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18주년 설교: 에하드를 이루는 교회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5년 5월 3일 설교 이익환 목사

창립 18주년 설교: 에하드를 이루는 교회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 2:14-15)

ChatGPT에 물어봤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화해하기 어려운 집단은 어디인가? 첫번째 답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이었다. 두번째는 러시아인와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세번째는 북한과 남한이었다. 이들이 서로 평화를 이루기엔 서로가 받은 상처와 감정의 골이 너무도 깊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이스라엘 땅에 심겨진 지 18주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 교회에는 러시아에서 온 사람도 있고, 우크라이나에서 온 사람도 있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여전히 전쟁을 치르고 있는 유대인들도 있고, 북한 때문에 늘 안보를 걱정하는 한국분들도 있다. 세상에서는 서로를 향한 적의와 갈등이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는 지금 여기 모여 함께 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곳 이스라엘에 한인 중심 교회가 아닌, 여러 민족의 사람들이 함께 예배하는 교회로 텔아비브 욥바교회를 세우셨을까? 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에하드 (אחד)’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게 주시는 방향을 나누고자 한다.

‘유일한’, ‘하나’ 등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에하드 (אחד)’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숫자 1과는 다른 뜻을 갖고 있다. ‘에하드’는 전혀 다른 것들이 완전하게 연합하여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한다. 즉 에하드는 완전한 연합 혹은 완전한 하나됨을 뜻하는 개념이다. 빛과 어둠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낮과 밤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연합하여 하나가 될 때 ‘하루’가 된다. 이것이 천지 창조 ‘욤 에하드’에 일어난 일이다. 또한 남자와 여자는 정말 서로가 다른 존재들이다. 오죽했으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나올 정도다. 남자와 여자는 마치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것처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다. 여자는 고민이 생겼을 때 공감 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자꾸 해결책을 제시하려 한다. 이렇게 다른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한 몸이 되었을 때 성경은 그것을 ‘바살 에하드(בשר אחד)’라고 한다.

스가랴서 14장은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유명한 장이다. 거기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אחד)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אחד)이실 것이라스가랴 선지자는 세상의 마지막에 불려질 여호와의 이름은 ’에하드’라고 선언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 그것은 세상 끝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던 모든 우상과 거짓 신들, 권세들이 무너지고, 오직 여호와 만이 유일한 한 분 하나님으로 드러나실 것이라는 종말론적 선언인 것이다.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란 말은 장차 하나님이 모든 민족에게 동일한 이름으로 경배 받으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 때, 세상의 신들은 더 이상 민족마다 다른 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열방의 모든 민족들은 오직 ‘에하드’라는 여호와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될 것이다. 더 이상의 분열, 더 이상의 전쟁이 없이 사람들은 다양성 안에 완전한 연합과 하나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상상해보라. 하나님이 홀로 한 분이심을 온 세상이 아는 그 날이 온다. 모든 민족이 한 입술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날이 온다. 정말 놀라운 날이 될 것이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통곡할 것이다. 그들은 그동안 자신이 믿었던 신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고 죽인 것을 회개하게 될 것이다. 에하드의 뜻에 비추어 스가랴서 14장 9절을 다시 번역하면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완전한 연합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은 완전한 하나됨이실 것이다’가 된다. 종말의 때에 알려질 하나님의 이름은 완전한 하나됨 혹은 완전한 연합의 실체로서의 ‘에하드’가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으로 외우는 말이 있다. 그리고 죽기 전 외우고 죽는 말이 있다. 그것은 신명기 6장 4절 말씀이다.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누 아도나이 에하드 (שמע ישראל יהוה אלהינו יהוה אחד)”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선포하는 것처럼 유일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에하드’는 복수적 다양성이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은 아버지로, 아들로, 성령으로 각기 다른 존재로 계셨지만 완전히 연합된 한 분, 에하드의 하나님이시다. 이 비밀을 이해할 수 없어서 유대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하나님이 ‘에하드’이심을 숫자 1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에하드다’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완전히 연합을 의미하는 ‘에하드’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17: 21-22,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아버지와 아들이 ‘에하드’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생명을 바쳐 아버지께 순종한 아들 예수님의 고백과 사랑이 담겨져 있다. 십자가의 죽음은 생명을 바침으로 아버지와의 완전한 연합을 이루신 아들 예수님의 사랑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리는 아버지와의 완전한 연합이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우리들 서로 안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성취하는 것이다. 또한 형제 자매들 안에 온전한 하나됨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 완전한 연합, 에하드를 통해서 주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세상에 증명하기 원하신다.

그렇다면 에하드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완전한 연합, 완전한 하나됨은 오직 생명을 버리는 사랑을 실천할 때 성취된다. 내가 죽어야 이루어지는 것이 에하드다. 내가 죽어야 아내와의 에하드가 이루어진다. 내가 죽어야 형제 자매들과의 에하드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한 분, 에하드라는 것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다. 에하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가장 중요한 존재 양식이다. 에하드는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와 하나 되기 원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존재 양식이셨다. 에하드는 또한 예수님의 존재 양식이셨다. 그분은 우리가 아버지께 연합되도록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 그렇기에 에하드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임을 증명하는 존재 양식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명을 다해 형제를 사랑할 때, 그것은 에하드를 이루는 우리의 존재 양식이 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의 정의는 ‘에하드를 이루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선포한다.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여기서 “서로 원수인 둘을 하나로 만드사”라는 말씀은 “에하드(אֶחָד)”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이 편지를 받는 에베소 교회는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긴장이 있었던 공동체였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수천 년의 장벽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민족이라는 담, 율법이라는 담, 문화라는 담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담을 허무시고, 서로 원수였던 그들을 하나 되게 하셨다. 당시 초대교회는 유대인 중심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 랍비였던 사도 바울을 통해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이자, 교회의 방향인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하나됨은 민족을 초월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인 우리가 한 민족, 한 언어, 우리에게 익숙한 것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에하드의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2:15-16,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단순히 개인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다. 서로 다른 둘을 하나 되게 하여 한 새 사람을 지으려 하심이다. 헬라어로 ‘한 새 사람 (εἷς καινὸς ἄνθρωπος)’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인간 공동체’를 말한다. 단순히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제 3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존재다.
그것은 다양성 안의 연합이라든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하나됨을 닮은 에하드 공동체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된 사람들, 곧 에하드 공동체다. 우리는 정치로도, 종교로도, 철학으로도 결코 하나 될 수 없다. 정치라는 힘, 종교라는 힘을 사용할수록 우리는 더욱 극단적으로 양분화된 분열을 경험할 뿐이다.

서로 너무도 다른 유대인과 이방인, 그래서 원수였던 이들이 어떻게 ‘한 새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와 너무도 다른 사람과 우리는 어떻게‘한 새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한 새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십자가로 나아가야 한다. 거기에 내  자아를 못 박아야 한다.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다른 방법이 없다. 십자가에 나의 판단을 못 박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우월감을 못 박아야 한다. 내게 익숙한 방식들도 못 박아야 한다. 대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듯, 나도 형제를 위해 죽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적극적인 피스메이커가 되야 한다. 이것은 한 새 사람을 만들기 위한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었다. 2:16-17,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여기서 “먼 데 있는 자”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가까운 데 있는 자”는 유대인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먼 데 있는 이방인”이나 “가까운 데 있는 유대인” 모두에게 샬롬의 인사를 하셨다. 여러분은 혹 나랑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만 샬롬이라고 인사하지는 않는가? 피스메이커는 먼 데 있는 사람에게도 샬롬의 인사를 전하는 사람이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피스메이커가 되길 축원한다. 여러분이 나와 생김새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사람과 한 식탁에 앉는 그 자체가 복음이다. 나와 먼 데 있는 사람을 환대하는 교회가 진짜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교회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많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오는 나라다. 그래서 발라간(בלגן, 혼란, 무질서)의 나라이다. 그런데 2020년 코로나가 터지면서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키부츠 발룬티어로 오는 청년들도 발길이 끊겼다. 그 사이 우리 교회에 외국 청년들이 많이 오기 시작하면서 그게 불편해 떠나신 가정도 있었다. 그러던 중 2023년 10월 7일 가자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그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성지순례로 오는 사람들도 없고, 치솟는 물가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과 비자의 어려움으로 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이스라엘을 떠났다. 우리 가정도 지금 비자의 문제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교회 창립 18주년을 맞이한다. 무엇보다도 지난 18년 동안 한 주도 빠짐없이 예배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 교회가 단순히 편안한 모국어 공동체에 머무르지 않도록 애써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우리 교회가 한 민족의 편안함을 내려놓고, 서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환대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교적 부르심이자 교회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히브리어와 영어로 찬양하고, 한국어와 영어로 말씀을 나누며,
서로 다른 배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있다. 이것 역시 에하드를 이루는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가 가장 분열과 대립이 심한 이 땅, 이스라엘에서 연합을 이루는 에하드 공동체로 계속해서 자라가기를 소망한다. 서로 원수 같은 두 그룹의 사람들이 한 새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교회가 되길 소망한다. 끝으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원수 되었던 두 사람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어느 날 이 성전에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이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날이 올 것을 상상한다. 나는 언젠가 이 성전에서 북한의 청년들과 샤밧의 빵을 함께 나누며 샤밧 디너를 할 날을 기대한다. 나는 우리 교회가 민족과 언어와 전통이라는 경계를 뛰어 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에하드를 창조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장차 여호와의 이름이 에하드로 불리워질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모든 원수 된 것을 끊고, 에하드를 이루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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