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 강해 11 다윗의 애통

2023년 12월 23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서 강해 11 다윗의 애통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삼하 1:11-12)

슬픔은 환영 받는 감정이 아니다. 가뜩이나 우울한 일이 많은 현대인에게 슬픔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내게는 찾아 오지 않았으면 하는 감정이다. 그래서 슬픈 일이 생기면 우리는 보통 다른 오락거리나 나를 자극하는 것을 찾아 그 슬픔에서 빨리 벗어나려 한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잘 슬퍼할 줄 모른다. 그러다 보니 남의 슬픔에 대해서도 냉담하거나 잘 공감하지 못한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큰 슬픔에 빠진다. 사울 왕이 죽었기 때문이다. 자 그런데 좀 이상하다. 자기를 죽이려던 원수, 사울이 죽었는데 그가 슬퍼했다는 게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윗 개인적으로는 춤이라도 춰야 할만큼 기쁜 소식이었다. 왜냐면 사울의 죽음은 그의 피난 생활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가 왕이 되는 길이 열렸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슬퍼했다. 어떻게 다윗은 원수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삼상 28:4,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사울이 마주한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이었다. 가나안 해변에 머물러 있던 블레셋 족속들은 내륙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사울은 다급했다.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다. 사울은 그 여인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불러 이런 응답을 듣게 된다. 삼상 28:1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전쟁에서 죽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사울의 죽음은 이처럼 예고된 죽음이었다. 결국 사울과 요나단은 길보아산에서 전사하고 만다.

당시 시글락에 있었던 다윗은 한 아말렉 청년으로부터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청년의 말에 의하면 그는 죽어가는 사울의 요청으로 사울을 죽인다. 그리고 사울의 머리에 있던 왕관을 벗겨서 다윗에게로 가져온다.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빈 왕관이 다윗 앞에 있었다. 아말렉 청년은 다윗이 자신의 보고에 기뻐하며 자신에게 상이라도 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옷을 잡아 찢는다. 삼하 1:11-12,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옷을 찢는 행동은 히브리어로 ‘크리야(קריע)’다. 유대인들은 슬픔을 가장 격렬하게 표현하는 행위로 옷을 찢는다. 다윗만 옷을 찢은 게 아니었다. 그와 함께 했던 약 600명의 사람들도 다 옷을 찢었다. 쫓겨 다니느라 옷도 많지 않았을 텐데 온 공동체가 옷을 찢으며 사울을 잃은 슬픔에 동참한 것이다. 다윗과 그의 공동체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족속이 패배하여 많은 사람이 죽은 것 때문에도 슬퍼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애통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사울과의 사사로운 감정을 넘어서 이스라엘을 지키던 왕의 죽음과 여호와의 백성들이 죽게 된 국가적인 상실을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어서 그 아말렉 청년을 꾸짖는다. 삼하 1:1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다윗에게 사울은 여전히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었다. 그것이 그의 신학이었다. 다윗은 사울 때문에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자를 죽이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했다. 이처럼 그는 모든 사건을 그의 신학에 따라 이해하려 했다. 사울이 자신에게 저질렀던 모든 악행보다 하나님이 그를 기름부어 세웠다는 사실이 그에겐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는 사울이 죽고 나서 이런 시편을 남긴다. 18:1-3,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다윗은 절대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노래했다. 그는 원수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원수의 손에서 자신을 건지실 분이 하나님이심을 신뢰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고 완전히 행하고자 결심했다. 그는 인간적인 힘을 사용하여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시간이 이를 때를 기다렸다.

그는 또 이렇게 고백한다. 18:23-24,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다윗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 힘들게 지켜왔던 자신의 원칙으로 인해 더욱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을 통해 그는 결과적으로 하나님께만 피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만 그의 방패와 요새가 되는 견고한 영혼이 되었다. 그는 아둘람 굴에서 하나님께 억울함을 토하며 숱한 눈물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신뢰하며 절대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갔다.

다윗은 죽은 사울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애가를 불렀다. 삼하 1:17-18,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다윗은 슬픈 노래를 지어 자신과 함께한 공동체 뿐만이 아니라 전체 유다 족속에게 그 노래를 가르치도록 명령한다. 다윗은 이 애가에서 사울과 요나단을 칭송한다. 두 용사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들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였음을 기념한다. 다윗은 그들을 잃어버린 것이 모두의 상실임을 노래했다. 상실을 함께 슬퍼하는 시간을 통해 해결되지 않았던 묵은 상처들은 치유된다. 이처럼 이스라엘 공동체는 함께 왕을 잃은 슬픔을 공유하면서 이제 새로운 다윗 왕조를 향해 일어설 준비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윗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절대 믿음의 사람은 원수를 위해서도 애가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다. 원수를 위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영혼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사람의 반응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영혼이다. 그런 사람의 앞 길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어지는 사무엘하 2장에서 다윗은 드디어 유대 지역의 왕이 된다. 만약 다윗이 아말렉 청년이 사울의 왕관을 가져왔을 때 그것을 기뻐하며 자신의 머리에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권좌는 더 빨리 시작됐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권좌는 다윗의 삶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의 가장 우선되는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윗은 왕관으로 자신을 유혹한 아말렉 청년을 가차없이 처단하고 애가를 불렀던 것이다. 사울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애가는 왕을 잃고 슬픔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픔을 달래 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통합된 이스라엘을 만드는 결정적인 파토스를 만들어 낸다. ‘이 사람은 원수를 위해서도 울 수 있는 사람이구나, 이 사람은 우리 민족의 상실 때문에 울 수 있는 사람이구나’ 백성들은 다윗의 애통을 보았고, 이 애통은 결국 이스라엘을 하나로 만드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다윗은 이어지는 애가에서 이렇게 고백한다.삼하 1: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다윗은 그의 원수였던 사울의 치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 사울은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한 용사였다. 다윗은 자기 중심적인 이해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주목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영광이 떨어진 것에 대해 애통하는 자였다. 하나님은 이처럼 애통하는 자, 다윗에게 당신의 나라를 맡기셨다.

우리도 살면서 다윗처럼 나를 죽이려는 원수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럴 때 복수가 나의 삶의 목표가 되어선 안될 것이다. 원수를 저주하는 것이 나의 기도가 되어선 안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오히려 원수를 위해서도 애통할 수 있는 자가 되야 할 것이다. 성경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 울 수 있는 자를 찾으신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적인 권모술수가 능한 자가 아니라 순전하게 연단된 한 사람을 통해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능력 있는 인물이 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이 땅에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는 여러분이 애통하는 자가 되길 축원한다. 그리하여 그 애통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올 해 베들레헴에서는 성탄절 행사가 없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반짝이는 불빛도 없다. 나사렛과 예루살렘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땅의 전쟁으로 인해 우는 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이번 성탄 절기가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기 위함이었다. 이 땅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절대 순복한 이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절대 순복한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그리하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고통 받는 현실 때문에 애통해 하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따르는 자들이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애통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길 바란다.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만날 때 그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원수가 주리거든 그들을 먹이며 그들을 위해 애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바라기는 우리의 애통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순전하게 세워지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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