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23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하나가 된다

이번 주 토라포션: 레6:1-8:36/ 말 3:4-24/ 막 7:31-9:1

토라포션 23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하나가 된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46]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길짐승에 대한 규례니 [47]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레 11:44-47)

 

타이타닉호 승객 2200명 중 구조된 사람은 700명이었다. 1500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유독 유대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타이타닉호에 많이 탔던 이유가 뭘까? 물론 유대인들 중에 부자가 많아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타이타닉호에서 코셔음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우리 배에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특별히 유대인 주방장을 고용했다.” 이것이 당시 타이타닉호의 마케팅 포인트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코셔문화에 대해서 접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맥도날드에 가면 치즈버거를 먹을 수 없다. 치즈와 고기가 함께 어우러지는 맛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신명기 말씀 때문이다. 신 14:21,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생명을 주는 젖과 생명이 없는 죽은 고기를 함께 섞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밖에서 산 아이스크림도 코셔 맥도날드에는 갖고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 집에 방문하는 유대인들 중에 어떤 분은 물 한모금도 안 마시는 분이 있다.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감정이 있다. ‘아, 이 사람은 유대인이고, 나는 이방인이구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릇도 코셔라는 것이었다. 유대인의 까다로운 음식문화는 구약성경 말씀 때문에 시작되었다. 신약의 성도들인 우리 이방인들은 이 유대인들의 코셔문화를 어떻게 봐야할지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유대인의 정결음식법을 ‘카샤룻’이라고 한다. 카샤룻은 ‘적당한, 적절한, 옳은’이란 뜻이다. 어떤 음식이 옳은 음식인지, 어떤 음식은 옳지 않은지, 또 음식을 어떻게 조리해야 적절한 것인지를 다룬 유대 율법이 바로 카샤룻이다. 코셔는 이 카샤룻의 기준에 맞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반면 먹을 수 없는 음식이나 쓸 수 없는 그릇은 ‘트레이프’라고 부른다. ‘찢긴’이란 뜻인데, 다른 동물에게 찢긴 동물을 먹지 말라는 계명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레위기 11장을 보면 음식계의 육해공군이 나온다. 먼저 육지에 사는 동물 중 먹어도 되는 것의 기준이 있다.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을 하는 것이다. 소, 양, 염소 등이 해당된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지만 왜 못먹는가? 새김질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돼지는 줘도 안먹는 음식이 되었다. 여기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없어서 못먹는 것이지만…  바다에 있는 물고기 중에 코셔의 기준은 지느러미와 비늘 둘 다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갈릴리 근처에 가면 매기와 장어가 많이 있는데, 유대인들이 잡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비늘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에 나는 새는 8천 6백 종에 이른다. 대부분의 새는 먹을 수 있으나, 독수리나, 매, 올빼미, 박쥐 같은 육식 조류는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분류되어 있다.

음식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안지킬 수 없는 것이다. 랍비 도닌은 “음식법들은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이며 음식을 먹는 단순한 행위를 종교의식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매일 매일 밥상을 준비하면서 무엇이 정결하고 무엇이 부정한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코셔를 지키면서 그들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해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세 가지 아이덴티티 마커(identity makers)가 있다. 할례, 안식일, 음식법이다. 그 중 특히 음식법을 통해 유대인들은 세계 여러나라에 흩어져도 그 나라의 이방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이 한국에 와서 돼지머리 앞에서 제사드리는 것을 봤다면 어땠을까? 기겁을 하고 그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코셔가 생활화되었기에 그들은 이방문화, 특히 우상에게 절하는 문화에 쉽게 동화되는 것이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목에 칼이 들어오고, 재산을 다 남긴 채 그 나라를 쫓겨날지언정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음식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 나라로 구별되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 이방인들과 구별되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은 쉽게 이방문화에 영향받아 그들의 정체성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유대인들이 음식법을 잘못 적용한 것이다. 자신들의 구별됨을 위해 주신 음식법을 이방민족을 차별하는 차별법으로 적용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는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보았다. 그래서 이방인들과의 친교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밥을 같이 먹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열방의 복이 되라고 세운 제사장나라 백성들이 그들이 세운 음식법이라는 분리장벽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갈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음식이라는 장벽 때문에 멈춰졌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구속역사를 시작하셔야 했다. 바울은 이방인 교회인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해 말했다. 엡 2:13-16,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여기서 나오는 둘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구속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하나가 될 수 없는 모든 장벽을 허셨다. 구약의 동물제사, 그리고 할례와 음식법을 폐하시고 이방인 유대인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이제 신약의 교회는 왕같은 제사장이 되어 함께 친교를 나누며 열방에 복을 나누는 부르심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히 9:9-12,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신약의 백성들은 더이상 코셔를 지킴으로 정결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를 위한 속죄의 피를 흘리셨기에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유대인에게 가르쳐주시길 원했다. 그래서 유대인인 베드로가 기도하는 시간에 환상을 보여주셨다. 행 10:11-13,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못 먹는 트레이프만 모아서 산채로 부페를 차려주셨다. 뼈 속 깊이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당연히 질겁을 했다. 행 10: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행 10: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하나님은 유대인으로서 베드로가 갖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뿌리 채 뽑기 원하셨다. 그래서 이런 일을 세 번이나 반복하셨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그 음식일뿐만 아니라 그 음식을 먹는 이방인들이었다.

이 일 후에 베드로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사람을 보내 온 이방인 고넬료를 만난다. 베드로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는구나…’ 베드로는 놀랐다. 행 10:34-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음식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뀐다. 이방인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이 깨진다. ‘구별됨이 다가 아니었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구나’라고 깨닫게 된 것이다. 유대인의 패러다임이 바뀐 이 지점에서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었다. 욥바는 바로 선교패러다임이 바뀐 곳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친교와 선교가 시작된다. 다른 사람과 친교가 안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나는 괜찮고 쟤는 괜찮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정상이고 쟤는 이상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와 너가 다르다는 것으로 분리장벽을 쌓기 전에 상대방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임을 명심해야 한다.

구약의 음식법은 이제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구속력이 없다.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도 이방인에게 음식법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행 15:19-20,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음식법을 철통같이 지키는 유대인들과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 코셔가 그들의 정체성이 된 유대인들에게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말하며 신약성경의 기준을 들이댈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바울 당시 로마교회 상황이 우리가 참고할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로마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섞여 있었다. 당연히 음식문제로 인해 그들은 서로 섞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 문제에 대해 바울이 말했다. 롬 14:6,13,15,17,19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롬 15: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싸우라고 부르시지 않았다. 사랑으로 서로 하나되라고 부르셨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을 바꾸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지키는 것을 존중해야 한다. 존중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처음 명령하신 것을 그들이 대가지불하면서까지 지금까지 지키고 있음에 우리는 존경을 표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삼각김밥을 무척 좋아한다. 한국 잡채도 좋아한다. 음식으로 장벽이 생겨버린 그들에게 한국음식으로 그 마음의 장벽을 허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러분들에게 도전한다. 유대인들과 교제할 수 있다면 누구와도 교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그들의 기준과 그들의 문화를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프랑스 코셔 가게에서 테러가 나도 그들은 결코 코셔라는 유대인의 지표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고집스럽게 보이고 그들이 스스로 만든 분리 장벽때문에 가까이 가기 싫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처음 택하신 장자들이다.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옛언약에 충성하고 있는 민족이다. 그들은 이방인인 우리 때문에 지금까지 대가지불하고 있는 민족이다. 복음이 온 세계에 전해지기까지 그들의 눈은 가리워진채 온 세계로부터 미움받는 댓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친교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우리가 이스라엘에 살고 있다는 것이 기회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허무신 막힌 담을 우리도 허물어야 한다. 우리 교회 창립기념일이나 아니면 다른 좋은 날에 한국식 코셔 음식으로 그들을 섬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유대인들이 구원의 가지에 접붙여지는 그 날까지 교회인 우리의 부르심은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유대인들이 접붙여질 때 완성된다. 교회인 우리들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만 그들과의 친교가 가능하다. 편견이 깨어져야 하나가 될 수 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구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선교의 완성을 위해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사람에 대한 관점을 점검해야 한다. 욥바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체험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길 바란다. 뼈속 깊이 자리잡은 우리들의 고정관념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변화되길 바란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하나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 앞에 순종할 수 있는 나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4월 2일 이익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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