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14 이야기를 전달하라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2월 1일

토라포션 14 이야기를 전달하라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출 12:25-27)

영국의 TV 저널리스트 Andrew Marr는 이런 말을 했다. “Jews have always had stories for the rest of us.” 유대인들이 남긴 이야기 중에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야기는 무엇일까? 아마도 출애굽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그것은 최고 권력자 하나님이 가장 힘없는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이야기다. 19세기 흑인(African-Americans)들은 “Let my people go”라는 출애굽기 말씀을 영가로 만들어 부르며 자유와 해방을 꿈꾸었다. 출애굽 이야기는 마틴루터 킹 목사에게 희망을 주었고, 그는 그 희망을 고스란히 그의 흑인 동료들에게 전달하며 시민운동(Civil rights movement)을 이끌었다. 오늘 토라포션에는 유대인들이 3,500년 동안 그들의 자녀들에게 전달하기 힘썼던 출애굽 이야기가 나온다. 모세는 출애굽이라는 거사를 앞두고 왜 이 사건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들에게 교육하기를 원했을까? 그 이유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유대인들은 출애굽 이야기를 ‘하가다(הגדה)’라고 부른다. 이야기를 뜻하는 ‘아가다(אגדה)’에 정관사 ‘하(ה)’가 붙은 것이다. 유대인들의 많은 이야기 중에 가장 위대한 이야기가 출애굽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해마다 유월절이면 유대인들은 온 세대가 모여 이 하가다의 내용을 노래와 낭송을 통해 반복학습한다. 8년 전 유월절 큰 아이의 친구네 집에서 하는 유월절 세데르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도착하니 이미 많은 자녀들이 와 있었다. 만찬이 시작되고 하가다를 나누는 시간이 되자 할아버지가 바구니 하나를 가져오셨다. 그러자 아이들이 자기 핸드폰을 거기에 다 집어 넣었다. 하가다 나눔에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가다는 네 가지 형태의 질문과 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질문은 ‘왜 우리는 이 밤에 마짜를 먹습니까?’이다. 왜 누룩이 없는 딱딱한 빵을 먹어야 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급히 애굽을 떠나야했기 때문이다. 누룩을 넣고 부풀어 오를 때 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출 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그들은 누룩이 없는 마짜를 먹으면서 당시 출애굽이 얼마가 급박하게 이루어졌는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은 ‘왜 이 밤에 우리는 쓴 나물을 먹습니까?’이다. 쓴 나물은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겪었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다.

세번째 질문은 ‘쓴 나물을 왜 두번 적셔서 먹나요?’이다. 유대인들은 쓴 나물을 소금물에 찍어 먹는다. 소금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흘린 눈물을 상징한다. 그들은 또한 쓴나물을 ‘하로셋’이라는 소스에 찍어먹는다. 하로셋은 사과와 무화과와 포도를 갈아 만든 소스다. 색깔이 브라운 색인데, 애굽에서 벽돌을 쌓을 때 사용한 모르타르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들은 쓴 나물을 소금물과 하로셋에 적셔 먹으며 이전 세대가 경험했던 고통의 시간을 감각적으로 느껴보는 것이다.

네번째 질문은 ‘왜 우리는 유월절 음식을 뒤로 비스듬히 기대어 먹습니까?’이다. 이 질문에 인도자는 베개를 받치고 편안한 자세로 음식을 먹는 상황을 재연한다. 이제는 자유로운 백성으로서 편안한 자세로 먹어도 될 만큼 여유와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은 3,500년 전의 사건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처럼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그것이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를 존재하게 한 사건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이렇게 말한다. “None has been more powerful than the Exodus story, whose frame and context is set out in our parsha. It gave Jews the most tenacious identity ever held by a nation. In the eras of oppression, it gave hope of freedom. At times of exile, it promised return.” “오늘 토라포션의 틀과 맥락에서 제시된 출애굽 이야기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한 국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인한 정체성을 주었다. 출애굽 이야기는 억압의 시대에서는 자유에 대한 희망을 주었고, 포로의 시기에서는 다시 돌아올 것에 대한 약속을 주었습니다.”

유대민족만큼 많이 정복당하고, 세계 여러나라로 흩어진 민족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흩어졌지만, 다른 문화에 흡수되지 않았다. 그들은 정복당했지만 그들 민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비결이 뭘까? 하나님의 구원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3,500년 동안 이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달했다. 그들이 이 이야기를 잃어버리지 않는 한, 유대민족은 영원할 것이다. 그 이야기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백성’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출애굽을 하는 상황 속에서, 이 사건을 영원히 기념하며 자녀들에게 가르칠 것을 부모들에게 명령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고 있는 이 출애굽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출애굽의 구원이야기는 하나님이 하실 더 큰 구원 이야기의 예표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통해 출애굽의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자신이 이루실 구원사역임을 말씀하셨다. 눅 22: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예수님은 ‘마짜’라는 무교병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너희를 위해 찢겨질 나의 몸’이라고 말씀하셨다.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잔은 피로 세우는 언약이니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예수님은 포도주 잔을 들고, 이것이 너희를 위해 붓는 나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유월절 양잡는 시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요한이 표현한 것처럼, 그는 세상죄를 담당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왜 유월절 양잡는 시각에 돌아가셨을까? 그것은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에 뿌린 자에게 사망의 권세가 넘어 간 것처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우리를 대신해 피흘리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서 사망의 권세가 넘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따라서 출애굽은 더 크고 영원한 실제를 가리키는 사건에 불과한 것이다. 즉 예수님 안에서 누리게 될 온 인류의 자유와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흘리신 대속의 피를 믿음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출애굽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아직 사망의 두려움 가운데 있는가? 죄의 영향력으로 고통받고 있는가? 전세대의 영향력이나 과거의 상처를 안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여러분에게 출애굽이 필요한 것이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자에게 사망의 권세가 넘어간 것처럼, 어린 양의 보혈의 피가 뿌려진 자에게 죄와 사망의 권세가 넘어가게 될 것이다. 에수님의 피를 믿을 때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 나를 구원하는 역사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십자가 사건이 다음세대에 전달되기를 원했다. 고전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그가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이 구원의 이야기를 잃어버리지 않는 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 세계가 온통 죽음의 공포로 떨고 있다. 출 12:27,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을 믿음으로 뿌릴 때 사망의 권세가 넘어갈 것이다. 바라기는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그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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