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33 죽음의 해법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7월 1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3 죽음의 해법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19:20)

죽음은 너무도 슬픈 이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고 죽음 앞에서 숙연해진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올 현실이지만 죽음에 대해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우리는 죽음 앞에서 당황하고 쩔쩔매게 된다. 이번 주 토라포션 후카트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미리암이 죽었고, 아론도 죽었다. 모세도 광야에서 죽을 것이란 선고를 듣게 된다. 광야 40년이 지나는 동안 이스라엘 새로운 세대는 광야 1세대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다. 고라의 반역으로 지도자 250명이 일시에 죽었다. 염병으로 인해 하루에 만 사천 칠백 명이 죽었다. 가까운 삶의 현장에서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과 고통일 것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1세대 전체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이처럼 죽음은 가나안 진입을 앞 두고 새로운 세대들이 풀어야 할 문제였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음으로 인한 오염을 씻어내야 했다. 그리고 죽음으로 인한 절망도 씻어내야 했다. 하나님은 이 시점에서 죽음에 대한 해법으로 특별한 율례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붉은 암송아지로 재를 만들어 물에 섞은 뒤 그 잿물로 몸을 씻으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붉은 암송아지 재의 율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역시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그 해법을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19:2-3,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너는 그것을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것이요 그는 그것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서 자기 목전에서 잡게 것이며일반적으로 속죄제는 소나 양을 잡는 피의 제사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런 제사만 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은 사람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멈춰서서 피의 제사를 드려야 했다면 가나안을 향한 행군은 진행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하나님은 붉은 암송아지 한 마리를 태워 그 재를 진영 밖 정한 곳에 두게 하셨다. 그리고 사람이 부정해졌을 때 그 재를 가져다가 물에 타서 우슬초로 찍어 뿌리고 다시 진영 안으로 들어오게 하셨다. 이 율례는 성막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정결케 하는 율례였다.

구약 성경은 죽음과 접촉하는 것을 부정하다고 말한다. 죽음은 죄의 결과 맞이 하게 되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과 접촉한 사람은 반드시 정결케 해야 한다고 말한다. 19:20,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결함을 위해 붉은 암송아지 재의 규례를 만드셨다.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를 매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불살라 재로 만들라고 하셨고, 그 재를 흐르는 물에 섞어 바르면 정결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으면 한 줌의 재가 된다. 재는 소멸을 상징하는 것이다. 흐르는 물은 생명의 흐름을 상징한다. 소멸을 상징하는 재가 생명의 흐름을 상징하는 물에 섞인다는 것은 삶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한 세대는 죽지만 다른 세대가 태어나고, 그 흐름을 간다. 우리 다음 세대는 우리가 시작했던 일을 계속하고 우리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 죽지 않고 살게 된다. 이런 면에서 인생은 끝없는 흐름이고, 우리의 흔적은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붉은 암송아지 재의 규례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이 규례만큼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규례는 단순히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을 따라 믿음으로 바르면 부정한 자가 정결케 되는 규례였다. 따라서 이 규례는 철저히 믿음으로 행하는 규례였다.

전도자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3:19-20,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흙으로 돌아가나니 곳으로 가거니와 톨스토이는 전도자가 느낀 것처럼 모두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삶의 무의미함에 압도당했다. 그는 한 때 자살도 생각했다. 그를 괴롭였던 질문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불가피성에 의해 소멸되지 않을 내 삶의 의미가 있는가?”였다. 그는 과학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 답은  “공간의 무한과 시간의 무한에서 무한히 작은 입자들이 무한히 복잡하게 변이한다”는 것뿐이었다. 과학은 목적과 의미가 아니라 원인과 결과를 다루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종교적 믿음 만이 삶을 무의미함에서 구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는 <고백>이라는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박식하고 현명한 사람이 제시하는 이성적 지식은 삶의 의미를 부정합니다… 신앙은 생명의 힘입니다. 사람이 산다면 무엇인가를 믿어야 합니다. 유한한 자의 환상을 이해한다면 그는 무한자를 믿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Rational knowledge, as presented by the learned and wise, negates the meaning of life… Faith is the force of life. If a man lives, then he must believe in something … If he does understand the illusion of the finite, he is bound to believe in the infinite.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live.) 따라서 죽음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이성적 지식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어 믿음으로 행하는 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재가 생명을 상징하는 물에 섞이고, 그것이 뿌려진 자들이 정결케 되는 붉은 암송아지 재의 의식은 그들이 성소에 들어가 영원하신 하나님과 다시 접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붉은 암송아지 재의 규례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흠 없는 붉은 암송아지가 나타나면 제 3성전을 세우라는 싸인으로 알고 그것이 나타나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우리도 붉은 암송아지가 나타나길 기다려야 할까? 민수기에 묘사된 붉은 암송아지에는 자격 조건이 있다. 흠이 없어야 하고, 멍에를 메 본 적이 없어야 한다. 붉은 색이어야 하며, 진영 밖에서 잡아야 하며, 다 태워져야 한다. 이런 면에서 붉은 암송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흠 없는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해 이 땅에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죄의 멍에를 메 본 적이 없는 분이셨다. 그 분은 영문 밖으로 끌려가 붉은 피를 흘리며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사하기시 위해 자신의 전부를 다 내어 주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이 말씀에 의하면 붉은 암송아지 재의 규례는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였을 뿐이다. 즉 부정한 자가 정결케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정결한 자로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결을 의미하는 ‘타호르(טהור)’는 육체가 겉으로 깨끗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정결은 하나님 앞에 내가 설 수 있는 자인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정결하여 그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의로 하나님의 기준과 그 분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아무도 스스로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다. 죄와 사망에 접촉하여 모두가 부정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우리 안에 있는 부정함이 처리 되어야만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자격으로 나아가는가?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죄와 사망의 권세로 부정해진 자들이다. 부정을 씻고 다시 정결해지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정결해 져야 한다. 무엇으로 정결해 지는가? 정결은 내 안에서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암송아지의 잿물을 믿음으로 뿌렸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우리 마음에 뿌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설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길이요 휘장은 그의 육체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그 분의 보혈을 마음에 뿌림으로 정결함을 얻는다. 우리는 악한 세상에서 죄로 인해 부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의 악함이 문제가 아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사도 요한은 말한다. 12:11, “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믿음의 사람들은 어린 양의 피로 승리한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보증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 피를 날마다 뿌려야 한다. 사탄은 죄와 사망의 권세로 우리를 부정케 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로 만들려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셨다. 성경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2:14-15,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시며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죽음의 위협에서 놓임 받으려면 답은 예수님 밖에 없다.죽음의 대가를 치르시고, 자신의 삶을 다 태워 남기신 예수님의 보혈 만이 사망 권세를 무력화시키는 유일한 도구인 것이다. 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그 분 앞에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이 필요한가? 붉은 암송아지의 재가 아니다. 오직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다. 그 피를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 만이 우리를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요즘 부자들은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소위 ‘영생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알토스 랩’라는 생명공학 회사에 투자했다. 이 회사는 인간 유전자를 편집해 사람의 노화를 방지하거나 다시 젊게 만드는 목표를 갖고 있다. ‘페이팔’을 창업한 피터 틸 역시 ‘유니티 바이오테크놀러지’라는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이 회사 역시 인간의 생명력을 확장해 노화나 질병을 겪지 않게 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목표를 갖고 있다. 구글 역시 노화 방지 연구업체인 ‘캘리코’를 설립했다. 이처럼 세계 최대 부자들은 돈으로 ‘영생’의 꿈을 이루려 하고 있다. 실리콘 밸리에서 행하고 있는 이러한 영생 프로젝트가 죽음에 대한 해법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생은 죽음의 해법이 아니다. 죽음의 해법은 과학과 기술의 힘을 통해 생명을 연장하는 데 있지 않다. 죽음의 해법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정결(타홀)’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정결하게 되어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 죽음에 대한 유일한 해법인 것이다.

상실이 일상이 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가까운 동네에서 테러가 발생하고, 팬데믹이 일상의 경험이 되었다. 이러한 위험과 함께 상실은 피할 수 없는 모든 인간의 운명이다. 누구나 어느 시점에선 부모를 잃고, 형제를 잃고, 친구들을 잃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죽음이라는 절망 속에서 사단은 사망의 권세를 통해 인간 지배를 확장하려 할 것이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 때문에, 죽음과의 접촉 때문에 우리는 부정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죽음의 문제, 우리가 부정하게 되는 이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한다. 이 문제를 푸는 해법은 과학이 아니라, 이성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에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그 피로 정결케 된 자로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과 연결되어 이 덧없는 세상에서도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90: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하나님이 “누구 누구야, 이제 티끌로 돌아가라”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티끌로 돌아가야 한다. 죽음은 우리의 일상이고 현실이다. 한 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그리하여 산 자와 죽은 자가 갈리는 때가 오게 된다. 오직 믿음 안에 산 자 만이 죽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죽음만 생각하면 우리 인생은 한없이 덧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 안에서 영원히 이어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죽음이 절망이 되고 위협이 될 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보혈에 있다. 그 피를 믿음으로 뿌려 정결케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사망 권세로 우리를 위협하는 이 부정한 세대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어가는 우리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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