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9 잊혀진 시간을 견디는 법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2년 12월 17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9 잊혀진 시간을 견디는 법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40:21-23)

요셉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채색옷을 입었다. 그에게 채색옷은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의미했다. 또한 그가 채색옷을 입었다는 것은 장자의 권위가 그에게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편 이 채색옷은 다른 형제들에겐 질투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이었다. 결국 채색옷은 형들에 의해 벗겨지고 그의 인생은 잊혀진 시간 속으로 곤두박질한다.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다. 요셉이 어떻게 잊혀진 시간들을 버텨냈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서 요셉은 17세의 소년으로 등장한다. 그는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여 채색옷을 입혀줄 때만 해도 그의 인생은 다른 형제들보다 한 뼘 더 위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가 다른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을 때 그의 인생은 당장에라도 높은 곳에 올라 다스리는 자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빛내게 해줄 것 같았던 그 채색옷 때문에 그의 인생은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 채색옷이 벗겨지고 그는 구덩이에 던져진다. 구덩이에 자신을 던진 형들을 보면서 요셉의 마음은 어땠을까? 관계에서 받는 상처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이 가족으로부터 받는 상처다. 요셉은 구덩이에 던져진 현실보다도 자신의 존재 자체가 버림받고 거절받았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팠을 것이다. 그 마음의 상처가 정리되기도 전에 요셉은 다시 노예로 팔려 애굽으로 내려간다. 인생이 내려갈 때 우리는 비참해진다. 아무 것도 하기 싫고, 할 수 없는 자가 된다. 그러한 때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과 자신에 대한 절망만 가득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그의 현재와 함께 하셨다.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요셉은 혼돈속에서도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이것은 그가 무작정 절망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게 된 이유가 된다. 그는 비록 노예 신분이었지만 주인을 위해 성실히 일하기 시작한다. 39:3-5,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서서히 그의 인생에 역전이 일어난다. 사실 노예로 일하는 것은 결코 그가 원했거나 꿈꿔온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복을 받았다. 그만이 아니라, 그가 있는 곳이 요셉 때문에 복을 누리는 환경으로 변했다.

그런데 다른 위기가 시작된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한 것이다. 희년서에 의하면 요셉은 유혹의 순간 하나님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이 그에게 읽어준 말을 기억했다고 한다. 그 말은 남편 있는 여자와 음행하는 자는 죽음의 심판이 있게 된다는 말이었다. 달콤한 유혹을 거절한 대가는 컸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것이다. 올라가나 싶었던 그의 인생이 다시 내려앉게 된다. 그는 감옥에 갇혀 충분히 절망하거나 원망의 시간을 보낼 법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현재에 하나님은 또 다시 함께 하신다. 39:21-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만약 요셉에게 꿈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애굽에서 비참한 노예살이를 시작했을 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그에게 꿈이 없었다면 그는 우울증에 빠졌을 것이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지?’ ‘하나님은 왜 이러시지?’ ‘인간들이 하나같이 왜 이러지?’라고 절망하며 신세를 한탄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으로 곤두박질 칠 때, 더욱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꿈이었다.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언약이었고, 하나님의 의지였다. 그것은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겠다’는 말보다도 더 강한 그림언어였다. 극한 상황속에서도 그 꿈은 지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선명히 요셉의 마음에 떠올랐다.

요셉이 감옥에 있었을 때 바로의 관원장들이 들어왔다. 요셉은 거기서 그들의 꿈을 해석해준다. 그리고 그는 술 맡은 관원장에게 일이 잘 되거든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요셉이 희망을 걸었던 술 맡은 관원장은 출소해서 복직했지만, 요셉을 잊어버리고 만다. 요셉의 인생에 다시 잊혀진 시간이란 시계가 째깍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정말 하나님의 때를 주목하고 기다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만약 술 맡은 관원장이 그 때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석방하게 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요셉은 훗날 바로를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애굽의 총리는 더더욱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들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으로 번성하는 하나님의 비전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다시 잊혀진 시간을 사는 것은 요셉에겐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이루시기 위해 요셉에게 허락하신 시간이었다. 시편은 그의 시련을 이렇게 묘사한다. 105:17-19, “그가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단련하다’는 히브리어로 ‘짜라프(צרף)’인데, 이는 금을 뜨거운 불에 넣어 불순물을 빼는 것을 말한다. 그에게 잊혀진 시간은 그의 인간적인 불순물을 빼는 단련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꿈은 요셉을 단련하고 단련했다. 그는 감옥에서 2년의 시간을 더 보내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없는 사람에게 2년이란 시간은 불필요하고 끔찍한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잊혀진 시간은 요셉이 하나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그릇으로 빚어지는데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다 찼을 때 요셉은 결국 바로 앞에 서게 된다. 이 잊혀진 시간은 요셉에게 결코 불필요한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경륜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에 주목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요셉이 형들을 원망하며 살았다면 그의 인생은 감옥에서 끝났을 것이다. 만약 요셉이 술관원을 원망하며 살았다면 그가 바로에게 갈 수 있는 기회는 닫혔을 것이다. 원망은 기회의 문을 닫는 행위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통해서도 기회의 문을 여시는 분이다. 사람들은 잊어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때가 되었을 때 기회의 문을 여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 분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eternal now)이다. 시간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다. 크로노스은 인간의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존재한다. 크로노스는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이다. 그래서 이 크로노스의 시간 프레임은 언제나 시간은 객관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보통 이 시간 프레임 안에서 과거를 규정하고 미래를 예측한다. 그런데 이 시간 프레임 안에서 고난의 시간, 내가 손해보는 시간, 다른 사람들에게 잊혀진 시간은 그야말로 끔찍한 시간이다. 그러나 그 잊혀진 시간이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라면 우리는 그 잊혀진 시간을 넉넉히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원한 현재를 사는 것이다. 유한한 세상에서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잊혀진 시간일지라도 그 시간이 복이 되는 것이다.  

꿈은 히브리어로 ‘할롬(חלום)’이다. ‘할람(חלם)’이란 동사에서 온 것인데, 할람은 ‘견고하게 묶다’라는 뜻이다. 요셉은 자신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과 이 꿈을 통해 견고하게 묶여져 있었다. 이처럼 요셉의 꿈은 현실의 고통 너머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게 했다. 만약 요셉이 꿈을 꾸지 않았다면 그는 어떠한 어려움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었기에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고난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꿈과 함께 우리의 삶에 고난의 시간이 시작될 수 있다. 꿈과 함께 시작한 직장 생활이 기대와 달리 감금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시간이 될 수 있다. 그 감금의 시간, 잊혀진 시간을 가장 잘 통과하는 비결이 뭘까? 그것은 그 시간을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있을 때,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영원한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이 내게 주어진 시간이라 생각할 때, 우리는 내게 허락된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그것을 묵묵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원한 현재를 살며 십자가를 감당할 때,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작정하신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후에 요셉은 자신을 알아보고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45:5, “당신들이 나를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를 살아야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주었던 고통이 상처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를 살아야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며, 결국 가족과 민족을 세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 인생 아무 어려움 없이 잘 풀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라. 우리 인생의 목적은 순탄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비록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우리는 채색옷이라는 장자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다. 이 채색옷 때문에 우리는 단련의 시간이라는 대가를 치를 수 있다. 잊혀진 시간이라는 대가를 치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시간에 철저히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원한 현재를 산다면 우리는 그 꿈을 담아낼 수 있는 사람으로 빚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통해 내가 하나님과 묶여져 있다면, 하나님은 나의 현재에 함께 하실 것이다. 나에게 권위를 주시고, 나의 현재를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실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매일 매일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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