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행전 7 단

성지행전 7 단: 소명을 따르라

“단 자손이 미가가 만든 것과 제사장을 취하여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성읍을 불사르되 [28]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성읍이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거리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자손이 성읍을 세우고 거기 거주하면서 [29]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성읍의 이름은 라이스였더라 [30]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새긴 신상이 자손에게 있었더라” ( 18:27-31)

 

성경에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킬 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을 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부동산 중개업자가 있었다면 이스라엘 땅 중 그 당시에 어느 지역을 가장 금싸라기 땅으로 지목했을까?  지금의 텔단이 아닐까 한다. 이곳은 땅이 비옥하고 물이 풍부하다. 헐몬산의 만년설이 땅 속에 스며들어 일년 내내 물이 펑펑 쏟아지는 곳이다. 이곳은 요단강의 시작점으로 ‘요르단’의 뜻도 ‘단에서 내려오다. 단에서 흐르다’라는 뜻이다. 한 여름에도 숲 속의 온도는 15도 정도로 시원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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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몬산에서 내려와 텔단에 흐르는 물

 

이 좋은 땅에 살던 지파는 어느 지파였을까? 단지파였다. 당시 가나안 땅에서 최고로 좋은 환경에서 살았던 그들은 정말 복받은 지파였을까? 오늘 우리는 단지파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은 이 지파를 통해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텔단은 원래 단지파의 땅이 아니었다. 원래 이곳 지명은 라이스였고 이곳 사람들은 한가하고 걱정없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단지파가 이 땅을 빼앗아 자신들의 조상의 이름을 따라 단이라고 부른 것이다. 원래 단지파가 여호수아를 통해 분배받은 땅은 지금의 텔아비브에서 벤구리온 공항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19:40-46, “일곱째로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41] 그들의 기업의 지역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42] 사알랍빈과 아얄론과 이들라와 [43] 엘론과 딤나와 에그론과 [44] 엘드게와 깁브돈과 바알랏과 [45] 여훗과 브네브락과 가드 림몬과 [46] 메얄곤과 락곤과 욥바 맞은편 경계까지라”

당시 12지파는 그들이 분배받은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가나안 일곱족속을 멸하는 것이었다. 20:16-18, “오직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17]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18] 이는 그들이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호흡이 있는 자들을 하나도 살리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명하셨다.

현대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나안 족속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하나님께서는 왜 하신 것일까? 진멸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렘’이다. “성별하다, 하나님께 바쳐지다”란 뜻이 있다. 헤렘은 진멸을 통해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이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고, 그 외의 민족들에겐 잔인한 하나님이었을까? 원래 이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약속하시면서 아브라함이 알 수도 없는 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15:13-15,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동안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후에 자손이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자손은 사대 만에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이 말씀에 의하면 출애굽이 있을 400년 이후 시점에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이 말씀대로 출애굽 당시 가나안에 살던 족속들의 죄악이 그 땅에 가득했다. 레위가 8장에 그 죄악의 실상이 나온다. 근친상간, 간음, 우상숭배, 동성연애, 수간, 자식을 몰렉에게 바치는 인신제사 등이 만연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8:25절에서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땅도 스스로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약솓의 땅 가나안이 더럽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회복을 위해 헤렘 전쟁을 명하신 것이다. 따라서 헤렘은 단순히 정복과 점령을 위한 전쟁이 아니다. 그 땅의 거룩의 회복을 위한 전쟁이다. 그런데 그 땅의 가나안 거민들만 헤렘의 대상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죄악가운데 살아갈 때 그들 역시 헤렘의 대상이 되어 포로로 끌려 갔다. 진멸전쟁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이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이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면서 이들이 이 땅의 더럽혀진 문화를 제거하기 원하셨다. 그리고 열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제사장 나라로 서 나가길 원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각 지파는 자신들에게 분배된 땅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해야 했다. 가나안 족속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이 전쟁은 반드시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23:9-10, “이는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까지 너희에게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10] 너희 사람이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실 것을 약속하신 싸움이었다. 그런데 단지파는 싸울 것을 포기한다. 아모리 족속에게 밀린 것이다. 1:34, “아모리 족속이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이들은 남쪽 해안의 블레셋족속에게도 밀려서 자신들이 분배받은 땅에 정착하는데 실패한다.

출애굽할 때만해도 단지파의 수는 6만 2700명이었다. 이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했을까? 히말라야를 넘어 한반도로 갔을까? 이들은 다섯명의 정탐꾼을 뽑아 자신들이 살만한 땅을 알아보러 보낸다. 이들이 처음 머물게 된 곳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의 집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미가의 개인 제사장을 만난다. 이 레위인도 자기 살길을 찾아 떠돌다가 정착하게 된 청년 레위인이었다. 사실 레위인은 각 지파에서 제공해주는 성읍과 십일조를 통해 생활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이 떠돌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운 레위인에 대한 규례가 그 당시 지켜지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의 대화를 보자.

18:5-6,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6]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기도로 묻고 뭔가 신앙적인 모습인 듯 하다. 그러나 이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이었다면 ‘너희가 분배받은 땅을 취해야 한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평안을 선포하며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답변을 한다. 그리하여 이 다섯명의 정탐꾼들이 이른 곳이 라이스, 지금의 텔단이었다.

18:7,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니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

한 마디로 차려놓은 밥상이었다. 이들은 돌아와서 이 성읍을 취하길 결의한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신 땅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셨지만 주변 민족들을 진멸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특히 에돔, 모압, 암몬지역은 그들에게 준 땅이기에 전쟁하지 말라고 하셨다.

단지파는 풍요로운 땅 라이스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신앙적으로 포장했다. 이들은 라이스로 올라가면서 미가의 집에 들려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져간다. 강탈한 것이다. 남의 것을 강탈해서라도 자신들의 번영과 성공을 위해 부적처럼 사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드라빔이 무엇인가? 가정의 수호신을 조각하여 만든 것이다. 라헬이 아버지집을 떠나올 때 드라빔을 훔쳐 가져왔던 것을 알 것이다. 히브리어 테라핌은 타라프에서 파생된 말이다. “편안하게 살다”라는 뜻이다. ‘안정된 삶’이 이들에겐 우상이었다. 단지파는 자신들이 훔쳐 온 드라빔과 신상이 자신들의 편안한 삶을 보장해주리라 기대했다. 그들은 한 술 더 떠서 미가의 개인제사장에게 제안한다. 18:19,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지파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그 제사장은 마음에 기뻐하여 따라 나선다. 어차피 소명에 따라 산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 역시 더 나은 조건을 따라 움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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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손의 경계는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자손이 올라가서 레셈과 싸워 그것을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하였음이라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셈을 단이라 하였더라 – 여호수아 19:47

단지파는 자신들의 야망을 따라 라이스를 정복하고 그곳 이름을 단으로 바꾼다. 이들은 자신들이 유업으로 분배받은 땅을 버리고 남에서 북으로 이동해 간 유일한 지파가 된다. 자신들의 소명을 버리고 욕망을 따라 움직인 것이다. 그들 마음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유업에 대한 기대와 책임감이 사라졌다.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사라진 것이다. 하나님 한 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사라진 곳에 자리잡은 것은 번영을 구하는 혼합주의 신앙이었다. 31절은 이 지파가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새긴 신상이 자손에게 있었더라이들은 하나님의 성막이 있었던 실로로 내려가 예배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대응할만한 신상을 모셔 놓고 섬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였다.

12:11,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하나님이 택하신 곳이 어딜까? 실로다. 7:12에는 “내 이름을 처소 실로라는 표현이 나온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지기까지 실로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택한 이 실로의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전개되길 원하셨다.

12:,13-14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14] 오직 너희의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온 지파가 일년에 세 차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실로로 나와 제사를 드려야 했다. 이것은 온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백성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의도였다. 또한 이들이 자신들만의 행복을 위해 이방인들처럼 사는 자들이 아니라  열방을 위해 제사장나라로서 살아가는 구별된 백성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단지파는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는 동안에 혼합주의 신앙에 빠진 다. 여호와 신앙을 자신들의 번영만을 위한 미신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찾았고,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신앙을 이용했다. 복이 되는 수단이라면 드라빔과 새긴 우상까지도 사용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자신들이 기준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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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단에 있는 제단 모형

이러한 불신앙의 뿌리는 훗날 여로보암의 죄로 연결된다.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내려가 제사드리다가 마음이 돌아설까봐 금송아지 신상을 만든다. 그리고 하나는 벧엘에 하나는 단에 세운다. 텔단에 가면 그가 세운 제단의 모형이 세워져 있다. 이 혼합주의 신앙은 결국 북이스라엘이 BC 722년 먼저 멸망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결국 단지파 역시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지파의 명단에서 유일하게 제외된다. 7장을 보면 단지파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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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계획하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 열왕기상 12:28-29

자신들의 소명에서 돌아섰을 때 그들은 생존을 위해 사는 자들이 되었다. 소명 없이 생존만을 위해 살 때 그들은 풍요와, 성공과 안전이라는 우상의 제단을 만들게 되었다. 무엇이 하나님이고 무엇이 바알인지 구분되지 않는 혼합주의 신앙을 갖게 된 것이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진멸하기 원했던 가나안 문화에 섞인 채 살아가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본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포기한 채 생존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은가? 소명없이 생존만을 위해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준이 아닌 나 자신이 기준이 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위험을 무릅 쓴 싸움을 싸우기 보단 평안과 번영만을 구하는 혼합주의 신앙인이 되기 쉽다. 오늘날 교회 안에 어떤 제단이 세워져있는지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성공과 번영의 제단을 쌓고 예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통해 이 땅이 거룩해지기 원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따라 살 때 이 땅은 우상과 죄로 물든 저주의 땅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된다. 오늘도 세상 도처에는 거짓 우상과 죄로 인해 신음하고 있다. 그들은 신의 이름을 부르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살육을 자행한다. 종교의 제단을 세워 거짓 평화를 말하며 그리스도 없이도 세계의 평화를 외치고 다닌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죄로 더렵혀진 이 땅을 거룩하게 하셨다. 자신을 진멸함으로 진정한 헤렘을 성취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고, 그 분의 뜻대로 살 수도 없다.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 세상을 죄에 오염되지 않은 거룩한 곳으로 회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여러분을 통하여 이루어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4년 8월 9일

 

성지행전 7 단”의 2개의 생각

  1. 홍순욱 답글

    샬롬, 텔아비브 욥바교회 목사님!

    저는 인천에 있는 부평서부감리교회 원로목사 홍순욱입니다.
    저는 예루살렘에 있는 네티비아선교회 요셉 슐람 목사님과 오랜 친구입니다.

    목사님의 성지행전7장중에 ‘헤렘’에 관한 해설과 단 지파에 관한 해설에 감동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목사님과 더욱 좋은 교제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 telavivchurch33 글쓴이답글

    도움이 되셨다니 감사하네요..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하고 언젠가 교제 나눌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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