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 믿음의 증거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5년 1월 4일 설교 이익환 목사

히브리서 11: 믿음의 증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 11:1-2)

예수님의 MBTI가 뭘까? 구글링 결과 INFJ로 나온다. 특히 Ν(Intuition)이 98%로 강한 직관형으로 나온다. 아담의 MBTI는 ISTP라고 나온다. S(Sensing)가 98%로 강한 감각형으로 나온다. S가 강한 감각형 사람들은 지금 현재,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등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정보를 선호한다. 반면  N이 강한 직관형의 사람들은 현재 오감으로 인식되는 정보 이면에 있는 의미에 관한 정보를 인식하길 원한다.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나온다. 이들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며 살았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당시 헬라 사람들은 이성에 따라 세상을 이해하려 했다. 그래서 그들에겐 지금 눈에 보이고 감각되는 현상이 중요했다. 이런 헬라적 사고와 달리 히브리적 사고는 사실과 현상에 의지하지 않는다. 세상을 섭리하는 원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그래서 이성적 판단 보다는 믿음을 강조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이성(理性)적 판단으로는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볼 수 있고, 또 이성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믿음은 자신이 바라는 것이 실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믿음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확실한 증거로 나타날 것에 대한 확신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지금 보이는 현상에 지배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라는 것이 실상으로 드러나고,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이 증거로 드러날 때를 기대하며 현재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브리서 기자는 옛날 믿음의 조상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고 말한다. ‘증거를 얻었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그 원형이 ‘마르튀레오(μαρτυρεω)’인데, 이는 ‘어떤 사실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언하다’라는 뜻이다. 이 동사는 수동태로 쓰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해주신 것이다.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믿음의 사람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믿는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지혜로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이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은 유한한 인간의 인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인식의 문제를 이성으로 해결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모든 것을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성에 의지하여 인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결국 불가지론(不可知論)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소개한다. 첫번째 인물은 아벨이다.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것은 그들이 바친 제물의 종류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것을 믿음으로 드렸느냐가 중요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제물은 받으시고, 그렇지 않은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우리가 지금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예배 드리지만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소개하는 두번째 인물은 에녹이다.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창세기는 에녹을 이렇게 소개한다. 5:21-24,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는다. 므두셀라(מתושלח)는 ‘무트(מות)’와 ‘셀라흐(שלח)’가 결합된 말이다. 무트는 ‘죽음’이고, 셀라흐는 ‘보내다’라는 뜻이다. 어떤 성경학자는 이것을 ‘그가 죽으면 홍수를 보낸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그는 에녹이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이 홍수로 멸망할 것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아들의 이름이 그래서인지 에녹은 아들을 낳은 후 경각심을 갖고 산 것으로 보인다. ‘얘가 죽으면 하나님이 홍수를 보내실거야’ 에녹은 아들 므두셀라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정신이 버쩍 났을 것이다. 에녹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에 두며 삼백 년을 하나님과 긴밀히 동행하는 삶을 살다. 얼마나 친밀하게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하나님이 그를 천국으로 바로 데려가셨을까? 하나님과 동행하던 그의 일상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곧바로 천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다. 홍수는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일어났다. 여기에 나온 숫자 187, 182, 600을 더하면 969년이 나온다. 므드셀라가 969세에 죽었으니까 그의 이름처럼 그가 죽고 나자 바로 그 해, 세상에 홍수가 보내진 것이다. 그렇다면 홍수 심판에 대한 계시는 이미 에녹 때부터 세상에 주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다서는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1:14-15,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세상과 구별되어 살았을 것이다. 그가 믿음으로 살았기에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에녹처럼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하나님을 찾지는 않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에녹처럼 죽음의 권세와 상관없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매여 사는데,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상이자 선물인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소개하는 세번째 인물은 노아다.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한 경고를 받았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받았기에 그는 무려 백 이십 년 동안 배 하나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것은 사람들의 반응과 상관 없이 사는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지금 다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 부르심을 따라 사는 것이다. 결국 노아가 만든 방주는 홍수 심판이 임했을 때 자신과 가족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리하여 노아는 에녹처럼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의를 상속받는 것은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가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소개하는 네번째 인물은 아브라함이다.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본토, 친척, 아비의 집은 사람에게 안전함을 주는 기반이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뒤로 하고 어떻게 미지의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를 부르신 하나님 한 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성경은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기록한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것, 여기에 믿음의 삶의 중요한 원리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가 확실히 보일 때 움직인다. 그래서 미래를 정확히 알기 위해 예언과 예측에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새 해 많은 사람들이 점집을 찾는 것이다. 언제 두려운 일이 생길지 모르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예언과 예측을 통해 불안한 길을 피하고 안전하고 확실한 길로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에서 중요한 것는 장차 생길 일을 미리 알아내고 추측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 그 상황에 개의치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몰랐지만 그러나 그는 자신이 누구와 함께 가는지 알았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삶의 원리였다. 그는 갈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염려치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함께 가시는지를 염려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중대한 원리인 것이다. 하나님만 함께 가시면 내가 어디에 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광야를 가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한국은 불안한 정치 경제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이스라엘도 계속 물가가 오르고, 조만간 후티 반군과 이란과의 전쟁도 예측된다. 불안한 삶을 피해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선진국에서 조차 총기 사고와 차량 돌진 사고가 일어나고 있다. 세상은 요동하고 있다. 안전한 곳이 없다. 갈 바를 알지 못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 가장 안전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소개하는 다섯번째 인물은 사라다. 11:11-12,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90살 된 여인이 아이를 낳는 상황이다. 점점 배가 불러오고 입덧을 하는 사라를 보고 이웃 아낙네들이 묻는다. ‘왜 그러세요, 뭐 잘못 먹었어요?” 사라가 대답한다. “나 임신했어.” 얼마나 웃긴 상황인가? 나이 많은 사람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이다. 그러나 사라는 약속하신 이가 신실하게 그것을 이루실 것을 믿었다. 이 믿음이 상식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죽은 자와 같았던 사라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민족을 일으키신 것이다. 상황이 어떠해도, 환경이 어떠해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11:13-1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믿음의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믿음을 놓지 않았다. 약속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낙담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이 실상이 되는 순간을 멀리서 보며 그것을 기뻐했다. 믿음으로 살다간 그들의 이 땅에서의 정체성은 외국인과 나그네였다. 그들은 자신의 집을 소유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언제든지 이동할 준비를 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늘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본향을 향하고 있었다.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가질 때 우리의 삶은 단순해 진다. 우리가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가질 때 우리는 죄 많은 이 세상이 우리의 진정한 집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가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도 주목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새 해에는 늘 기대와 불안이 공존한다. 좋은 일이 펼쳐지길 기대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전망 때문에 우리는 염려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대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일어나길 기대하신다. 믿음의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믿음의 사람은 모두가 불안해 하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루실 실상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러분이 갈 바를 알지 못해도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담대히 발걸음을 내딛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어디를 가야 안전할지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가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음의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고, 그리하여 여러분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증거를 얻는 한 해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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