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 강해 13 변화를 만드는 기도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2월 4일 설교 이익환 목사

복음서 강해13   변화를 만드는 기도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눅 12:28-36)

 

촉이 좋은 사람이 있다. 상황의 변화를 감각적으로 꿰뚫어 보는 사람을 말한다. 닿을 촉(觸)이라는 한자어는 뿔각 또는 더듬이 각(角)자에 벌레무리촉(蜀)자가 합쳐진 말이다. 벌레가 더듬이로 닿는 촉감에 의해 활동을 하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다. 벌레는 더듬이로 먹을거리를 찾아다니거나, 적이 오는 것을 피한다. 더듬이를 통해 감각적으로 상황파악을 하는 것이다. 소비자의 트렌드가 워낙 빨리 변하다보니 요즘은 촉을 가진 기업이 살아남는다고 한다. 소비자의 변화하는 욕구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감지해 그 변화에 대응하고 시장을 앞서서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일본의 글로벌 기업 NEC의 고바야시 회장이 바로 그런 촉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1964년 NEC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그 때만해도 일본의 전자사업은 시작단계에 불과했다. 그는 1962년 출판된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마타루브의 ‘지식산업’이란 책을 읽는다. 그리고 앞으로의 경제발전에 있어서 지식 정보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얻는다. 그래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고 처리하는 통신 컴퓨터 사업에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해 원자물리연구소를 폐쇄하고 통신 컴퓨터 기술 발전을 위해 반도체 사업에 주력한다. 그는 그러한 결단으로 인해 NEC를 세계적인 하이테크 기업으로 만들고, 오늘날 전자대국 일본의 기틀을 만드는 장본인이 된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단 한가지뿐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가장 안정된 기업은 불안전하고, 가장 불안정한 기업이 안전하다.’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라는 말이다. 그러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잦은 변화보다는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그런데 불안정하더라도 계속 변화를 추구하는 기업만이 살아남는 현실이기 때문에 ‘가장 불안정한 기업이 안전하다’는 그의 말이 진리처럼 느껴진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복음서는 변화산 사건이다.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된 이 사건은 당시 그의 제자들과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변화산은 다볼산인가 헐몬산인가? 예수님 당시 다볼산에는 요새화된 도시가 있었기 때문에 변형의 무대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외에 다른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변화산은 거기서 가까운 헐몬산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베드로는 이 산을 예수님과 함께 오르며 별로 마음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과 며칠 전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예수님께 쓴 소리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예수님으로부터 사탄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어 말씀하셨다. 마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 고민했을 것이다. ‘이 말은 또 무슨 말일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들도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베드로는 마음이 더욱 복잡해 졌을 것이다. 그로부터 팔일쯤 뒤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신 것이다.

마태, 마가복음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랐다고 기록한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을 가장 가까이서 이해해야 할 이너써클이었다. 그런데 기도 중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용모가 변화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변화 사건이 기도 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의 변화는 스스로 만들어내신 것이 아니었다. 기도하실  때에 변화가 된 것이다. 능동이 아닌 수동이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분의 뜻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위기의 순간마다 기도하셨다. 십자가를 바로 앞 둔 시점에서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로 기도하러 가셨다. 여기서도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신다. 죽음의 잔을 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결단을 하신다. 기도를 통해 가능한 변화다.

반면 제자들은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깊이 졸았다. 겟세마네에서도 졸았고, 변화산에서도 졸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예수님의 변형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말하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을 보게 된다. 잠이 확 깨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누구인가?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엘리야는 누구인가?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들이 베드로와 두 제자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눅 12: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구약의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이 나타나서 신약의 사건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확증하는 장면이다. 모세와 엘리야도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실 것에 대해 알았던 것이다.

여기서 별세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이 구절은 영어로 보면 그 뜻이 더 드러난다. “They spoke about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bring to fulfillment at Jerusalem.” 예수님의 떠남은 예언의 성취를 가져오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별세는 헬라어로 ‘엑소더스 Exodus’이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를 뿌림으로 죽지않고 출애굽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제 세상 모든 인류가 죄에서 출애굽하기 위해 예수님이 죽음이 요구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는 예수님에게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셔서 그 마음을 준비시키고 계셨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또 베드로가 나선다. 눅 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베드로는 참 맘에 드는 캐릭터다. 우리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실수를 그는 종합세트로 보여준다. 베드로는 그 영광스런 순간이 계속되길 바랬다. 고난이 없는 영광에 머무르고 싶어 했다. 모세와 엘리야가 말한 예수님의 별세는 베드로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고난받는 메시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베드로의 반응은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우리 역시 지금 여기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나라가 임하길 바란다. 건강과 성공, 무사고와 행복이 내 것이 되길 바란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주시고, 형통케 해주시리라 기대한다. 고난은 비껴가고 축복만 있는 삶,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은 나의 기대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기대하지 내가 그분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좀처럼 엎드리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삶이 진행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몹시 불편해 한다. 고난과 십자가는 우리의 관심 밖에 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다. 나는 베드로의 반응이 실수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그 당시 베드로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그의 관심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붙잡기 원하셨다.

눅 9: 34-36,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하나님이 직접 제자들에게 상황 정리를 해주시고 있다. 그들은 더이상 모세와 엘리야를 붙잡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겐 오직 예수님만 남았다. 오직 그의 말을 듣고 따라야 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이 변화산 사건 이후 그들은 최소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들 앞에 다가올 현실임을 이해하게 된다.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서야 예수님이 그토록 붙잡기 원하셨던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기대에 맞춰 예수님을 조종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에 자신을 복종하게 된다. 이 변화산에서의 경험은 베드로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었을까?

그는 베드로후서 1:16-18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자라 [17] 지극히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것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변화산에서의 경험을 초대교회 성도들과 나누고 있다. 그것은 교묘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친히 보고 들은 것임을 강조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부활뿐만아니라 재림에 대해서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영광의 주님을 경험하였기에 그의 목에 십자가가 드리워졌을 때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의 기대와 열정으로 이 땅에서 산 것이 아니라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시간표를 살았다.

오늘 우리가 겪는 어려움 때문에 우리는 내일을 소망스런 눈으로 바라보지 못할 때가 있다. 고난과 고통의 무게가 너무 커서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절망과 비통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앞둔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변화산의 경험을 허락하신 목적이 있다. 그것은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나라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또한 변화산의 사건은 우리 역시 고난을 앞두고 기도해야 함을 보여준다. 기도할 때 우리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 의지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행동의 변화로 이어진다. 기도할 때 우리는 촉이 좋은 사람으로 변한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처럼 확실한 것은 없다. 상황이 안정적이라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니다. 사람도, 물질도, 환경도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촉을 세우는 일이다. 그것이 세워질 때 우리는 시대의 상황과 트렌드를 뛰어넘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2017년도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이스라엘은 더더욱 많은 것이 예측불허의 나라다. 기도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촉이 없으면 정말 버티기 힘든 나라다. 개인적으로 교회의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더 기도하게 되었고 기도하면서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안전한 환경으로 피하지 말고 끝까지 가라는 마음이었다. 교회적으로 변화가 있을 것이다. 교회는 여전히 안정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우리 마음의 변화를 경험할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고난을 통과할 수 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광에 이르게 된다. 기도하는 교회는 겉으로 보이는 여러 지표들이 불안정한 교회일 수 있다. 그러나 기도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가장 안전한 교회가 될 것이다. 올 한 해 함께 기도하는 우리가 되길 원한다. 그리하여 변화되는 환경에 눌리지 않고 함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만들어 내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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