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5년 4월 12일 설교 이익환 목사
설교: 유월절에 시작된 사랑 이야기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고전 5:7)
한 나라는 국민과 주권, 영토가 있을 때 성립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탄생은 달랐다. 이스라엘은 출애굽과 함께 탄생했다. 주권도 없었고, 영토도 없었던 애굽의 노예들을 통해 한 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한편 한 나라의 멸망은 국민과 주권과 영토가 사라질 때 발생한다. 그러나 국민과 주권과 영토가 사라져도 멸망하지 않은 민족이 있다. 이스라엘이다. 이것은 이 국가의 기원이 애초부터 다른 나라와 달랐기 때문이다. 이 국가의 기원은 출애굽을 행하신 하나님의 뜻에 기초해 있었다. 그래서 나라가 사라져도 이스라엘은 멸망하지 않았다. 출애굽은 역사상 한번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하나님은 이 일을 기념하여 대대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하셨다. 이 유월절이 유대 민족 국가의 존속과 관련된 국가적 내러티브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유월절은 단지 유대 민족 만을 위한 절기가 아니었다.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유월절에 하신 일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번째 유월절은 이집트에서 있었다. 이 유월절의 핵심은 피 뿌리는 예식에 있었다. 어린 양을 죽여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었다. 장자를 죽이려고 온 죽음의 사자는 그 피가 뿌려진 집은 그냥 넘어갔다. 넘어가는 조건은 한 가지 였다. 그 집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지의 여부였다. 출 12:3, 5,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니산월 10일 어린 양을 준비해야했다. 그들은 희생 제물이 될 양이 흠이 있는 지 없는지 꼼꼼이 살펴야 했다. 실제로 양을 죽이는 날은 니산월 14일 ‘해 질 때’였다. 출 12:6-7,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여기서 ‘해 질 때’라고 번역된 ‘베인 하아르바임(בין הערבים)’은 ‘두 저녁 사이에’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은 좀 특이하다. 이 말은 저녁이 시작되는 오후 세 시부터 하루가 바뀌는 여섯 시 사이의 시간을 말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후 세 시와 여섯 시 사이에 유월절 양을 죽였다. 그리고 그 피를 문기둥에 발랐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출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이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왜 그들에게 양의 피를 바르라고 하셨을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집을 모르셔서 표시하라고 지시하신 것일까? 한 예를 통해 그 이유를 살펴보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너무도 사랑한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이 그 사랑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우린 그것을 짝사랑이라고 한다. 짝사랑은 비극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시작한 사랑에 다른 사람이 반응한다면, 그 때 그 두 사람의 사랑은 불 같이 일어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의 피를 그들의 집 문에 바른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것은 믿음의 행동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이 믿음이 일어나길 원하셨다. 사랑하기 때문에 야반도주를 결심하는 커플들도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그것이 가능하다. 유월절은 하나님과 그 분이 사랑한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뜻이 맞아 야반 도주를 시행한 날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집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믿음을 드러냈다. 이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 오셨다. 애굽 전역에는 장자들의 죽음이 있었지만, 양의 피가 발라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죽음의 권세가 넘어가는(pass over) 은혜가 있었다. 그래서 이 날이 ‘유월절(Passover)’인 것이다.
광야 생활을 끝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서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키게 된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며 처음 유월절에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과 그 분의 구원을 기억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들려주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 ‘하가다 (그 이야기)’이다. 자신의 부모가 하나님과 사랑을 시작한 이야기, 그래서 애굽에서 야반도주한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그들은 부모님의 사랑 이야기에서 깊은 안정감을 누릴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 역시 자신들을 사랑하여 구원하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키워 나갈 것이다. 이 사랑 이야기가 계속 들려지는 한 이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통과 억압이 그들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이 누구인지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국가가 망하여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도 유월절을 지키며,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이야기를 공유했다. 그리하여 죽음의 공포도 그 사랑을 삼킬 수 없었다. 홀로코스트도, 반유대주의도 그 사랑을 꺼뜨릴 수 없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정의된 민족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에, 고통이나 미움이 그들을 더이상 정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핍박과 증오로 벌써 사라지고도 남았을 이 민족이 오늘날 이스라엘로 부활하여 지금까지 3500년 동안 유월절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기적 같은 일이고, 하나님의 언약의 신비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마지막 날 회당에 모여 아가서를 낭독한다. 아 8:6-7,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유대인들은 애굽에서 불 같이 일어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출애굽 사건이 바로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대대로 기념하는 것이다. 아가서를 읽으면 우리는 거기에서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특징은 무엇이가? 서로가 서로에게 헌신적이 된다.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아낌 없이 허비한다. 돈을 써도 아깝지가 않다. 서로를 생각만 해도 마음이 뜨겁게 달아 오른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이 아가서를 읽으며 하나님과의 뜨거웠던 첫 사랑의 순간을 기억하며 다시 그 사랑을 그들의 마음에 불러 일으키기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유월절은 단지 유대 민족 만을 위한 절기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 유월절이 새로운 이야기로 온 인류에게, 또한 우리에게도 들려지길 원하셨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바울은 예수님을 유월절 양으로 표현하고 있다. 왜 그는 예수님을 유월절 양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유월절 희생 되는 어린 양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희생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 역시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라고 외쳤다. 예수님은 유월절 양이 준비되던 날인 니산월 10일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슨 흠이라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흠도 찾을 수가 없었다. 빌라도 역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점도 흠도 없는 유월절 희생 제물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정말 유월절 양으로 오셔서 희생 되신 것이라면 예수님은 유월절의 전통대로 니산월 14일에 죽으셔야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산월 13일 금요일에 돌아가셨다. 왜 하루 일찍 죽으신 걸까? 이 문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해인 AD 29년의 유대력을 살펴보면 해결된다. 요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죽으신 지 이틀째 되는 날이 안식일이며, ‘큰 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큰 날’은 안식일과 유월절이 겹치는 날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안식일에는 음식도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유월절과 안식일이 겹칠 경우 그들은 하루 앞당겨서 유월절을 지켰다. 따라서 AD 29년에는 14일이 아닌, 13일 금요일 해 질 때, 즉 오후 세 시와 여섯 시 사이에 어린 양을 잡았던 것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니산월 13일 오전 아홉 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여섯 시간 뒤인 오후 세 시경 숨을 거두신다. 예수님은 정확히 유월절 양 잡는 시각, 두 저녁 사이에 돌아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요 6:53-54,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피 흘리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그분의 사랑에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요일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 어린 양의 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구원의 역사를 행하셨다. 그러나 유월절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천 년 전 유월절,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격이 있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말한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으로 삼으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구원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으로 삼으시기 원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더이상 죄가 나를 정의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주변의 사람과 환경이 나를 정의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정의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집 문설주에 양의 피를 뿌렸던 것처럼, 우리도 유월절 화목 제물로 희생되신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우리 마음에 뿌려야 하는 것이다.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선언한다. 또한 그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고 선언한다.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죽음을 면할 수 없다. 이 죽음의 권세가 우리를 넘어가게 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 마음에 뿌려야 하는 것이다.
어린 양의 피로 인한 구원은 구약 역사의 전부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구원은 새 언약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여러분의 삶에는 이 유월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있는가? 하나님은 구약 시대 유월절을 통해 이스라엘과 함께 구원과 사랑의 여정을 시작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신약 시대 유월절을 통해 온 인류를 위한 구원과 사랑의 여정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이제 여러분과도 그 구원과 사랑의 여정을 시작하기 원하신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며 하나님과 함께 야반도주 할 의향이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게 될 때 우리는 더이상 사망의 권세에 지배당하지 않게 된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기 때문이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고통이 우리를 정의할 수 없고, 환경과 사람이 우리를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할 때 우리는 영원히 사랑받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유월절은 봄의 절기다. 아가서 연인들의 사랑은 이 봄에 더욱 깊어진다. 아 2:11,13,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언약 백성이 되길 원하고 계신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이 프로포즈에 응답하시는 여러분 되길 원한다. 그리하여 이번 유월절을 통해 하나님과 불 같은 사랑을 시작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