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 강해 10 믿음의 항해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1월 14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복음서 강해10 믿음의 항해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요 6:16-21)

 

지난 주 페북 멧신저를 통해 한국에 계신 한 목사님과 소식을 나누었다. 올해 초 성지순례를 계획했었는데 그 계획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나라 분위기도 안 좋고 경제사정도 안 좋아 성도들이 취소했다는 것이다. 그 분은 한국 국내 상황이 영 안 좋다고 덧붙이셨다. 식당에 사람이 없고 연말에 길거리도 한산했다고 한다. 전제척으로 경기가 위축되어  그 상황이 꽤 오래 갈 것 같아 걱정된다고 하셨다.

경기가 안 좋다 보니까 여기 저기서 감원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전자, 자동차, 중공업 등 대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있다. 45세 정년이라는 ‘사오정’이란 말도 이제 옛말이 되는 것 같다. ‘희망퇴직’이라는 프로그램으로 20대 30대까지 퇴직 위기로 몰리고 있다고 한다. 어느 기업에서는 신입사원까지 희망퇴직 대상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이제 막 꿈을 안고 입사한 신입사원 가운데 누가 퇴직을 희망하겠는가? 그래서 근로자들 사이에서는 희망퇴직이 아니라 ‘찍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찍어서 퇴직시킨다는 것이다. 회사에 다니는 분들 중 어느 누구도 이 감원의 바람을 맞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 대다수 갈릴리 어부들이었던 제자들도 때때로 갈릴리 호수에 불어닥치는 광풍을 맞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 한 가운데서 광풍을 맞는 장면이 나온다. 광풍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지난 주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벳새다 빈들에서 초저녁 무렵 일어났던 기적이었다. 유대인들은 오후 세 시부터 해질 때까지를 제 1저녁이라하고 해 저문 일몰 이후부터를 제 2 저녁이라고 한다. 16절에서 ‘저물매’라는 것은 제 2저녁에 해당되는 시간이다. 왜 제자들은 어두워진 시각 배를 타고 가버나움 쪽으로 이동해야 했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재촉하셨기 때문이다. 마 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재촉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낭카조’이다. ‘억지로 시키다, 강요하다’는 말이다. 원치 않는 제자들을 억지로 배에 태워 보내신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요한복음을 보자. 요 6:14-15,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제자들은 거기 모인 무리들과 함께 오병이어 기적의 감흥에 젖어 있었다. 2만명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붙들어 자기들의 왕을 삼고 싶어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 자리씩 차지할 기대에 부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을 속히 떠나도록 하셨다. 그들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 한 채 마지 못해 노를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가신다.

마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예수님은 벳새다 빈들에 모여 있던 무리들도 흩어지게 하신다. 그리고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오르신 것이다.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명을 다시 확인하는 기도를 하셨을 것 같다. 정치적 메시아를 원하며 환호하는 군중들의 요구는 달콤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에 취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세상의 왕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그들을 대신해서 죽임 당하는 구원자로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놓치지 않으셨을 것이다.

예수님이 거의 밤을 새워 기도하시던 그 시간, 제자들은 여전히 갈릴리 호수 한 복판에 있었다. 광풍을 맞은 것이다. 그들이 자진해서 떠난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이 재촉하셔서 떠난 것인데 광풍을 맞은 것이다.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을 것이다. 요 6: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제자들이 노를 저어 간 거리는 십여리, 즉 4-5km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오신 시간은 마태복음을 보면 밤4경이었다. 밤ㅅ경은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의 시간이다. 당시 로마사람들은 밤을 넷으로 나누었다. 저녁 6시에서 9시 까지를 1경, 9시에서 12시까지 2경, 12시에서 3시까지를 삼경, 새벽 3시에서 6시까지를 사경으로 구분했다. 그들은 밤에 세 시간마다 보초를 교대하면서 보초를 서는 세 시간을 한 ‘경’ (watch)이라고 부른 것이다. 제자들은 저녁 해가 진 뒤 벳새다를 출발해서 새벽 동이 터올 무렵까지 갈릴리 호수 한 복판에서 사투를 벌인 것이다. 원래 뱃세다에서 가버나움까지는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8-9시간 동안 큰 바람 때문에 4-5km밖에 못간 것이다.

바람과 거센 파도로 놀란 제자들은 기진했을 것이다. 마음 약해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시자 더 놀랐다. ‘유령이라’(마14:26) 소리를 지르며 무서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4:27)고 말씀하신다. ‘안심하라’는 헬라어 ‘달새오’는 ‘용기를 내라’는 뜻이다. ‘나니’는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 계시하는 표현에 해당한다 모세가 두려워할 때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는 스스로 있는자’ ‘I am who I am’이라고 자신을 표현하신 적이 있다. ‘에고 에이미’는 그와 같은 의미의 표현인 것이다. 주님은 풍랑이 이는 바다 위로 걸어오시면서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창조주로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사실 제자들이 광풍을 맞은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예수님과 한 배를 탔을 때도 광풍을 맞은 적이 있다. 막 4:37-39,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파도가 얼마가 높은지, 바람이 얼마나 강한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명령으로 바다와 바람을 잠잠하게 하셨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서로에게 말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자라는 순간이었다. 폭풍이 없었다면 결코 알 수 없었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새롭게 생겨났다. 예수님은 온 우주와 천하만물을 다스리는 왕이셨던 것이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다시 광풍을 경험하면서 반복학습이 필요했던 것 같다.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만물을 다스리는 왕으로 다시 배워야 했다. 그들은 광풍 속에서 9시간 노젓기라는 혹독한 댓가를 지불하며 배워야 했던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한 제자의 모습이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누굴까? 베드로다. 마 14:28-30,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베드로는 행동부터하고 생각은 나중에 하는 전형적인 유형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시행착오를 통해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경험한다. 그는 최소한 믿음으로 물 위를 걸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며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시선을 놓친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그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친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달은 자의 절박한 외침이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하신다. 풍랑이 문제가 아니라 풍랑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올랐을 때 바람이 그친다. 요 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거친 풍랑 속에서 예수님이 주목하셨던 것은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앞으로 지상에 남아 교회를 세우며 거친 풍랑을 헤쳐나가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거친 바람 속에서 발견한 것은 주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었다. 풍랑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신뢰가 필요함을 그들은 9시간 노를 저은 끝에 몸으로 배운 것이다. 그 배움의 순간이 끝나자 바람은 그치고 그들은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아르벨산에서 내려다 본 갈릴리 호수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갈릴리 호수는 소우주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축소판이다. 평상시 갈릴리 호수는 너무도 잔잔하다. 배로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다. 그러나 풍랑이 일 때가 있다. 그 때는 배가 있다고해서 결코 안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각자의 배를 타고 인생의 항해를 하고 있다. 요즘같이 경기가 좋지않고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평생직장’이란 개념은 사라진지 오래인 것 같다. 안정된 직장은 누구에게도 없다. 마치 작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는 것 같다. 언제 바람이 불어닥칠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 졸이며 산다. 나보다 큰 배를 타고 있는 사람을 보면 더 안전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안전해 보이는 삶을 바라보며 더 큰 배에 타기를 원한다. 그러나 큰 배를 탔다고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 없다. 더 크게 흔들릴 뿐이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이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 인생의 문제가 바람이나 파도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더 크고 안전한 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광풍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의 모든 잘못된 기대와 야망, 의심은 광풍에 흔들려야만 했다. 바람과 함께 그들의 생각 속에서 떨어져 나가야 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진행하셔야 했다. 그들과 함께 새로운 판을 짜셔야 했다. 그러기 위해 제자들 안에 있는 세상적인 안전에 대한 기준들은 흔들려야 했다. 그들은 이제 진행될 하나님나라를 위해 더 큰 믿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왜 의심하였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의심은 헬라어로 ‘디스타조’이다. ‘이중으로 하다’는 뜻이다. 베드로의 경우, 그는 예수님을 바라봤지만 또한 풍랑도 바라봤다. 이중으로 한 것이다. 거기서 의심이 생겨 물에 빠지게 된 것이다. 바람이 강하게 불 때, 배가 크게 흔들릴 때 우리는 보통 두려움으로 반응한다. 올 해 예상되는 교회의 상황을 바라볼 때 그 어느때보다 두려운 마음이 드는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주님은 풍랑 속에 있던 제자들을 지켜보고 계셨다. 산 위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다. 풍랑이 불어올 때 우리 안에 흔들려야 할 것이 있다면 다 흔들려야 한다. 씻겨져야할 것이 있다면 다 씻겨져 나가야 한다. 주님은 풍랑이 없는 삶을 보장해주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주님은 우리가 두려워할 일들에서 무조건 열외시켜주시지 않는다. 다만 두려운 환경 속에서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더욱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이스라엘에서 예배하는 교회 공동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에스겔 47장 말씀처럼 죽은 바다가 다시 살아나 물고기가 살고, 그 물고기를 잡기 위해 사해에 어부가 서게 된다는 것은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그래서 모든 교회의 사명이다. 우리는 그 사명 때문에 이 땅에 교회로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재촉하여 간 곳에서 풍랑을 맞을 수 있다. 그러나 풍랑을 빨리 멈추어 달라는 것이 우리가 기도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풍랑과 상관없이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야 한다.

끝으로 마태복음은 바람이 그친 뒤의 상황을 묘사한다. 마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풍랑을 통과하면서 우리와 우리의 주변 사람들이 주님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일만 남게 되길 바란다. 올 한 해도 많은 풍랑들이 예상된다. 그러나 우리는 풍랑 때문에 간 졸이며 우리의 존재의 크기마저 작아져선 안 될 것이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더 큰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길 축원한다. 그리하여 올 한 해도 계속해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항해를 믿음으로 감당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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