며 그들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거룩은 현실과 분리된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일상에서 구체적인 돌봄의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 그들을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실을 기억하여 나그네를 사랑하고, 그들을 자유케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거룩한 삶이었던 것이다.

오늘 본문인 19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기 위한 많은 계명들이 나온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19: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우리 중 진화를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각 사람은 부모를 통해 세상에 존재한다. 물론 부모님의 실수나 연약함 때문에 관계가 힘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우리 생명을 가능케 하신 존재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부모님은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안식을 모른 채 노동에 시달렸다. 그들은 시간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바로의 종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시간에는 주인이 있음을 알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일주일에 하루 노동을 멈추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거룩한 삶인 것이다.

19:4,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4절은 헛된 우상들을 향해 얼굴을 들지 말라고 명령한다. 우상의 본질은 본문의 표현처럼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즉 우상은 나의 욕심과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나의 삶이 나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우상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반드시 거룩과 거리가 멀어진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성경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성공과 풍요를 보장해주는 분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오해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잘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위하여” 세상의 우상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거룩인 것이다.

레 19:9-10,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구약시대 이 말씀 때문에 출세한 사람이 있다. 보아스다. 그는 이방인이었던 룻이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 보아스는 이 일을 통해 룻과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자손을 통해 다윗과 예수님이 태어나게 된다. 보아스는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자기 일처럼 돌봐주다가 하나님의 구속사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추수할 때 우리의 본능은 무엇이겠는가? 내 밭의 곡식은 한 톨도 남김없이 다 내 곡간에 쌓아두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본능을 누르고 가난한 사람과 이방인을 위해 이삭을 남겨두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거룩인 것이다. 거룩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거룩은 내가 나중에 성공해서 기부금을 많이 내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기회를 만들어 베푸는 것이 거룩인 것이다. 내 것을 움켜잡지 않고 흘리고 다니는 것이 거룩인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주변에서 우리를 당신의 거룩에 초대하신다. 그 일상은 힘 있는 자의 테이블이 아니라 바로 힘 없는 고아와 과부가 있는 곳이다. 우리가 나의 인간적인 기호나 편견을 버리고 연약한 사람들을 섬길 때, 하나님은 그것을 거룩하게 보시는 것이다. 거룩은 이처럼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 존재 안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거룩인 것이다.

레 19:17-18,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모든 이웃이 다 사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미워하고 판단하게 되는 여러 이웃들을 만난다. 그런 이웃들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 사람을 견책하라고 말한다. 견책하는 것은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침묵하고 있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라는 것이다. 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직면이 아니라 사랑으로 직면하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내가 보복하리라 (신 35:32)”고 말씀하신 분이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의 감정까지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당신의 거룩으로 초대하신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미워하고 원수 갚고 싶은 게 우리의 본능이지만, 그 본능을 잠재우고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선택할 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거룩하다’고 보시는 것이다.

이웃 사랑에 대한 또 다른 계명이 있다. 레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기서 거류민은 히브리어로 ‘게르(גר)’다. ‘이방인, 외국인’을 말한다. 너희 가운데 살고있는 이방인, 외국인을 자기 같이 사랑하는 명령이다. 이 명령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보다 더 어려운 명령이다. ‘이웃’은 나와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거류민’은 나와는 모든 것이 다른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공유할 만한 것이 별로 없는 낯선 사람들이기에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를 좀처럼 찾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류민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근거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도 과거 거류민이었기 때문에 지금 너희와 함께 사는 거류민들에게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다”라는 말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느껴진다. 하나님의 관심은 그가 택한 백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관심은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열방의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것이 거룩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거룩하라!” 우리는 이 명령을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루어가야 한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성공해서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골방에서 큐티를 빼먹지 않고, 기도 많이 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모를 거역하는 지금 이 세대에서 우리는 부모를 공경함으로 거룩을 이뤄야 한다. 안식없이 노동하는 이 세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안식일을 지킴으로 거룩을 이뤄야 한다. 쉽게 미워하고 보복하는 이 세대에서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를 선택함으로 거룩을 이뤄야 한다. 모두가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분주한 세대에서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물질의 이삭, 시간의 이삭을 흘림으로 거룩을 이뤄야 한다.

지금은 힘이 있는 사람이 대우받는 시대다. 가진 자가 갑질해도 어쩔 수 없이 참고 살아야 하는 사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내가 불행한 꼴 당하며 살지 않기 위해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크기의 성공과 행복을 성취하려고 애쓰며 산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성공해야 남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지금 나의 일상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려는 시도를 유보한다.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비극이자 교회의 비극이다. 교회 안에 성도들은 많은데, 우리 주변의 일상에서 거룩한 사람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거룩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이웃을 더욱 사랑하겠다는 결단이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거룩하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하나님 자신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행복 때문이다. 10: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너희는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결국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누가 행복한지 살펴보라. ‘나를 위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거룩을 추구하는 자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세대에서 거룩한 백성들을 일으키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 떠는 이 백성들을 통하여 인류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기 원하신다. 그래서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려 하기 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 사람이 되야 한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힘이 있다고, 똑똑하다고 그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비판과 미움 대신에 끊임없이 일상 속에서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거룩한 백성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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