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4년 11월 16일 설교 이익환 목사
히브리서 4: 안식의 조건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 4:11)
현대인은 안식이 필요하다.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피로사회’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이 던지고 있는 화두는 이렇다. “더 많이 일하면 더 높은 성과를 인정받고 더 많은 보상을 얻는다.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거나 시키는 사람도 없건만 나는 나의 자유의지로 죽도록 일하고, 그 결과로 죽을 만큼 피로해 진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과연 주인인가, 노예인가?” 한병철 교수는 현대사회를 ‘성과사회’로 진단한다. 이 성과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사람들에게 주입한다. 그들은 마치 개인에게 관대한 자유를 부여하는 것 같지만 실상 그 이면에서는 높은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을 소외시킨다. 그래서 대다수의 개개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른 채 과잉 경쟁, 과잉 업무, 과잉 소비에 내몰리고 있다. 그래서 사회 전체가 피로해지는 것이다. 우울증이나 외로움, 분노는 이러한 피로사회의 결과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휴일에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육체적인 노동도 고되지만, 많은 현대인들이 감정 노동에 시달리며 부정적인 감정들 때문에 지친다. 여러분들은 잘 쉬고 있는가? 여러분 안에 안식이 있는가? AD 60년 경,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배척을 받아야 했다. 로마제국의 핍박도 가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제대로 된 경제활동을 하기도 힘들었다. 그들은 소외감과 외로움, 앞날에 대한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그들에게 안식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가 말하는 안식이 무엇일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히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여기서 ‘남아 있을지라도’라는 말의 헬라어는 ‘카탈레이포(καταλείπω)’인데, 이는 ‘포기하다’란 뜻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에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경악했던 것이다. 히 4: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다. 그것은 복음이었다. 마찬가지로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복음을 들었다. 이들에게나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하나님은 안식에 대한 복된 소식을 주셨다. 그러나 그들이 그 복음을 듣고도 그것을 자신들의 믿음과 결부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이 그들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히 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이 말씀에 의하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안식에 들어 가지만 복음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은 자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믿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모세를 따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 결과 ‘가나안’이라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홍해를 가르고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눈에 보이는 환경에 지배 당하여 믿음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목마른 광야의 현실에 절망했다. 그들은 거인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의 실상에 절망했다. 그들은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반응했지 하나님의 약속에 그들의 믿음을 결부시키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들은 가나안이라는 안식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말했다. 민 14: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상황에 압도 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을 받아들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이라는 안식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지파 리더로서의 책임을 회피 하지 않았다. 현실을 그들의 이성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반응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안식을 허락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맡기신 것이다.
고난은 믿음으로 풀어가야 한다. 이성으로 풀어 보려 하면 해법이 없다. 고난에 대해 이성으로 반응하면 절망과 원망과 비난만 남는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에 갔을 때 요셉은 보디발이 인간적으로 좋아서 그를 섬겼을까? 감옥이란 환경이 너무 좋아서, 옥중 죄수들이 괜찮은 사람들이라서 그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감옥은 죄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처한 환경과 고난에 이성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요셉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의 믿음을 결부시킨 것이다. 그는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제국을 맡기시고, 하나님 나라를 맡기신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때문에 괴로웠다. 다윗은 너무 괴로워 동굴 속에서 기도했지만 사울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권위자에 대해 그는 믿음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고난을 통과한 다윗에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맡기셨다. 우리 역시 새로운 환경이나 가까운 공동체 내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으로 반응하면 그 관계는 원망과 절망과 비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환경과 사람에게 지배 당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을 내려 놓고 믿음으로 반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역동을 일으키실 것이다.
히 4:8-9,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여호수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릴 수 있었던 안식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거기서 적으로부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안식의 전부였다면 다른 안식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당부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안식이 뭘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되는 안식을 말한다.
예수님은 인류의 깨어진 안식을 회복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도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한 뒤 그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히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 그것이 히브리 기자가 이야기 하는 우리에게 남겨진 안식인 것이다. 구약 시대 은혜의 보좌(mercy seat)는 염소의 피가 뿌려지며 백성들의 죄가 사해지고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던 곳이다. 신약 시대 은혜의 보좌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이 은혜를 회복할 때 우리의 영혼은 비로소 안식을 누리게 된다. 이 안식이 있어야 우리 삶에 갈등이 없어진다.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지고 그 분의 사랑이 부어지며,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샤밧(שבת)이란 말은 ‘멈추다’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을 멈춤으로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키는데 지극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러면서 정작 안식의 본질을 놓치고 만다. 샤밧(שבת)은 ‘슈브(שב)’와 ‘타브(ת)’가 합쳐진 단어다. 슈브는 ‘돌아가다’는 뜻이고, 타브는 ‘십자가’를 상징한다. 십자가로 돌아갈 때 진정한 샤밧, 안식이 있음을 이 글자는 보여준다. 우리가 알다시피 인류의 안식은 에덴동산에서 깨어졌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탐욕과 본능에 이끌렸을 때 하나님이 인류에게 허락하신 안식을 상실한 것이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그 선악을 알게 된 자가 낙원을 상실한 것이다. 우리 역시 우리의 옳고 그름의 이성적 기준에 따라서 살면 낙원을 잃게 된다. 안식을 잃게 된다. 우리는 나의 옛 자아와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십자가가 바로 안식의 조건인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저주를 끊으시고, 다시 인류가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길을 여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 사 11:2-3, “그의 위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우리 역시 은혜의 보좌 앞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을 구해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처럼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않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도구이자 안식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그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이 안식을 누리신 것처럼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호수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안식의 모형일 뿐이다. 1세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진정한 안식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결부하여 핍박 받는 현실을 바라보아야 했다. 우리 역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려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지 아니했던 본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문자적으로 모든 일을 멈추는 게 안식의 본질이 아니다. 불안한 내일에 대처하기 위해 내가 세운 우상들을 버리고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이 안식인 것이다. 높은 성을 쌓고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안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 안식의 본질인 것이다. 1세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제국과 유대 사회의 여러 압력들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안식을 포기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 했다. 그들은 헬라와 로마라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박해를 견디기보다, 믿음을 버리고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유혹이 있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유혹이 있는가? 피로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더 높은 사다리에 오르는 것이 여러분의 목표인가? 그것 때문에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진정한 안식을 포기하지는 않았는가?
세상은 더 많은 소유와 성공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는 안식이 필요하다. 매주 샤밧을 통해, 모든 것을 멈추는 안식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누가 시간의 주인인지, 누가 세상의 주인인지를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성공과 번영으로 미혹하는 세상의 우상들로부터 안식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시간과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안식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라기는 광야와 같이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믿음으로 반응하고, 내게 허락된 십자가를 감당함으로 진정한 안식에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