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4년 12월 28일 설교 이익환 목사
히브리서 10: 담대한 전진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히 10:35-36)
이스라엘 상황이 여전히 심각하다. 어제 새벽에도 후티 반군이 쏜 미사일이 날아왔다. 이제 전선이 예멘과 이란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하마스와의 휴전 협상도 올해 안에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이다.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 역시 심각하다. 대통령 권한 대행까지 탄핵이 결의되었다. 원화 환율은 1475원으로까지 치솟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회도 좌와 우로 급격히 나뉘고 있다. 세속화는 다수의 힘을 얻어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혼돈스러운 연말은 없었다. 내년을 소망스럽게 바라볼 전망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크리스천으로서 위축되기 쉬운 시대를 우린 살고 있다. 이러한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라는 히브리서의 말씀이다. 한 개인으로, 한 시민으로, 한 신앙인으로 무력감을 느끼는 이 때에 우리는 어떻게 담대함을 회복할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비결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히 10: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1세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그들의 삶에 빛이 임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곧 고난이라는 큰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그들 중에는 고난이 힘들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겪은 고난의 큰 싸움은 무엇이었을까? 히 10:33-34,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를 떠나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비방과 환난의 대상이 되었다. 환난으로 번역된 헬라어 ‘들립시스(θλιψεσις)’는 육체적 폭력으로 인한 고통을 뜻한다. 또한 ‘구경거리’로 번역된 헬라어 ‘데아트리조메노이(θεατριζομενοι)’는 극장이라는 뜻의 ‘데아트론(θεατρον)’에서 온 말이다. 이들은 실제로 극장과 같은 곳에 끌려가 공개적으로 조롱과 학대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옥에 갇힌 자들을 긍휼히 여겨 돕기도 하였다. 옥에 갇힌 자를 돌본다는 것은 그들과 동일한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위험한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봄으로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또한 이들 중에는 로마에서 추방 당하여 소유를 다 빼앗긴 사람들도 있었다. 사도행전에 그런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다. 그들은 AD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에서 쫓겨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추방당하면서 집과 토지를 빼앗겼다. 이처럼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제국의 권력과 동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상실감과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가 이 모든 핍박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고 말한다.‘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무엇인가?‘영구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메노(μενω)’인데 이는 ‘파괴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남아 있는’이란 뜻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땅에서 영구한 소유인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 확실한 지위와 소유를 얻기 위해 빼앗고 질서를 파괴하는 일들을 서슴지 않고 행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의 국회에서, 중동과 우크라이나에서 목격하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불안한 세상 속에서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담대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침 뱉음을 당하고 빼앗기는 상황을 기쁘게 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히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여기서 ‘큰 상’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상을 말한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게 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바울도 고난 받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편지 했다.딤후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고난의 무게를 견딘 자가 영광의 상을 받는 것이다.담대함을 버리지 않는 자가 큰 상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담대함’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파르레시아 (παρρησία)’다. 이 단어는 ‘옆에서’라는 뜻의 ‘파라 (παρα)’와 ‘말하다’란 뜻의 ‘흐레오 (ῥεω)가 결합된 말이다. “옆에서 말하다, 종이 아니라 친구로서 말하다”란 뜻이다. 숨김없이 해야 할 말을 확신을 가지고 하는 태도가 바로 ‘담대함’인 것이다. ‘담대함’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아마츠 (אמץ)’이다. 이 담대함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요구하신 마음의 자세였다. 수 1: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따라서 담대함은 세상의 평가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된 사람들이 취하는 자세이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판단해도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것을 말하고 행하는 사람이 바로 담대한 사람인 것이다.
‘파르레시아’라는 단어는 오늘 본문인 19절에도 나온다.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여기서 ‘담력’이 바로 ‘파르레시아’다. 구약시대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러나 누구든지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죽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지성소에 들어갈 때 금방울이 달린 옷을 입었고, 그의 허리에 끈을 묶고 들어갔다. 금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것은 대제사장이 죽은 것이기 때문에 지성소 밖에 있던 사람들은 끈을 당겨 그를 꺼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대제사장이 떨면서 들어 갔던 곳이 지성소였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다. 왜 일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성소로 가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 길은 20절 표현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육체를 찢어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다 씻었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1세기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우리들은 이제 구약 유대교의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가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역사적 팩트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담대한 전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하여 세 가지 사항을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당부한다. 지난 주 학교 헬라어 시간에 가정법 청유형 문장에 대해 배웠는데, 여기서 세 개의 가정법 청유형 동사가 씌였다. 첫번째 동사는 ‘프로세르코메싸 (προσερχωμεθα)’다.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자’란 뜻이다. 히 10:21-22,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나님께 나아갈 때 담대함이 생긴다. 결혼 전 저는 신대원 입학식 날 아내를 처음보고 매일 기도실에 가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자매로 향하는 모든 남학생들의 발모가지를 꺾으시고, 이 자매의 마음이 저에게로 향하게 해주옵소서” 매일 기도실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오면 담대해졌다.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자매가 거절해도 상관 없었다. 담대한 마음을 잃지 않은 결과 우리는 5개월 만에 결혼하게 되었다. 마음이 힘들어질 때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하는 것은 기도의 자리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담대한 전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 동사는 ‘카테코멘 (κατεχωμεν)’이다. ‘우리가 굳게 잡자’라는 뜻이다. 히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이미 히브리서 기자는 앞선 본문에서 이렇게 말했다.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은 유대교 제사장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소망은 새 언약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 있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소망을 굳게 잡을 때 그들은 그들의 믿음의 여정을 담대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세번째 동사는 ‘카타노오멘 (κατεχωμεν)’이다. “우리가 돌아보자”란 뜻이다. 히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시련과 고난이 올 때 한 개인은 좌절하기 쉽다. 이러할 때 우리는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의 지원을 해야 한다. 한 개인이 흔들리면 믿음의 공동체도 흔들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공동체는 모여야 한다. 모임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받는 기회를 함께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담대하게 우리의 신앙 여정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한다. 히 10:36-37,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브리서 기자는 담대함과 인내가 필요한 이유를 상 받을 때가 더욱 가까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마음이 약해질 때 다시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건 “끝이 곧 온다”라는 소망이다.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도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박국은 남유다의 상황에 대해 절망했다. 합 1: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가 선포해야 했던 메세지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는 예언이었다. 하박국은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라고 하나님께 따졌다. 그러나 그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날에 대해서 보게 된다. 그는 떨며 이렇게 고백한다.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결국 그는 자신과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도 이처럼 담대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날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예언했던 “잠시 잠간”은 가깝게는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이었다. 실제로 그 때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 했던 제사장들과 유대교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것은 히브리서가 씌어지고 난 지 10년도 되지 못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10:12-13,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심판의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 여기서 ‘발등상’은 왕이 왕좌에 앉을 때 발을 얹어 놓는 상이다. 원수가 왕의 발등상이 된다는 것은 완전한 항복을 말하는 것이다. 고대의 전쟁에서 한 나라가 싸움에서 지면 그 나라 왕이 땅에 머리를 박고, 승리한 왕은 그 위에 발을 올려놓는다. 지금 세상의 왕들이 분노하고 악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지만, 결국 원수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완전히 엎드려 주님의 발판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담대히 전진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의로운 심판장이 계시며, 장차 그 분이 의로운 심판을 행할 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쉽지 않았던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 이제 2025년 역시 쉽지 않을 새 해가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담대함으로 믿음의 전진을 해야 한다. 세상 권력의 악은 더욱 거세어질 것이다. 세속화의 속도도 더욱 빨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담대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우리에겐 지성소가 열려 있다.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또한 우리에겐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다. 그리고 우리에겐 원수를 그 발 아래 두실 의로우신 심판장이 계신다. 휘장이 찢어지고 그 사이로 열려 있는 지성소, 원수가 주님의 발등상이 되어 그 앞에 엎드려져 있는 모습…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고난을 당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강력한 그림 언어다. 우리도 이 비전을 마음 속에 그리며, 새 해 힘든 상황 때문에 뒤로 물러서는 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담대히 전진하는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