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16 십계명이 지켜지는 공동체

이번 주 토라포션: 출18:1-20:23 / 사 6:1-7:6, 9:5-6/ 마6:1-8:1

토라포션 16 십계명이 지켜지는 공동체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1-6)

 

오늘 토라포션에서는 출애굽의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이상 노예가 아니라 거룩한 공동체로 자라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광야에 이르렀을 때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출 19:4-6,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나님은 이제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 원하셨다. 그래서 십계명을 주신다. 열가지 계명이 지켜지는 공동체가 되길 원하셨다. 이 십계명이 공동체를 세우는데 어떻게 중요한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출 20:2-3,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첫번 째 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로 살며 하나님을 잊어버렸던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다른 신들을 질투해서 하신 말씀일까? 아니다. 이사야서 44:6절에서 하나님은 선포하신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사실 이 세상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인간의 욕망에 따라 만들어진 신이 있을 뿐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애굽에서 섬겼던 신들, 그리고 장차 가나안에서 만나게 될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와 번영을 바라며 인간이 만들어 낸 신들이다. 신을 만들어 놓고 섬길 정도로 인간은 풍요와 번영을 통해 안전을 누리려는 욕망이 큰 존재이다.

이 1계명은 다른 종교와 싸우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다. 우상을 만들어 내는 우리 안의 욕망과 싸우라는 말씀이다. 이 계명을 긍정으로 바꾸면 신명기서 말씀이 된다. 신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세상 풍조와 세상이 만들어 낸 신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다른 신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막고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 1계명을 주신 것이다.

두번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은 보이는 것에 쉽게 마음을 빼앗긴다. 우상은 보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리를 인도할 신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신 아닌 어떤 것을 형태를 가진 신처럼 만들고 숭배하며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시대는 항상 우상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우상들을 섬길 때 풍요와 번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상은 그것을 섬기는 자를 노예로 만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돈의 노예, 성공의 노예,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세번째 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주술적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네번 째 계명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란 존재를 상실한 인간은 실존적인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 불안감 때문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우상을 통해 안전감을 누리고자 한다. 그러나 사람은 우상을 섬길 수록 그것에 노예가 되어 도저히 안식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은 이 안식할 수 없는 사슬을 끊기 위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것이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무엇을 소유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도 기뻐하고 쉴 수 있음을 알고 누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누가 나의 주인인가를 다시 회복하는 날이다. 탐욕의 노예가 되었던 자신을 돌아보는 날이다. 무엇이 되고자 쉬지 않고 달려 왔던 나의 욕망을 점검하는 날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네가지 계명은  하나님이란 존재 한 분을 사랑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다섯번 째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부모님의 인격이 훌륭해서 공경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모님이기 때문에,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해 주신 분이기 때문에 공경하라는 것이다. 이 계명은 유일하게 약속이 있는 계명이다. 출 20:12,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것이다.

여섯번 째는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살인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다른 사람을 무시하면서 존재살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존재살인이 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을 왕따시키는 것, 다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냐에 따라 차별대우하는 것도 존재살인이 될 수 있다. 세상이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공동체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고 받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일곱번 째는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다. 간음은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잠 6:32,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몇 년 전 한국에서는 간통죄가 폐지되었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구속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간음은 개인의 차원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가족을 죽이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회적인 범죄행위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파괴적인 성적 탐욕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원하셨던 것이다.

여덟번 째는 도둑질하지 말라이다. 단순히 물건을 훔치는 것을 금지하는 계명이 아니다. 도둑질하다는 히브리어로 ‘가나브’다. 이 말은 출애굽기 21장에도 나온다. 출 21:16,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사람도 도둑질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당시 노예사회였기에 사람을 납치하여 파는 행위가 빈번했다고 한다. 인간이 소유물이 되어 팔고 팔리는 것을 하나님은 막기 원하셨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자꾸 무엇이 되었느냐, 무엇을 소유했느냐로 존재가치가 매겨진다. 그런 잣대로 평가받는 사회에서 우리의 존재 가치는  도둑질 당한다. 하나님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빼앗고 착취하는 것을 막기 원하신 것이다.

아홉번 째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거짓증거로 무너진 이스라엘 사회를 고발한다. 사 1:23,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사 5:23,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사람들은 자기가 손해 안보려거나, 뇌물 때문에 거짓증거를 한다. 하나님은 거짓증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정의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열번 째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다. 탐욕은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의 죄성에서 나온다. 존재로 계신 하나님게 돌아선 인간은 탐욕에 쉽게 지배 당한다. 탐욕이 전체 사회 경제 체제를 주도하게 되면 공동체가 무너진다.  IMF때 많은 가정이 깨어진 것을 우리는 안다. 세계는 이제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 체제로 접어들어 이제 남의 나라 안방까지 탐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은 공동체가 탐욕 때문에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계명을 주신 것이다.

이상 다섯번 째부터 열번 째까지의 계명은 이웃사랑에 관한 계명이다.

십계명이 제대로 지켜지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탐욕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 결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막 해방된 노예들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제사장 나라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열가지 계명을 주신 것이다.

자 그런데 이 계명을 교회인 우리가 지키기 쉽지 않다. 교회가 시대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교회 역시 메가처치를 추구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이 자본과 힘을 앞세워 국경을 넘어 상품을 파는 것처럼 오늘날 큰 교회들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앞세워 교인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메가처치에서 신자의 70% 이상은 수평이동을 통해 온 사람들이다. 여기선 익명성이 보장된다. 공동체에 헌신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원하는 신앙프로그램을 소비하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이런 것에 길들여져서 교회 안에 공동체성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를 떠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개인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본 회퍼는 교회는 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새로운 인격, 곧 관계성과 공동체성에 기초한 인격들이 모인 곳이다. 새로운 인격은 개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적인 인격이며, 공동체적 인격이며, 관계적 인격이며, 집단 인격이다. 때문에 교회 안에 개신자가 발붙일 곳은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나 만을 위한 신앙인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권면한다. 살전 5:11, 14-15,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이 힘든 세상에서 왜 남까지 신경 써야 하는가? 그 이유를 롬 12:5에서 말한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안에 십계명이 무너지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성이 무너지고 있다. 탐욕에는 끌리지만 몸된 교회에 대한 헌신에는 끌리지 않는 교인들이 양산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나는 이웃을 사랑하는가 질문하며 돌아보게 된다. 주님은 너희가 얼마나 크고 좋은 교회에 다녔는지를 묻지 않으실 것이다.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키며 나의 몸된 교회를 얼마나 마음을 다해 섬겼는지를 물으실 것이다. 함께 기도하며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 공동체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함께 세워져가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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