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24년 9월 21일 설교 이익환 목사
갈라디아서 강해 5 사랑을 구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 5:6)
프랑스의 시인 라마르틴이 이런 말을 했다. “To love for the sake of being loved is human, but to love for the sake of loving is angelic.”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것은 천사에 가깝다.” 우리 중 누가 여기서 말하는 천사에 가까울까? 우리는 흔히 누군가에게 사랑 받기 위해 누군가를 사랑한다. 아니면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사랑한다. 어떤 사람이 내 조건에 맞지 않거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사랑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뭘까? 그것은 어떤 조건에 의한 사랑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교리적인 논쟁으로 인한 혼돈이 있었다. 바울은 혼돈 속에 있었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의 결론을 제시한다. 그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늘은 어떤 맥락에서 이러한 결론이 나왔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는 오늘날 튀르키예의 중부 지역이다.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이었다. 그가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을 때 일부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한 가르침을 반대했다. 그래서 그들은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 가서 성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는 것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행하고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시도였고, 종의 멍에를 다시 메는 행위였다. 그래서 그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그들이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왜 그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게 될까? 그것은 할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부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죄에서 깨끗케 하신 사역이 완전하지 않기에 할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헛되게 만드는 주장인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바울은 할례를 받는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고 말한다. 율법은 선택적으로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바울은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자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바울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이렇게 평가한다. 갈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사람이 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될까? 율법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사람은 ‘나는 나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나란 인간은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구나’를 깨닫는 것은 복음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도저히 의로워질 수 없다는 나의 무능함에 대해 철저히 절망해야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 인간이 의로움을 얻게 되는 길을 제시한다. 롬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미치게 된다고 말한다.롬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 인간에 대한 죄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값을 치르지 않고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 것이다. 따라서 첫째, 내 스스로는 의인이 될 수 없다는 나의 무능함에 대한 절망, 둘째, 그런 나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믿음, 이 두가지가 바로 복음의 두 축인 것이다. 이 예수님의 완전한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여전히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자는 그래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성도가 율법이라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갈 5:5-6,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5절 문장에는 ‘가르(γαρ)’라는 접속사가 있는데, 이는 “왜냐하면”이란 뜻이다. 앞에서 얘기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의의 소망’ 즉 우리 인간이 진정한 의를 얻는 소망은 율법이 이루어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는 것과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이 아무 효력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믿음은 추상적인 말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로 표현되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역시 이론이 아니라 실제다. 하나님은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그 사랑을 입증하셨다. 롬 5:7-8,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내가 남들보다 더 의롭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가 남들보다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조건과 상관 없이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 역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로써 나타나는 믿음이 되길 원하신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은 ‘율법의 의’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율법 안에서 의를 이루려는 사람은 하나라도 뭔가를 이루면 그 의가 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뭔가를 하고, 그 공로를 자신에게 돌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에서 사랑은 헬라어로 ‘아가페(αγαπη)’다. 아가페는 인간 스스로 발휘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본질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말한다. 요일 4:10-11,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아가페의 사랑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아가페의 사랑은 조건을 보고 하는 사랑이 아니다.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하는 사랑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하는 사랑도 아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우리가 이미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에로스적인 사랑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어떠한 가치에 끌리는 사랑을 말한다. ‘예쁘다’라는 가치, ‘남자답다’란 가치에 끌리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가 끌리는 가치를 취함으로 자아를 확장하길 원한다. 그것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마다 끌리는 가치가 다르고, 원하는 자원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 사람의 ‘에로스’는 항상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서로가 원하는 가치가 충돌할 때 이 ‘에로스’는 나 자신의 끌림이 옳다고 주장하게 한다. 분열과 다툼이 있다는 것은 나의 사랑이 에로스 차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의 결론을 이렇게 말한다. 갈 5:13-14,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사랑 때문에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며 서로 사랑으로 종 노릇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다. 물론 사랑도 마땅히 행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 한다면 그 역시 율법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가페의 사랑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을 믿을 때, 우리는 내가 주님의 공로로 의로운 자가 되었고, 계속해서 의로운 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 소망을 가질 때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을 조건에 따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사랑, 아가페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 받을 조건도 안되고, 자격도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려면 이 아가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져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여기서 ‘다 이루다’는 헬라어로 ‘플레로오(πληρω)’이다. ‘완성하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자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사랑에 빚을 지고 있기에 늘 사랑을 갚으려는 사람, 그런 사람이 사랑으로 종 노릇 하며 율법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길 바란다. 바라기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