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서 강해 3 수치의 종말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24. 3. 2. 이익환 목사

여호수아서 강해 3 수치의 종말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 5:8-9)

수치심은 자기 스스로를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다. 잊을 만 하면 찾아와 소리 없이 나를 공격하는 감정이다. 심리학자인 브레네 브라운은 우리 사회가 ‘수치심을 권하는 사회’라고 진단한다. 사회가 개인에게 ‘이런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기준을 강요하며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많은 마케팅 전략들이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세상은 그렇게 우리에게 수치를 주입한다. 그래서 “너는 뭔가 부족해, 너는 더 강해져야 해, 너는 더 예뻐져야 해, 너는 더 성공해야 해”라는 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전하는 메세지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계속해서 의심한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뭔가 부족한 존재로 평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강해지려 한다. 더 노력 하고, 더 일하고,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성취를 이루어 내려 한다. 수치에서 벗어나고자 세상의 노예로 살아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을 갉아 먹는 존재 가치의 불안함을 잠재우려 한다. 그런데 성공해서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 이 불안함이 사라질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덮으려는 시도 하에 완벽함을 추구할수록 그 사람 안에 있는 수치심은 커져만 간다. 세상의 문화에 길들여 질수록 그 사람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건 수치심인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의 수치를 그들에게서 떠나가게 했다고 선포하신다. 그들의 수치는 어떻게 끝나게 되었을까?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수치심은 어떻게 끝나게 될까? 오늘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너 길갈이란 곳에 진을 친다. 성경은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5:1,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가나안 족속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 기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며 그들은 정신을 잃었다. 분위기가 이쯤 되면 이스라엘 군대가 바로 여리고를 공격해도 그 도시가 함락되는 건 시간 문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상식 밖의 명령을 내리신다.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다. 할례를 한 사람은 그 고통을 안다. 삼사일 정도는 움직이는 게 힘들다. 전쟁을 앞둔 위기 상황에서 왜 할례가 필요했을까?

최근 고고학 발견에 의하면 길갈의 위치는 여리고 바로 옆이 아니라 그 북쪽 30km 지점에 있는 Argaman이라는 주장이 더 신빙성 있게 제시된다. 그곳은 실제로 화강암으로 된 산이 있다. 5: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거기에 가면 정으로 돌을 쪼아 부싯돌 칼을 만든 흔적들이 발견된다. 실제로 부싯돌 칼 같은 날카로운 돌들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약 70만명 정도의 이스라엘 남자들이 할례를 받은 것이다.

왜 할례를 받았을까?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수 5:4-5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광야에서는 계속 이동하는 삶을 사느라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할례를 받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월절을 지키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셨다. 출 12:48,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도대체 할례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셨던 것일까?

할례는 아브라함 때 시작되었다. 17:10-11,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하나님은 아브라함이 99세 때 이 명령을 하셨다. 이 때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꾸어 주셨다. 그것은 열국의 아비와 어미가 되라는 그들 정체성의 변화를 의미했다. 아브라함은 이름이 바뀐 이후 할례를 행했고 이듬해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얻게 된다. 이처럼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이자 그 시작이었다. 따라서 가나안 땅 정복에 앞서서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은 너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을 다시 몸에 새기라는 하나님의 요청이었다. 정체성의 변화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언약의 성취를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해야 할 과제였다.


그래서 70만 가량의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이 길갈에서 할례를 받은 것이다. 수 5:8-9,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길갈(גלגל)은 히브리 동사 갈랄(גלל)에서 온 말이다. 갈랄은 ‘굴려보내다’라는 뜻이다. 갈갈(גַלגַל)은 수레바퀴란 뜻인데, 현대 히브리어에서 자동차 타이어도 갈갈(גַלגַל)이다. ‘갈갈’대며 굴러 가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전쟁을 앞둔 긴박한 상황이지만 유월절을 닷새 앞두고 온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한다. 그가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라고 선포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때까지 갖고 있었던 애굽의 수치는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애굽 왕의 지배를 받으며 노예로 살아야 했다. 언약 백성이 언약의 땅에 살지 못하고 노예로 강요된 삶을 살았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겐 수치였을 것이다. 그들은 애굽에서 조롱과 멸시 받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할례를 통해 언약 백성임을 나타내는 것보다 그 사실을 애굽 사람들 앞에서 숨겨야 조롱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실이 그들에겐 수치였을 것이다. 압제하는 지배층은 노예를 부릴 때 일만 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정신을 노예화 시켜 노예로 살아가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힘들 때 마다 이 노예 근성이 나타났다. 그들은 스스로를 비하하며 노예로 살았던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출애굽을 했음에도 여전히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보신 애굽의 수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새로운 출발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이 애굽의 수치를 벗겨 내기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길갈에서 할례를 행함으로 그 수치를 굴려 보내기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할례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기 원하셨다. 그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다. 하나님 눈에 이스라엘 백성은 더이상 노예가 아니라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체로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언약을 주신 약속의 자녀였던 것이다. 할례는 그 사실을 그들의 몸과 마음에 새기는 행위였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치를 제거하심으로 가나안 땅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새로운 출발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새롭게 해야 했다.  

수치심은 실제로 사람과 하나님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는 힘이다. 수치가 있을 때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한다. 불순종한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은 뒤 자신이 벗은 줄을 알게 된다. 자신의 실체를 보고 수치심을 느낀 그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이처럼 인생에 수치가 주입된다. 수치가 주입된 아담의 이후 모습을 보면 그는 책임전가와 남 탓을 하며 자신의 수치를 모면하려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이처럼 자신의 실체를 숨기기 위해 하나님을 멀리 하게 된다. 또한 수치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끊어버리는 힘이 있다. 수치심은 나의 가치가 손상되는 상황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숨어 버린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오랜 시간 수치를 내면화 했다. 그들은 노예로 길들여졌고, 그래서 애굽 사람들과 구별됨 없이 죄 아래 살아갔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도, 다른 이웃들에게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살을 찢고 마음을 찢는 할례 없이는 그 부끄러운 기억들을 사라지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길갈에서 애굽의 수치를 굴려 보내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집단으로 치유하고 회복하신 것이다.

길갈에 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대 관심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장 눈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일이 그들에게 중요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급하지 않으셨다. 그 성을 주시기에 앞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셨다. “이 땅은 너희가 나의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약속대로 너희에게 주는 것을 너희는 명심하겠는가?’ 하나님은 이 사실을 그들의 할례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기 원하셨던 것이다.

할례를 통해 애굽의 수치를 떠나보낸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킨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소산물을 먹고, 그것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그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호수아 6장에서는 여리고 전투의 장면이 시작된다. 그들이 할례를 통해 다시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몸과 마음에 새겼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 준비가 된 것이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확실히 세워지지 않으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도, 그 땅의 풍성한 소산물을 먹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할례는 가나안 땅의 지배 문화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살겠다는 선포와도 같은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우리에게도 이런 맥락에서 할례가 필요하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표현했다. 2:11-15, “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 찢기심으로 우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살리신 것이다. 범죄와 무할례 가운데 있었던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애굽의 수치가 남아 있는 존재들이었다. 사탄은 이러한 우리의 수치심을 자극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 수도 없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마음의 할례를 행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는 모든 사단의 참소를 십자가를 통해 굴러가게 하셨다. 우리가 이전에 죄의 노예였을 때의 수치를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그 수치와 기억을 깨끗이 씻어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정체성이 변화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잘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백성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언약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이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 편법과 세상의 방식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은 오늘도 우리에게 수치를 주입하며 우리의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더 완전한 자가 되라고 속이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는 더이상 부족한 자가 아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할 때 주님이 우리의 의가 되시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에 새기는 우리가 되길 기도한다. 우리의 수치를 끝내고 하나님께,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신 가나안에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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