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hip 2: 여로보암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5년 2월 1일 설교 이익환 목사

Kingship 2: 여로보암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왕상 12:28-29)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왕은 모두 마흔 두 명이다. 사울, 다윗, 솔로몬 이후 나라가 분열되었고, 남 유다에선 20명, 북이스라엘에서는 19명의 왕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악한 왕으로 묘사되는 인물이 누굴까?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이다. 오늘은 여로보암에 대해 알아보며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왕상 11:28-29,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청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더니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그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여로보암은 솔로몬이 아끼던 사람이었다. 그는 다윗 성읍을 재건하는 총감독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이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왕상 11:11,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여기서 하나님이 염두에 두신 솔로몬의 신하가 바로 여로보암이었다. 하나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여로보암에게 보내 다음과 같이 당신의 뜻을 전하신다. 왕상 11:30-31, “아히야가 자기가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으로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왕상 11:38,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여로보암이 왕의 자리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여로보암에게 열 지파를 주시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신 것이다. 왕상 11:40,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여로보암은 솔로몬을 피해 애굽 왕 시삭에게로 갔다가 솔로몬이 죽은 뒤 세겜에 돌아와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여로보암이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세겜이라는 도시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은 것이다. 또한 요단 동편에 부느엘이라는 도시도 건설한다. 집권 초기 그의 정치적 입지는 이렇게 견고히 세워져 간다. 그러나 그의 종교적 입지를 세우는 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성전이 남유다의 땅인 예루살렘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라면 누구나 일 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런데 북쪽에 있는 백성들이 남유다 영토로 내려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종교적 정통성이 예루살렘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남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 기울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여로보암은 다음과 같이 위기 의식을 느낀다. 왕상 12: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이미 “네가 나의 명령과 율법을 잘 지키면 견고한 집을 세워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의 왕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자신의 왕권이 백성들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 결과 그는 불안과 조급함으로 하나님을 대신 하는 우상을 만든다. 왕상 12:28-29,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처럼 불안할 때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우상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도 불안이 커지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냈었다.

애굽의 태양신 프타(ptah)의 화신인 아피스 황소

왜 금송아지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신이 되었을까? 그것은 애굽의 영향이다. 여로보암도 애굽에 있는 동안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애굽 사람들은 아피스(Apis) 황소를 신성시하며 숭배했다. 아피스 황소는 애굽의 태양신인 프타(ptah)의 형상이었다. 그래서 당시 금송아지 신상은 소의 두 뿔 사이에 태양이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 황소는 ‘힘과 재물과 다산(多産)’의 상징이었다. 여로보암은 불안 가운데 백성들의 마음을 단속하기 위해 이 황소를 통해 유사종교를 만들어 낸 것이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에 맞춰 재구성한다. 그가 만들어 낸 하나님이 금송아지라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금송아지는 힘과 권력과 정력의 상징이었다. 여로보암이 백성들에게 제시한 하나님은 그들에게 힘과 번영과 쾌락을 가져다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 우상이 단과 벧엘에 세워진다.

여로보암이 만든 제단터 @ 텔단
여로보암이 만든 제단터 @ 벧엘

여로보암은 우상의 제단만 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산당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다. 또한 절기를 바꾼다. 일곱 째 달 십 오일인 초막절을 여덟 째 달 십 오일로 바꾼 것이다. 절기는 하나님이 정한 시간인데 자기가 임의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그에게 선지자를 보내 심판의 메세지를 전하신다. 마침 여로보암은 분향하기 위해 제단 위에 서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제단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 왕상 13:2,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이 예언은 약 300년 후 남 유다 요시야 왕에 의해 정확히 성취된다. 왕하 23:15-16, “또한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실제로 벧엘에 가면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동굴 무덤들이 많이 있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이미 죽은 제사장들의 뼈를 무덤에서 빼내어 제단 위에서 불태운다. 그 우상의 제단을 더렵혀 못 쓰게 만든 것이다.

벧엘에 있는 매장 동굴에 관한 안내판

왕상 13:33-34,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여로보암이 간 길은 악한 길이었고, 결국 멸망에 이르는 길이었다.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 남 유다보다 먼저 멸망하게 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7: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넓은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고 힘든 좁은 길보다 넓고 편한 길을 가려고 애쓴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섬기든 재물을 섬기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재물은 히브리어로 ‘맘몬’이고, 헬라어로는 ‘맘모나스’다. 부(富)를 주관하는 신이 바로 맘몬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에게 돈과 권력을 가져다 주는 신을 섬긴다. 여기서 오늘날 번영신학이 싹트게 되었다. 번영 신학은 성도가 부유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하나님이 바라신다는 가르침이다. 번영신학을 가르치는 목사들은 “하나님은 당신이 건강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두가 부자가 되길 원하신다”, “가난과 질병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라고 설교한다. 그들은 “믿는 자에게 권세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건강과 번영과 성공을 선포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번영 신학이 왜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보다는 나의 뜻, 나의 번영에 대한 욕망을 이루는 도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번영의 복음에서 하나님은 나의 건강과 번영과 성공을 이루어 주는 신이 된다.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번영신학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여로보암이 말한 신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구약 성경의 기자들은 하나님을 금송아지 우상으로 만든 죄를 ‘여로보암의 길’, ‘여로보암의 죄’라고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그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을 멸망에 이르게 한 가장 큰 죄라고 단죄한 것이다. 즉 하나님을 힘과 돈과 번영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여로보암의 길을 따르는 죄가 되는 것이다

황소는 오늘날에도 힘과 풍요의 상징이다. 세계 금융의 중심인 월스트리트 증권거래소 앞에도 황소상이 있다. 사람들은 이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부자가 된다고 해서 기념샷을 찍는다. 금송아지 우상숭배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돈이면 최고’라는 황금만능주의로 똑같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이렇게 말한다. “소비주의(Consumerism)는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소비주의의 대성당은 쇼핑 센터이며, 소비주의의 가장 큰 죄는 ‘올해의 모델’을 구입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소비주의 사회는 광고를 통해 소비자들 안에 지속적인 불만족을 만들어 낸다. 불만족 대신 행복을 얻으려면 소비하라는 것이다. 결국 소비주의 사회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 돈이 우상이 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우상의 속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시 115:4-8,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상은 신적 능력이 있기는 커녕, 보고 듣는 능력조차 없는 것이다. 우상 숭배의 비극은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우상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즉,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상의 역설인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어서 말한다. 시 115:10,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편 기자는 우상 숭배에 빠졌던 아론의 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한다. 우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너희의 도움과 방패가 되신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금송아지 사건 이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한다. 35:1-2,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우리는 금송아지 사건 이후 안식일에 대한 계명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안식일이 번영을 숭배하는 인간 문제에 대한 처방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우리는 일을 멈춘다. 돈과 소비가 목적이 되어 정신없이 분주하게 살았던 삶을 뒤로 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속으로 들어간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교회에서는 믿음의 가족들과 함께 예배하며,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가 없는 것으로 불만족스러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회복한다. 따라서 안식일은 더 소유해야 행복해진다고 말하는 소비주의 사회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영적 안식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안식일을 통해 이 세상에서 누가 참 신인가를 다시 한번 고백하게 된다. 맘몬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인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모든 축복의 근원임을 고백하면서 우리는 더 많은 소유와 성취에 대한 염려와 압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안식일을 지킴으로 세상의 지배가치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안식일을 통해 번영을 약속하는 우상의 미혹을 차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이는 우상을 따라가는 넓은 길이 아니라, 고난이 따를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좁은 길을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주는 우상들을 만들어 낸다. 많은 사람들이 분별 없이 그 우상들을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여기며 그 우상에게 절한다. 그러나 우상이 우리를 위해 일할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이다. 우상은 결국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번영을 약속하는 유사종교를 분별해야 한다. 오직 성경의 하나님을 붙들고 그분의 약속을 신뢰해야 우리는 여로보암의 길로 가지 않게 된다. 바라기는 내 삶의 주변에 세워진 우상들을 분별해 내고, 오직 하나님 한 분을 섬기며 따르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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