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서 강해 4 에발산: 저주의 종말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3년 9월 23일 설교 이익환 목사

여호수아서 강해 4 에발산: 저주의 종말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 8:30-31)

인생의 모든 문제는 저주에서 비롯된다. 아담 이후 저주가 모든 인간 삶의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주가 있기에 고통 당하는 것이다. 저주가 있기에 인생이 힘든 것이다. 이 저주를 풀지 않으면 축복은 없다. 우리 모두는 축복된 삶을 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저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불행한 인생을 운명처럼 여기며 살아 간다. 어떻게 해야 저주를 벗어나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오늘 본문에는 여호수아가 에발산에 제단을 쌓는 장면이 나온다. 에발산은 저주가 선포되었던 산이다. 왜 축복을 선포했던 그리심산이 아니라 이 에발산에 제단이 세워져야 했을까? 오늘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에발산에 제단을 쌓은 것은 여호수아가 임의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세 때 이미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었다. 27:4-6,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거기서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돌단을 쌓되 그것에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위에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여호수아는 아이성 전투를 마치고 곧바로 세겜으로 가 이 명령을 수행한다.

하이파 대학의 고고학 교수였던 아담 제르탈은 1984년 세겜지역 고고학 탐사 중 에발산 중턱에서 여호수아의 제단을 발견한다. 그것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아진 제단이었다. 거기서 발견된 동물 뼈와 재의 탄소 연대를 측정해보니 기원전 13세기경, 즉 여호수아 당시로 판명되었다. 제르탈은 원래 무신론자였다. 그런데 이 에발산 제단을 발견하면서 그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사실임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2022년 3월 고고학자 스트리플링 교수는 기자회견을 통해 놀라운 발견을 소개한다. 그는 제르탈이 에발산 발굴 당시 채취했던 흙더미를 다시 조사하던 중 한 작은 서판을 발견한 것이다. 거기엔 이런 말이 씌어 있었다. “아루르 아루르 아루르, 아루르 레엘 야후, 타무르 아루르” 해석하면 저주 받은 자, 저주 받은 자, 저주 받은 자, 야후에 의해 저주 받은 자, 너는 죽을 것이다, 저주받은 자여”이다. 야후는 하나님의 이름이며, 이것은 성지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문자이다. 저주가 선포된 에발산에서 이처럼 저주 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여호수아는 아이성 전투를 마치고 세겜으로 가서 언약을 선포하는 의식을 한다. 여섯 지파가 축복을 선포하기 위해 그리심산 위에 서고, 다른 여섯 지파는 저주를 선포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선다. 에발산에서 선포된 저주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십계명의 내용과 비슷하다.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간음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등등 12가지 내용이다. 이것은 단순히 백성을 저주하기 위한 저주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김으로 저주 받는 것을 피할 수 있도록 알려주기 위해 저주를 선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의 말씀을 석회를 바른 돌 위에 기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를 피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그런데 왜 그리심산이 아니라 저주가 선포된 에발산일까? 그것은 저주가 끊어지기 위해서는 희생의 피가 그곳에서 흘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죄와 저주를 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이 대신 속죄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속죄의 원칙이었다. 제단은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 쌓는 것이다. 소나 양을 죽여서 그 피를 붇고 불로 제물을 태우는 곳이 제단이다.죄의 대가는 사망이기 때문에 죽음이 없으면 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제단에는 죽음이 있는 것이다. 나의 죄 문제는 내가 죽어야 해결되는데 내가 죽을 수 없으니 내 대신 제물이 죽는 것이다. 내 죄에 대한 대가가 치루어져야 용서가 있고, 그래야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는 것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은 왜 축복만 선포하시지 저주까지 선포하셨을까? 그것은 사랑의 관계가 ‘선택’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랑은 배타적이다. 하나님과의 사랑도 배타적이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다른 신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영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셨다. 그래서 사랑을 선택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원하신 것도 그러한 선택이었다.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아담은 생명 나무의 열매를 선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죽음에 이르는 저주의 열매, 선악과를 선택한다. 그것은 그가 사탄의 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사탄의 말에 마음을 빼앗기자 그 열매가 그에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버리고 독립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 아담의 선택으로 인해 저주가 합법적으로 인간의 삶에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 시작된 이 저주를 역전시키기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이 땅의 풀어놓을 사람을 찾으셨다.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12:2-3, “내가 너로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브라함의 복은 무엇을 받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으로 인해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순종의 사람들을 통해 원래 인간에게 주시고자 했던 축복이 회복되길 원하셨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에발산 제단은 이천 년 전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가해진 저주를 역전시키시기 위해 궁극적인 해결책을 시작하셔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은 우리를 향한 저주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받으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 받으신 사건은 우리가 저주에서 놓임 받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 받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에발산 제단의 피가 필요했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예수님의 보혈이 필요한 것이다. 그 보혈을 의지하는 자는 정죄 당하지 않는다. 그 피의 생명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발산은 저주의 산이 아니다. 은혜와 회복의 산이다. 그 제단에서 대신 저주 받고 피 흘린 어린 양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이상 정죄 당하지 않고 속죄의 은혜를 입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속죄의 은혜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누구를 축복하고 누구를 저주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최종 관심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만든 우리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 화목한 자녀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최종 관심인 것이다. 이것을 위해 어린 양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진 것이다.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 내가 받아야 할 수치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 내 죄로 인해 내가 당해야 할 고난을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신 것, 그것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위대한 교환인 것이다. 이사야는 그 사실을 이렇게 예언했다.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처럼 우리 인생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저주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고백을 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축복의 비결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내 자아의 죽음을 선택할 때, 저주와 보복의 악순환이 끝나는 것이다. 원수 갚고 싶은 순간 ‘나는 죽었다’라고 선언하면 더이상 분쟁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축복을 열었던 것처럼, 나의 죽음을 선포하며 내가 기꺼이 지는 십자가는 축복의 문을 여는 선택인 것이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 많은 업적을 이루고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의 최종목표가 될 수 없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는 것,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의 최종 목표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우리의 죄가 용서 받고, 우리를 향한 저주가 풀어져야 가능하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나무 위에서 저주를 받으셨다. 그리하여 우리를 향한 저주가 끊어진 것이다. 이 예수님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 받는 특권이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주어졌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존재 자체가 축복인 사람들이 된 것이다. 세상은 우리의 이러한 존재적인 부르심을 흔들 수 없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 삶에 저주가 끝나고, 저주로 신음하는 이 땅에 하나님의 축복을 풀어 놓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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