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2025년 6월 7일 설교 이익환 목사
Prophet 4: 미가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고대 수사학에서 파토스(pathos)는 청중의 감정을 움직이는 정서적 호소를 말한다. 성경에서 선지자들의 파토스는 단순히 논리적 메시지를 넘어서, 하나님의 감정에 동참한 예언자의 내면적 외침을 드러낸다. 오늘 우리는 선지자 미가의 파토스를 살펴보려 한다. 미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진노의 선지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고통에 참여했던 사람이다. 예레미야가 눈물의 선지자였다면, 미가는 불의에 분노하며, 백성의 타락 앞에 애통했던 선지자였다. 오늘 말씀을 통해 “왜 하나님은 슬퍼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진노하시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미 1:8,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여기서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바로 미가 자신이다. 그는 말씀을 전하다가 울었다. 그는 예언을 하면서 옷을 찢고, 들개처럼 애통했다. 왜 울었을까?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미래의 멸망 때문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의 상처는 고칠 수 없다”고 탄식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상처받고 계셨다. 하나님의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그 무거운 마음을 미가는 함께 짊어진 것이다. 그는 ‘말씀 전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감정을 짊어진 하나님의 동역자였다.
미가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미 3:2-3,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참 충격적인 표현이다. ‘너희가 백성의 살을 뜯고, 그 가죽을 벗긴다’ 이런 말은 권력을 가진 자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런데 미가는 이 표현을 썼다. 그는 그만큼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 분노는 곧 ‘정의가 사라진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였다. 당시 정치 지도자들에게 백성들은 돌봄과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약탈과 요릿감에 불과했다. 어느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미가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였다. 그는 남 유다 출신이었지만 북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예언의 말씀을 전했다. 이러한 사항을 고려할 때, 오늘 본문의 배경은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 즉 히스기야 왕 이전 아하스 왕이 통치하던 상황으로 보인다. 아하스는 기원전 735년에서 715년 사이에 유다를 다스렸는데, 그는 하나님을 떠나 악정을 행했다. 밖으로는 앗수르의 침략 위협과 안으로는 종교적, 정치적 부패로 인해 불의가 팽배했던 시기였다. 아하스는 바알 우상을 섬겼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을 치우고 이방신의 제단을 대신 거기에 세웠다. 그는 또한 자녀를 불살라 바치는 몰렉 제사도 드렸다. 하나님은 아람 군대와 북 이스라엘 군대를 동원하여 이런 아하스를 치게 하셨다. 아하스는 이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배신을 당한다. 그야말로 나라는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처럼 혼란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부정은 날로 깊어만 갔다. 통치자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고,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우리에게는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백성들을 미혹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 신앙을 기초로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모든 구성원이 함께 번성할 때에만 희망을 이어 갈 수 있는 나라였다. 빈부 격차가 큰 국가는 온전히 지탱될 수 없고, 일반 백성의 삶이 피폐하게 되면 국가의 찬란함도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이건 어느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가는 하나님의 정의가 사라진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할 수 밖에 없었다. 미 3:12,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자신이 세운 나라와 백성을 향하여 멸망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하나님은 정의가 무너졌을 때 고통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 고통을 전하는 미가 선지자 역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멸망의 선포로 인해 백성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미 6:6-7,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당시 사람들은 맏아들의 희생을 인간이 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예물이라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인신 제사는 여호와의 명령도 아니었고, 여호와의 생각도 아니었다. 여기 나오는 질문들은 신앙을 거래로 바꾸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시도다. 즉 “무엇을 드려야 하나님이 날 기쁘게 받아주시겠습니까?”란 질문이다.자,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무엇일까? 미가 선지자는 그 답을 이렇게 말한다.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정의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משפט)’인데, 이는 단순히 법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 기준을 세우고 실천하는 삶 전체를 말한다.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약자를 보호하고, 억울한 자의 편에 서고, 거짓을 멀리하며, 모든 관계 속에서 바르게 행하기를 원하신다.현대 사회는 실력과 결과를 중요시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쟁취하며 성공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그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정직과 공정의 삶을 살았는지를 보신다.

둘째,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자’는 히브리어 ‘헤세드(חסד)’인데, 언약적 사랑, 변함 없는 긍휼을 말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나에게 잘해줄 때만이 아니라, 나에게 상처 준 이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것은 나의 이익보다 타인의 고통을 먼저 헤아리는 마음이며, 그것을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실천하는 삶이다.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에서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셨다.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헌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평소의 삶속에서 헤세드를 베푸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겸손이라는 히브리어 ‘하짜네아(הצנע)’는 겸손하게 낮아진 태도를 뜻한다.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함께 행하는 것’, 즉 ‘동행’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번제물 앞에만 서는 예배자가 아니라, 삶 속에서 함께 걷는 동행자가 되길 원하신다. 겸손은 단지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태도이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은혜를 의지하며 살게 된다.
위와 같은 세 가지 삶의 모습은 참 신앙이 가져다 주는 열매이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베풀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이 그러한 삶을 살 때 사회의 구조악과 부정과 부패는 자연스럽게 개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시스템이 바뀌면 새로운 사회가 건설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외형적인 법과 사회 구조를 개편하려고 한다. 인간이 만든 가장 이상적인 이념 중에 하나는 마르크스와 레닌에 의해 주창된 공산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념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나? 우리는 공산주의가 인간 사회에 또 다른 모순과 악을 창출해 온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제정한 어떤 이념에 근거한 제도일지라도 모든 인류에게 안정과 평화와 만족을 제공하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대통령이 바뀌고 새로운 법과 제도를 추진한다고 정의로운 사회가 될까? 새로운 대통령은 자기 권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것에 맞는 이념을 정립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념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법과 제도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좋은 사회를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보다 더 중요한 건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한 사람’이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람들이 없어 망한 것이다. 따라서 왕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 역사에서 왕은 중요하지 않았다. 왕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전했던 선지자의 목소리가 더 중요했다. 선지자의 외침을 듣지 않는 나라는 망하는 길로 갔던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 원리는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은 하나님의 평가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을 너무 우러러 보지 않길 바란다. 더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사회 구조의 개혁을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성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오직 사회 구성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베풀며, 겸손히 행할 때 참다운 사회 개혁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하고 말았으며 결국 나라의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만다.

그런데 미가의 예언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미 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가(מיכה)의 이름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라는 뜻이다. 그는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란 수사학적 질문을 던진다. 그의 이름의 의미처럼 미가가 붙들고 경험한 평생의 가치는 “주님과 같은 신이 없다”는 고백이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선포한다. 미 7:19-20,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미가는 형벌 이후에 회복이 있게 될 것을 예언한다. 유다는 무너지지만 또 다시 일으켜 세워질 것이다. 사로잡혀 갔던 자들은 돌아오게 되고 예루살렘은 재건될 것이다. 미가는 많은 이방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올 것을 예언한다. 그것은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미 4:2)”이기 때문이다. 미가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하나님에 대해 예언한 것이다.
미가는 이렇게 말한다.미 7: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이 믿음의 고백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절망의 현실 속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절망스러운 현실이지만, 하나님은 회복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선지자의 고백이다. 우리 역시 우리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파토스는 단지 분노가 아니다. 그것은 회복을 위한 고통이다. 하나님의 분노는 당신의 백성을 멸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회복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단지 죄를 책망하는 데 있지 않고, 회개한 자를 품으시는 데 있다. 오늘 우리가 넘어지고 실수했을지라도, 다시 품으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한다. 교회인 우리는 진리를 말하는 용기와 더불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품는 눈물이 필요하다. 교회는 정의를 외치되, 인애로 품고, 심판을 말하되, 회복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계엄 이후 대통령 선거까지 혼돈스런 6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대통령이 바뀌고 지지하는 정당이 정권을 잡았다고 해서 나라가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어떻게 보시는가, 그 구성원인 나를 어떻게 평가하시는 가가 중요하다.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 미슈파트를 행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마음인 인애, 헤세드를 품고 살고 있는가? 나는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며 우리가 속한 이 사회와 나라를 새롭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